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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출동] 국가범죄(1) - 10살 아이 앞에서 아버지를 총살한 대한민국


2010. 12. 06. 월요일

죽지 않는 돌고래

 

   

1.

 

2005년 12월 1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다. 인권유린과 의문사, 그리고 학살의 은폐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국가 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가 출범한 것이다. 한시조직이긴 하지만 입법, 사법, 행정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0년 12월 1일, 한국전쟁전후에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유족들에게 평생 쌓아온 한의 작은 귀퉁이나마 녹여줄지 모를 소식이 들려온다. 정부주도로는 최초로 전국 규모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추모제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참고로 이들의 억울함과 한에 대해서는 본 기자가 지금까지 써왔던 기사를 참고하길 바란다.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 (1)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 (2)

     전쟁의 뒤편(1) - 아군을 죽인 아군

     전쟁의 뒤편(2) - 그런 것도 못하는 국가가 무슨 놈의 국가입니까

     전쟁의 뒤편(3) - 100만 학살을 기억하라

 

최소 113만(4.19혁명 후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가 정부에 보고한 시,도별 민간인 학살규모)에 이르는 학살을 기득권층은 반세기 이상 쉬쉬하며 살았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을 몰랐다면 그것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 사회의 기득권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며 아직도 그들이 사회를 얼마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한국에서 대량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역사에 대해 한 번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살의 주범이자 국민이 끌어내린 이승만을 다시금 칭송하고 떠받드려 하는 것이다. 기득권층이 그러한 일들에 대해 국민이 아무런 거부감이나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토록 슬픈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이 땅에서 일어난 대량학살에 대해 친일, 친미, 반공으로 연명해 온 기득권은 진실을 은폐, 축소시키기에 바빴다. 교과서를 검열해 역사를 바로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독재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하자.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그 가족마저도 빨갱이로 낙인찍고 평생을 변변찮은 일자리 하나 못 구하게 연좌제의 굴레를 씌운 죄, 그리고 죽음과도 같은 가난을 대물림 시키며 그 한과 눈물을 자식에게 조차 터놓지 못하게 괴롭힌 죄는 도대체 무엇으로 씻을 것인가.

 


유족들이 평생을 쌓아온 한은 미천한 내 글재주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런 와중에 국가 주도로는 최초로 전국규모의 합동추모제를 열어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한다고 한다.

 

이 사회의 지도부나 지식인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조차 ‘보도연맹사건’등의 학살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이가 태반인 지금, 정부의 수장이 나서서 지난 날,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이는 올바른 역사 인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며 이 땅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에게 잘못을 책임지는 모습과 국가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6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마땅히 칭찬받을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약속한 이 모든 일들이 전국 합동위령제가 치러지기로 한 12월 1일을 불과 며칠 남겨두지 않고 삐걱대기 시작했다.

 

 

2.

 

전국전쟁유족회 상임대표인 김광호씨가 11시에 서울역에 도착했고 그와 함께 충무로에 있는 유족회 사무실로 함께 이동했다.

 

 

11시 26분, 행사를 2시간 30여분 앞두고 상임대표들이 충무로에 있는 서울캐피탈빌딩 2층 사무실로 모였다. 정부주도로는 최초로 전국적 규모의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그들이 지금껏 해온 노력과 고통의 일부분이나마 결실을 맺는 행사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 주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시종일관 침울하고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유는 ‘정부의 배신’이다. 정부로부터 전국규모의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추모제가 열린다고 했을 때, 유족들은 행사의 성격과 규모를 고려해 '서울광장'에서 행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스케이트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한국의 집’을 요구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제시한 대안은 백범 기념관인데 이곳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1000명 이상의 유족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없다. 백범기념관은 그 성격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장소의 크기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안이었다.

 


유족측은 제대로 된 사과라도 받길 원했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주 4.3 및 울산보도연맹 위령제’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 수준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당한 고통을 생각했을 때, 정부를 대표하는 이가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예를 다해 진심어린 사죄를 했고 유족들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현 청와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과를 하는 이는 총리로 격하되었다. 소식을 들은 집행부는 과연 이들이 진정으로 사과를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추모제를 여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짜 분노가 터진 건 다음이었다.

 

행사를 며칠 남겨두지 않고 김황식 총리가 급한 일이 생겨 행정안전부 장관이 대신 나온다는 것이다. 사연을 알아보니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 출국해야 되기 때문이란다. 공식적인 총리의 일정이 그렇게 갑자기 바뀔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라도 60년을 피눈물로 기다린 유족들에 대한 예의라고는 쉬이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다.  

