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스런 글을 기고하거나 자잘한 대회에서 상금을 받아 용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내 공식적인 직책은 백수다. 물론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수많은 스카우트를 거절한 탓도 있지만(농담이다), 이 생활을 하고 있노라면 내 적성이 바로 이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천직 수준이다.


 


군대라는 게 길게 보면 괜찮은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개인적으로 백수도 그에 못지 않는 좋은 인간단련이 되는 듯하다. 물론 나처럼 대책 없이 낙천적인 사람에 한해서일 수도 있지만 이 기간만큼 인간을 아는데 좋은 경험을 한적도 없다. 군대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조금은 손에 잡힌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강하고 선한 존재인지 말이다. 백수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가끔은 새로운 눈이 뜨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인간을 보는 제3의 눈인가 싶을 정도로. 일전에 친구들과 모여 이런저런 세상얘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는데 반은 졸업반, 반은 휴학이나 유학을 다녀온 관계로 1년 이후에 졸업할 친구들이었다. 물론, 이미 졸업을 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 졸업까지 1년이나 남은 친구가 졸업 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친구를 은근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인간적인 친구가 저런 말을 하다니, 귀를 의심했지만 인간의 본성이란 게 또 그렇게 드러나나 보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 곳에 앉아 있는 여러 사람을 아프게 했다.



 

그가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은 이런 듯하다. 졸업하고 번듯한 회사나 직업을 갖지 못하면 한심하고 가망 없는 녀석, 그 반대라면, 번듯한 기업에 다니게 될 거라고 상상하는 자신과 동급. 오래 전이었다면 소주병으로 머리를 강하게 때린 뒤 멱살을 잡았을 것이다.(물론 그런 적은 없다. 어디까지나 눈빛으로) 그리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친구를 무시해선 안돼.라고. 나도 마음이 느슨해진 탓인지 그러진 못했다. 대신 그들이 차근차근 준비하는 어떤 일들에 대해서(니가 무시할 만한 녀석들이 아니야 따위), 그리고 역시나 별 관계없는 내 자랑도 좀 했던 것 같다. 알다시피 나는 너무 잘나서 자랑을 안 할 수가 없다. (...)

 



한번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와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겼다. 이 친구도 예상치 못하게 은근슬쩍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내 기준으로 대기업에 다니는 건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했다



 

살다 보면 남의 시기심이나 질투로 밖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불쌍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이다. 끊임없이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얼 하고 싶고 무얼 원하는지 보다, 남이 얼마나 자기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는가가 인생의 목표가 된다. 이들은 평생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고 평생 남을 무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연애조차도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다 남들이 얼마나 부러워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사람마다 가치 기준이 달라 내가 무어라 참견할 건 아니지만.



 

학창시절, 부모님과 차를 타고 가는데 이런 말을 들었다. 너무 그렇게 사는 것도 좋지 않다고. 대학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세간의 눈에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일류 대학에 합격한 애들을 부러워하거나 열등감을 가져야 발전이 있을 텐데 하고 말이다. 물론 나도 열등감이 있기는 하지만 공부 잘하는 애를 부러워한 적은 없다. 그건 맘만 먹으면 내가 최고로 잘할 수 있는 거니까. (다만 당신과 마찬가지로 맘을 먹어 본적은 없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적이 한번 있었다. 친한 친구가 취업 준비를 하다가 난 한번 졌다 아이가라고 말을 하는데 슬펐다. 웬만해선 누가 앞에서 질질 짜고 난리를 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내가, 정말 슬펐다. 한번 졌다는 말은 지방의 그다지 지명도 없는 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차별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다. 이 친구는 자기 분야에서 전국 제일의 상까지 받은 친군데, 그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대한민국의 학력차별이 얼마나 두터운지, 만사에 낙천적인 나도 그 순간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 백수로 무시 받고 있는 친구들, 그리고 학력차별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친구들. 나도 한심한 사람이지만 인생, 길게 봐야 된다.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능력 있는 친구들인데, 조금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이유만으로 받아서는 안될 상처를 받거나, 필요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을 보자면 가슴이 아프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얘기 몇 개하고 끝내자.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한심한, 아니 주위 사람들에게 한심하게 보였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대는 십 수년 전, 서울의 한 집이다. 삼십이 넘게 집안에서만 빈둥거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멀쩡한 아들이 10년 동안 집에서만 빈둥거리고 있으니 한심해서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고 하는데 아들은 언제나 묵묵부답, 어머니 속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서른 중반쯤, 시나리오가 당선됐다고 하니 어머니가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슬픈 눈으로 바라보셨단다. 이 사람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그리고 달콤한 인생을 만든 김지운 감독이다. 백수 시절에는 아무도 자기랑 안 놀아줬다는데 지금은 주위에 사람이 북적인다.



 
   

영국의 한 작은 마을. 폭력 남편과 이혼한 후 싱글맘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는 정부보조금을 받을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수년간을 실업자로 지냈다. 분유 값을 벌기 위해 예전에 쓰던 소설을 겨우 이어나가 완성했지만 십 수 군데의 출판사에서 모조리 거절당했고 마지막에 이름 없는 조그만 출판사가 겨우 그녀의 책을 출판해 주었다. 이 책이 바로 전세계 65개국 언어로 출판되고 있는 해리포터. 참고로 저자인 조앤롤링의 공식재산은 이미 2004년도에 1조원을 넘었다. 해리포터가 10년간(1997~2006)벌어 들인 돈이 같은 기간 한국의 반도체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보다 77조원이 많으니(해리포터: 308, 우리나라 반도체: 231)가히 백수계의 지존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소개하자. 백수 계에서 이 분을 빼면 뺨 맞는다. 500년 전에 32살까지 백수로 지내다가 겨우 무관에 급제한 분이 있었다. 조선 시대 평균수명이 40세 전후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굉장한 나이에 취직한 셈이다. 그 후에도 14년 동안 미관말직에 전전했던 그는, 아마 시대가 평온했다면 변방의 이름 없는 말단 장교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몇 번의 좌절을 거친 후,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23 23승 무패의 싸나이 성웅 이순신이다. 이분께서는 백수 계에서도 성웅 되시겠다.



 

상고출신의 고 노무현 대통령도 막노동판까지 전전하며 약 10년간 백수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백수로 무시 받고 학력 때문에 차별 받는 내 친구들. 서럽고 슬프더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만은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이럴 때가 인생의 황금기를 위한 단단한 받침대이자 진짜 친구를 가릴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니겠는가. 



어둠이 길수록 새벽도 가깝다. 난 그렇게 믿는다. 백수인 주제에 이런 글을 적고 있지만 나도 그럴 거라 믿는다. 






2008.12.18 


'■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군대에 가보는 것도  (0) 2009.04.09
생각으로 쫓지말고  (0) 2009.04.08
가장 행복하다  (1) 2009.04.08
오직 영감인가  (1) 2009.04.07
남을 상처입히기 위해선  (3) 2009.04.06
말은 짧은 편이 좋다  (0) 2009.04.05
GOP - 정신나간 사람들이 있는 곳  (0) 2009.04.04
기억할 것 또는 주의할 것  (5) 2008.11.18
마지막에 남는 것  (14) 2008.11.16
혼자인 기분  (1) 2006.04.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