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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쟁의 뒤편(1) - 아군을 죽인 아군.


2010. 06. 25. 금요일

죽지않는돌고래

 

0.

 

폐광에 사람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묻어 버린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돌만
매단 채 철사로 엮어 바다 속에 던져 버린다. 남녀를 강제로 정교 맺게 한
다음 바다에 버린다. 여자를 빨갱이라고 위협하며 강간하고 죽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약 60년 전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곳에
서 일어난 일이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계획적으로
로 일어난 일이다.

 

놀랍게도 이 학살극의 총 지휘자는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
에게나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 백발의 단정을 모습을
하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던 할아버지, 우익에서 대한민국의 국부라 칭하
는 남자, 바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그 주인공이다.


 

 


1.

 

필자가 위에 열거한 내용은 보도연맹 사건(保導聯盟事件)의 극히 일부분이다. 보도연맹 사건이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국군과 반공 극우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를 포함해 최소 20만에서 많게는 100만명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사건이다.

 

‘보도연맹’은 표면적으로는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에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을 전향시키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다.

 

하지만 가입된 사람들의 대다수가 선량한 민중들이었다. 정부에서 지역별 할당제를 주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가입한 사람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밭 메다 돌아오는 길에 ‘여기에 지장 찍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이장의 한마디에 생각 없이 지장 하나 찍어 주었다가 이유도 모른 채 살해당하는 식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민간인 학살로 기록되고 있는 이 사건의 진짜 무서운 점은 아직도 이 일을 모르는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이 나라 최고 권력층이었던 이승만이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며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한 어떠한 호소도 용서치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눈앞에서 끌려가 살해당한 억울함, 그 억울함의 호소는 곧 빨갱이라는 낙인과 고문, 끊임없는 감시와 감옥행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 이 기괴한 학살극은 아직 제대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의 두 사건보다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

 

또한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를 거치며 겨우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려고 할 때,

 

‘과거 일을 돌아봐서 무엇 하나. 경제가 어려우니 과거는 덮어두고 앞을 향해 달려가자’

 

라고 주장하는 생각 없이 미래지향적이기만 한 정권이 들어 선 점이 그 참담함을 더한다.

 

 

2.

 


 

2010년 6월 17일 오후 3시, 한국전쟁발발 60년 기념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국회의원 강창일’,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한국전쟁 후 민간인 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국민과 함께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주최 하에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행사다.

 

앞서 설명했던 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 유족 뿐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에 일어난 모든 형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관계자 및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이는 행사다.

 

6월 25일에 실을 한국전쟁 발발 60년 기획 기사를 쓰기 위해 당일은 일찍 사옥을 나와 여의도로 향했다. 한국전쟁 전국유족회 상임대표인 김광호씨와 함께 국회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


국회로 들어가는 출입문에서 처음 눈에 띈 것은 ‘석궁사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주머니였다. 이 사건의 황당함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 참에 간단한 인터뷰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무산됐다.

 

 

아주머니께 피해자와 어떤 관계냐고 묻자 ‘사법피해자’라는 말만 강조하며 흥분하는 통에 대화가 되지 않았다. 국회로 들어가는 몇몇 사람이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했지만 오랜 기간 서 있었던 짜증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접근한 사람들이 악의적인 기사를 썼기 때문인지 경계가 심해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과거사 문제 때문에 취재를 왔다고 하자

 

‘지금 그런 지나간 과거 일이 문제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하지!’

 

라며 고함을 친 것이 너무 가슴아팠다. 조용히 명함을 드리고 출입문을 지나왔다.

 

 

4.

 

2시 42분. 행사가 시작되기 18분 전, 아주머니 한 분이 행사장으로 난입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김대중, 노무현 같은 이 빨갱이 같은 족속들!! 밥 먹는 것도 아까운 놈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빨갱이들!! 나라 경제 다 망친 놈들!!!‘

 

 

 

 

 

 

<경비원에 의해 복도로 나갔을 때, 녹취한 것이다.

행사장 안에서는 이보다 더 언성을 높여 거칠게 말했다.

플레이를 누르고 조금만 기다리면 음성이 나온다.> 


 

근래에 취재를 하며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이 연출된 순간이었다. 행사장에 온 분들은 50대가 젊은 축에 들어갈 정도로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한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국가 권력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당한 사람, 미군에 의해 어머니를 잃은 사람, 대한민국 헌병에 의해 눈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본 사람 등.

 

이 중에는 십 수 년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눈을 감기 전, 생의 마지막에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민간인 학살 희생사건의 유족들은 취재를 가도 두려움 때문에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유에 관해선 일전에 썼던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기사 중 일부분을 인용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 중 단 한명의 연결고리만 끊어졌어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이 이 정도까지 덮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은 4.19 혁명이 일어나고서야 그 원통함을 호소했지만 하필이면 그 다음 등장한 이가 박정희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눈물과 한으로 지새우다 겨우 용기를 낸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국가의 사죄가 아니라 반복된 고문과 빨갱이 누명씌우기였다. 박정희가 죽자 그들은 18년만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지만 하늘이 무심한지 그 다음 등장한 이가 바로 전두환이다. 

 

그들은 고문과 누명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갔고 학살을 증언해 줄 많은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다. 당시 어머니를 관통한 총알을 맞은 탓에 겨우 목숨을 건진 갓난아기마저도 이제는 환갑을 넘은 나이다.  

 

희생자의 유족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심지이름도 짓지못한 젖먹이마저 살해 되었음에도 인터뷰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야 말로..."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간 다음 정권에 또 누가 들어서서 그들을 잡아가 고문을 할지 모를 공포가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인간은 두려움으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몇 십년을 반복해가며 당하자 그들은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평생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 속에 묻고 가슴만 치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가족이 영문도 모른 채 살해당했다는, 그것도 국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정신적 충격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이다. 그러한 고통은 인간의 영혼을 좀먹는다. 본지의 필진이기도 한 SBS PD 산하(김형민)님이 일전에 쓴 기사에서 그러한 충격이 인간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엿볼 수 있다.

 

http://www.ddanzi.com/news/10105.html (더 이상 기구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못 건네 줄망정, 빨갱이라고 고함치며 욕을 하다니.

 

억울한 죽음에 ‘좌’가 어디 있으며 ‘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이, 그리고 자기 가족이 살해 당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왜 욕을 들어야 하는가.

 

60년 동안 한시도 잊지 않은 가족의 죽음을 호소하는 것마저 빨갱이 짓이라며 욕지거리를 들어야 한다면, 평생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그 ‘빨갱이’라는 허무맹랑한 낙인을 또 찍으려 든다면 이 분들은 가슴이 아파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트위터 : kimchangkyu

 

2편에 계속

 

 

 

<2편에 등장할 사람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강창일 의원, 천정배 의원, 김광호 한국전쟁 전국유족회 상임대표>

편집국정치부국회담당 죽지않는돌고래 (tokyo1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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