 

독일 총리가 급한 일이 생겼다고 유태인 학살 추모 행사에 빠진다면, 과연 제대로 사죄를 하려는 의지로 볼 수 있을까. 일본 총리가 과거 한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사죄한다고 해놓고 올림픽 유치를 위해 행사에 빠진다면 우리는 이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대통령에서 총리, 총리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사과를 하는 주최의 격은 계속 낮아졌고 정부는 유족들이 제시한 장소에 대해 모두 불가판정을 내렸다. 

 

집행부는 분노를 참아내고 행사 당일 전까지 최대한 정부와 조율하려고 노력했다. 고유문(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까닭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글)과 추모시가 과격하다고 수정요청을 했을 때, 60년간의 한을 억누르고 그 제안을 수용했다. 죽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 사실임에도 이를 몽둥이로 때렸다고 순화했다. 하지만 행사 하루 전, 그들은 결국 고유문과 추모시를 빼버렸다.

 

그때서야 집행부는 정부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들은 진정한 사과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2010년 12월 31일에 끝나는 진화위의 활동을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하고 자신들에게 귀찮고 껄끄러운 소리를 잠재우고자 겉치레식 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독일이 유태인들에게 진정한 사죄를 한다고 해 놓고선 유태인들의 추모시에 가스로 사람들을 학살한 행위는 너무 과격하니 빼라고 한다면, 그리고 겨우 수정해서 고친 추모시마저도 일방적으로 빼버린다면 유태인들은 이를 무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일본이 진정한 사죄를 한다고 해 놓고 조선인들의 목을 칼로 치고 강간을 한 행위들이 너무 과격하게 보이니 삭제해 달라고 한다면 한국인들은 이를 너그럽게 수용해야 정상인 걸까.

 

 

<정부 측에서 거절당한 고유문>

  

행사 하루 전날, 게다가 밤까지만 해도 정부를 믿었던 집행부는 완벽하게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진심어린 사죄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없는 정부의 행사를 거절하고 야외에서 유족들끼리 진짜 위령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였다. 

 

첫째,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1000명의 유족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려면 올라오는 버스마다 전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버스에는 정부 측 인사가 한명씩 타고 있으므로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경찰이 미리 병력을 배치해 유족들의 추모제를 사전에 막아 버릴지 모른다. 

 

둘째, 유족들은 대부분 고령인데다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 이 추운 겨울, 밖에서 몇시간을 함께 해달라고 한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결국 상임대표들과 비상대책위원회는 버스에서 내리는 유족들에게 정부의 행사를 보이콧트하는 취지를 적은 인쇄물을 돌리기로 결정하고 고령이나 몸이 성치 않은 분은 정부가 주최하는 따뜻한 건물 내로 안내하기로 했다. 

 

 

3.

  

 

12시 58분, 상임대표들과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백범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전국 각지에서 유족들을 태우고 온 버스가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한다.

 


백념기념관 컨벤션 홀로 이어지는 계단 사이의 공터에는 일찍이 한국전쟁유족회 비상대책위원회가 도착하여 추모제를 준비 중이다.

 

날씨가 차다.  

 

 

<경찰들에게 유족들의 한과 정부측 행사의 비합리성을 설명하고 있는

 충북 보은 유족회 회장 박용현>

 

경찰들은 왜 정부측에서 행사를 준비했는데 밖에서 따로 추모제를 준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설명을 요구했다. 이에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충북 보은 유족회 박용현 회장이 차근차근 유족의 입장을 전한다.

 

그의 아버지인 고 박원근씨는 1930년대 '삼인회'와 '신인구락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이승만 정권은 그를 보도연맹사건으로  몰아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했다. 박용현 회장은 독립운동가인 부친의 죽음 하나로도 벅찬데 아무 죄도 없는 어머니를 이유 없이 목총으로 때리는 경찰을 보며 한의 세월을 살아왔다고 한다.  

 



1시 20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유족들이 건물 안에서 하는 정부측의 추모제 외에 밖에서 따로 준비하고 있는 추모제를 보며 의아해 한다. 그간의 사정을 사회자를 통해 듣고는 여기 저기서 탄식을 내뱉는다.

 

 

'이 놈들.... 이 놈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또...'

