[사진]

또 하나의 펜이 끝났다.

지금까지 작살낸 펜만 100개는 넘지 않았나 싶다.

나는 무언가 쓰는 걸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펜이 빨리 수명을 다한다.

모나미 볼펜기준으로는

빠르면 일주일만에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펜은 오늘 한자를 외워볼 요량으로

(나는 한자가 굉-장히 약하다)

깨적거리는 동안에 쫑이 났다.

뭐...

왠지 다른 때랑 기분이 좀 달랐다고 할까.

그래도 공부하는 도중에 펜을 다 쓴거니까 말이지.





[08:04]


야마노테센(일본 전철 이름)을 타고

신오쿠보에서 오까치마치로 오는 도중 두가지 일이 있었다.




신오쿠보 다음역인가.....

하얀털이 달린 벼색 가죽부츠에

정말로 화려한 색색깔로 수 놓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번쩍거리는 옅은 파랑티에

자기 몸보다 더 작은 듯한 가죽 점퍼를 입은,

그리고

머리칼은 뭐랄까......

노을의 마지막에 볼 수 있는 그런 색감이었는데...

참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런 색이었다.





어쨌든

이 여자는 들어오자 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내가 본 일본사람들은

적어도 지하철에선 누군가에게 시선집중을 안한다.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이상은 완전 무관심인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명 두명 이 여자를 힐끔 힐끔 쳐다 보았다.

이 여자는 내 앞(내 자리는 가장 구석이었다)에 잠시 서 있다가

자리가 비자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 시선 때문에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왜....?

너무 예뻐서....?








아니.

이 여자는 시선을 끌만한 미인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여자가 정말로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것이다.

마치 지하철에 있는 사람은 다 들으라는 듯이.

볼륨을 왠만큼 높이고 음악을 듣고 있는데도

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하철 출입문 앞에서

남자친구와 같이 탄듯한 어떤 한 여자가

정말로 짜증난다는 듯이 이 여자를 쳐다보는데

어찌나 표정이 리얼한지

'아... 진짜 재수없어....'라고 얼굴로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1분쯤 지났을까...

반대편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바바리 코트를 입은

백색머리의 노인 한분이 약간 인상을 구기고는

이 여자에게 한마디 했다.

... ....

이상하게도

뭔가 굉장히 정겨웠다.

일본에선 절대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뭐...

역시나

노인이 말하거나 말거나 이 여자는

본체도 하지않고 전화통화에 집중했다.

노인은 잠시 여자를 쳐다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스고이 온나다나(대단한 여자구나..)'

라고 생각하며 볼륨을 약간 줄였다.

볼륨을 줄이고 보니 정말로 굉장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을 처음 본 것이다.

약간의 덜컹거리는 소리만을 제외하곤 적막한 지하철.

그 지하철안에서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혼자서 엄청나게 떠드는 여자.

무슨 만담 보러 온것도 아니고...

왠지 기묘했다....







이 여자는 통화를 끝내더니

가방을 열었다.

여기서 또 한번 놀랐다.

가방에서 가방크기만한 거울을 꺼내는 것이다.

자기 얼굴보다 두배는 큰 동그란 거울.

그리고는

요리조리 자신의 얼굴을 본다....

이 순간 나는 이 여자의 성장과정이

정말로 궁금해졌는데

그렇다고

'당신의 성장과정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요량이라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거울을 다시 가방에 넣고 이 여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을 걸었다.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하는데 우선은 무시했다.

왠지 이 지하철에서 이 여자랑 말을 하면

공공의 적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역시나 스고이 온나(대단한 여자)라...

포기하지 않고 다시한번 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여자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질문은

지금 역이 '이케부쿠로 역'이 맞나는 거였다....







일본의 야마노테센은 시설이 좋은 편이라

지하철의 출입문 입구 위에 14인치정도 되는 화면이 붙어 있다.

거기엔 역의 지도와 광고, 다음역등이 표시된다.

.......

파파뉴기아 원주민도 알 수있을 만큼

26만 올컬러 평면 화면으로 다음역이 이케부쿠로라고 뜨는데다

5.1돌비 디지털로 안내방송까지 나오는데도

물어보는 이여자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굉장히 돈많고 핸섬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너무 흥분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않으면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건 알 수 없고...






어쨌든 나는 알면서도 모른척 했다.

'스미마셍가, 와따시와 간꼬꾸징데쓰까라.... 죳또 와까리 마셍네'

(미안하지만 제가 한국인이라... 잘 모르겠네요)

여자는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지금까지 일본에서 나에게 길을 물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이렇다. 하긴 내가 한국에서 길을 몰라

누군가에 물었는데 그 사람이 일본인이면 약간 황당할 듯 하다)

아.... 하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때 이미 이케부쿠로 역에 도착했었다)








뭐 그리고 역을 놓쳤으면 더 재밌을 뻔 했는데

이 여자는 오른쪽 사람에게 다시금 물어보고는

뛰쳐 나가듯이 출입문을 통과했다.

간만에 재밌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일본에는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었고

원래 이 나라는 그런 인식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많이 양보한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정겨웠다.






오늘은 왠지 서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지하철을 탄 기분이다....







BY 죽지 않는 돌고래 / 0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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