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가 놀러 왔다. 거실을 쭈욱 보더니

"1년 반동안 우리 집에서 살면서 가장 더러울 때도 이거보단 깨끗하다."

"이 정도면 깨끗한 건데"

사진을 찍어서 증명하고 싶지만 크게 어지러운 편은 아니다.

"이럴 수는 없지."

이.럴.수.는.없.지. 좋은 대사다. 상대방의 철학 근간을 흔드는 단호함이 팩트와는 별개로 마음에 들었다. 

"보통의 인간은 이 상태로 사람을 부르지 않아. 난 적응됐으니까 괜찮은 거고. 대충 뭉텅이로 20가지는 지적할 수 있다. 세세한 건 100가지 지적할 수 있다."

그러면서, 식탁 위의 주거 물건은 없애야 한다, 바지는 여기 있는 걸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저 앞의 짐은 치워야 한다고 생각해, 이건 제자리에 있음, 등 지적질이 시작되었다. 싱크대 위의 물건은 인정해 주었다. 20가지를 지적할 줄 몰랐는데 정말로 20가지를 지적하는 것도 훌륭했다.

책장을 한참 보더니

"으음. 이왕이면 책이 좀 서 있으면 어떨까 싶어"

라 말했다.

역시 좋은 대사다. 1국은 단호함으로 치더니 2국은 비껴 쳤다. 상대방의 체면을 세우고 동의를 구한다......라고 보통 생각하겠지만 1국 뒤에 오는 연타라는 점, 그러니까, 마치 제의하는 듯하지만 아래에서 위로 상대방을 내려다보며 스타일의 근간을 흔드는 절륜한 연타.

 

앞에서 "이럴 수는 없지", 를 복싱에 비유하자면 턱을 쳐 뇌를 흔든 것, "으음", 은 연달아 오는 잽, "이왕이면"은 가벼운 왼손 스트레이트, "어떨까 싶어", 는 갑자기 들어오는 따가운 플리커 잽이다.

이 친구는 츳코미의 재능이 있다. 대부분 귓등으로 다 흘려버렸지만 지적질의 스타일이 괜찮다.

2.
머리 지적질도 했다. 언제나 부스스한 자다 깬 머리라고 평했는데 살면서 본 내 머리 중에 가장 괜찮다고 이어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야 인간의 머리 같다" 고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친구의 말이지만 그래도 칭찬이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3.
친구가 샤워를 하는 중이라 몰래 적고 있는데 이제 옆방으로 자러 갔다. 보편적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 볼까 한다. 자기 전에 이렇게 생각하는 과정이 좋다...... 는 아니고 주말이니까 이런 잡담도 괜찮지 않을까. 

4.
대개의 남자들이 그렇듯, 평소에는 사회생활이랄까, 주위의 시선이 있기에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다짜고짜 때리고 도망가거나 서로의 약점을 건드리며 장난을 치는 법이다. 가족 중 한 명이 개망나니면 그걸 가지고 집요하게 놀리듯 말이다. 어릴 때부터 많은 일을 공유하고 함께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랄까.

 

친구란 이렇게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판다.

5.
친구들 대부분은 의리도 없고 인간성도 나쁘다. 무엇보다 기본이 덜 되었다. 안재우 같다고 할까, 장원준 같다고 할까. 뜬금없이 이름을 등장시켜 미안하지만 그냥 예를 든 것이니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학창 시절이나 군대에서 만난 친구들은 정신적으로 문제도 많고 평행우주에서조차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인 경우가 보통이다. 인간은 계산을 하고 만나야 하는 것인데 철이 늦게 들어 포기했다.

GDP에 도움도 안 되고 우주의 기운도 못 모으는 녀석들이라 밖에서 만나면 부끄러워 모르는 척하고 싶을 때가 많다. 누가 보지 않고 있거나 사법체계가 허술하면 어디 묻어버리고 도망가고 싶다. 


다만 이들이 내게 묘한 매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결혼을 한다고 예비 배우자를 데려왔는데, 걔가 나의 친구라면, 나의 피와 뼈와 살과 딱히 필요 없는 몇몇 필진이나 여하튼 그런 거라도 바쳐 막을 테지만, 다행히 여동생도 없고 누나도 없으니 어쨌든 친구 정도로는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이리저리 잡생각을 해보는 새벽이다.

이 나이쯤 되면 이런 쓸모없는 친구들도 다 보듬고 짊어지고 가게 마련이다. 


과연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2016. 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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