 

 

맨 위쪽 사진에 마이크를 든 이는 대구10월항쟁유족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성번씨다. 그의 조부는 좌익폭동이라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학살당했으며 부친은 그런 조부의 명예회복을 도모하다가 5.16쿠데타 직후에 체포되어 5년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시종일관 안타까운 눈빛으로 추모제 준비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띄어 사진으로 찍어 둔 할머니다. 집행부에 혹시 이 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창녕유족회 회원인 전정수씨로 별명은 욕쟁이 할머니라고 한다.

 

이 분에게 잘못한 일이 걸리면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개새끼'와 '씨발놈'이 된다고 한다. 대한민국 시위 현장을 돌아다니며 불쌍한 유족들과 시민단체를 돕는데 자신은 걸어 오는 한이 있어도 사비를 털어 힘든 사람을 돕는 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보도연맹으로 억울하게 아버지가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청기간을 놓쳐 아직까지도 진실규명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위는 유족들이 정부의 행사를 보이콧트하며 급하게 준비한 제사상이고 아래는 정부가 준비한 제사상이다.

 

유족들은 고유문과 추모시 낭독을 위해 기념관 측에 콘센트를 꽂아도 되겠냐고 물었지만 거절당했다. 유족들이 준비한 스피커는 자동차 밧데리를 떼어 겨우 연결했다.

 

이토록 밖의 상황은 열악하다.

 

 

 

건물 안에는 이명박 대통령 대신 그가 보낸 조화만이 덩그러니 서있고  건물 밖의 유족들은 '대통령은 사과하라'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있다.

 

안과 밖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바람이 매섭다. 젊은 기자들도 추워서 손을 비벼 대는데 백발의 노인들이 자처해서 현수막을 들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품고 평생을 산 사람들이다.  

 


1시 58분, 추모제 시작 직전이다.

 

 

조국이 학살한 이들의 자손들. 같은 사람일진데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한 사람들. 평생 한을 품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 

 

60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오늘도 조국에 배신당해 추운 겨울, 여기에 섰다.



한국전쟁유족회 정석희 감사의 경과보고가 끝나고 추도묵념이 이어진다.  

 

 

2:16분, 고유제가 시작된다. 학살당한 이들의 자손들은 제사상이 너무 초라하여 죄송하다고 연신 되뇌인다.

 


이어서 김광호 상임대표의 고유문이 이어진다. 정부에서 과격하다고 거절당한 고유문은 유족들에게 울분을 토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아부지...

 

 

아부지...

 

 

우리 아부지를 돌려 주세요...

 

 


 

내가 봤다고.

내 눈 앞에서 우리 아부지를 총으로 쏘는 거 나는 봤다고...

 

  
사진으로는 그들의 한을 제대로 전할 수 없을 거 같아 급하게 동영상을 찍었다. 

 


울고 있는 두 사람은 모두 보도연맹사건에 의해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었다. '우리 아부지를 돌려 주세요'라고 외치는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얼마되지 않는 1950년 음력 6월 29일, 농사일을 마치고 점심식사 중에 경찰로 보이는 자들에게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에게는 노모와 만삭이 된 아내가 있었으며 뱃속에 있던 아이가 지금 울고 있는 바로 그녀다.

 

대부분의 보도연맹 사건이 이와 같다. 이승만 정권은 좌익세력을 색출하라고 하부에 지시했고 군, 경찰, 면장, 읍장등은 정부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농민들에게 싸인을 하라고 강요했다. 쌀이나 보리를 조금씩 주고 꼬시기도 했다.

 

보도연맹은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싸인을 한다는 행위는 스스로 좌익사상에 물든 지난 날을 반성할테니 정부에서 잘 지도해 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목적에 쓰였고 농민들은 영문도 모른체 전쟁이 발발하자 무차별 학살당했다. 이들이 북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심'이 이유의 전부였다. 

 

당시 학살을 명령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을 속이고 서울을 버린채 도망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솜틀기계를 제일 먼저 개발할 정도로 유능한 기술자였다고 한다. 어느날, 공장장과 아버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밖에서 총소리가 났고 곧이어 누군가가 아버지를 마당으로 끌고 가더니 그대로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녀는 눈 앞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두눈으로 지켜봐야 했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총을 쏜 이는 경찰이었다고 한다.   

  


 전국유족회 오원록 상임의장이 유족들의 아픔을 달랜다.

 

'빨갱이 자식이라고 누명을 씌우고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 때 재판을 걸어야 했다니 이게 말 같잖은 소리입니까? 이 사건에 대해 입만 뻥긋하면 다 잡아 가두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대에 못하면 대물림을 해서라도 해결해야하는 것이 역사의 당위성이자 필연성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데 죽여 놓고 60년이 지났으니 이제 묻어 놓자고 합니다. 부모 없이 자란 설움을 압니까. 차별받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살해당했다면 그냥 묻어 놓고 가겠습니까.'

 

오원록 상임의장은 얼마 전, 다리 때문에 40여일간을 입원했고 아직도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그를 포함해 전국유족회 상임대표 그 누구도 정부가 마련한 맨 앞줄의 편안한 자리를 거절하고 이곳을 택했다.

 

그들 모두 같은 한을 품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죽임당한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대전 산내 유족회 전숙자 시인이 정부에서 거절 당한 추모시를 읊는다. 그녀는 보도연맹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으며 아직 진실규명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추모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화가 옆에 앉아 있는 그녀는 대구 10월 항쟁 유족회 회장 채영희다. 그녀의 부친은 10월 항쟁에 가담했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소식이 끊겼다. 

 


그림을 그리는 이는 10월 항쟁 유족회 부회장인 화가 이향씨다. 앞선 동영상에서 울고 있는 유족에게 조용히 다가가 안아주던 바로 그 사람.

 

그녀의 조부인 이병옥씨는 해방 이후에 전국노동조합평의회에서 활동했고 운수노동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대구에서 10월항쟁이 일어날 당시 미군정과 맞서다 목숨을 잃었다. 어릴 적부터 빨갱이 핏줄이라는 모함으로 많은 핍박을 받았다.

 


추모제를 마무리하며 김광호 상임대표가 정부가 나누어준 수건을 불태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족들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모인 것은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와 정부가 이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 온 건 선물로 가져 가라고 준 '수건 쪼가리 한장'. 김광호 상임대표는 이를 60년간 참아 온 유족을 두번 죽이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날의 추모제는 그렇게 끝났다.

 

 

4.

 

유족측에 의하면 이영조 위원장(이명박 정권에서 임명)이 이끄는 진화위는 미국에서 10여명만 참석한 자리에서 수천만원의 혈세를 들여 심포지엄을 열었고 거기에서 제주 4.3을 폭동으로, 광주 5.18을 민중반란이라고 표현하는 발표를 했다고 한다.

 

전 위원장인 안병욱은 유족들과 자주 만나고 의견을 적극 수렴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영조 위원장은 한사코 유족들과의 대화를 거부하며 독단으로 행정을 처리하고 있다.

 

진화위 내에서도 이명박 정권에서 바뀐 이영조 위원장의 만행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스스로 돈을 거둬 진짜 진실을 규명하는 백서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한푼이라도 유족들의 도움을 받으면 자신들의 정당성과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기에 작은 도움조차 정중히 사절하고 있다고 한다.

 


2010년 12월 1일, 수백명의 노인들이 추운 겨울 밖에서 떨며 눈물을 훔쳤다. 나는 이 기사를 보는 시민들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정치인을 뽑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행사에 참석한 정치인을 모조리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참석했다.)특히 로스쿨에 다니는 학생과 언론계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당신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이 규명되지 않는다면 관련된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알리는 방송을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현직 변호사, 판사, 검사등 법조계에 종사하는 이들도 이러한 국가범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양심적인 법조계 인사들이 많다고 믿고 있으며 얼마전, 내 눈으로 국가 범죄에 대해 윗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린 판사를 보았다.

 

감독, 배우, 탤런트등에 종사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당신들이 말해 주어야 한다. 당신들이 도와주면 울림이 크다. 당신들이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나 도울 것이다.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들과 만나고 싶다면 그런 자리를 주선할 것이고 필요한 자료가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언제든 제공할 것이다.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국가범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이 기록을 계속해서 남길 예정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다만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이 눈물들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홈페이지

 

http://www.coreawar.or.kr/

 

여러분이 게시판에 남기는 관심 하나가

유족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서슬퍼런 독재에 당당히 맞서며

민간인 학살 사건을 포함,

시대의 어떤 아픔도 외면하지 않았던

고 리영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트위터 : kimchangkyu

기획취재부1팀장 죽지않는돌고래 (tokyo1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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