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두가 그렇듯 나에게도 오랜 친구가 몇 있다. 그중 재우(가명)와 원준이(가명)는 일찍 인생을 포기했다. 이점이 흥미로워 친해진 계기가 되었다.

오늘은 그중 한 명인 안재우(가명이라고 적었지만 사실은 실명인데 딱히 상관없을 것 같다)의 이야기다. 

2.

재우와는 한 동네에서 자라 초중고를 같이 나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제멋대로 학교를 안 나와 '재우 전담조'란 게 만들어졌다. ‘재우 전담조’는 담임의 명으로 조직되었으며 재우를 수색해 포획하는 사명이 있다.

조장 격인 나는 늘 S랭크로 임무를 완료했다. 재우는 대부분 집에 처박혀 재믹스를 하거나 오락실에 있었다. 

 

재믹스는 이렇게 생긴 게임기입니다. 고전미가 있지요.

동네 형들과 오락실에서 격투 게임을 할 때의 일이다. 요즘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당시는 동네 형들에게 2판을 연속해 이기면 건너편에서 의자를 밟고 올라와 기계 너머로 얼굴을 쑤욱 올리며 굉장한 기세로 노려보던 시절이다.  

2판을 더 이기면 의자를 박차는 소리가 들린다. 성질이 제법 급한 사람은 기계를 넘어오기도 한다. 재우는 어느 쪽이냐면 룰루랄라, 하면서 계속 이기는 타입이다. 의자를 박차는 소리가 들릴 때서야 뛰어 도망가곤 했다. 게임 승부욕에 관해서만큼은 확실히 변태적인 구석이 있다.  

돌이켜 보면 승부욕 이전에 초등학생이 ‘일단 오락실로 출근하고 학교는 가고 싶을 때만 간다’는 발상 자체가 더 대단하지만. 

3.

재우는 중학생 때도 자유롭게 학교를 왕래했다. 집에 슈퍼 패미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슈퍼 패미컴은 이렇게 생긴 게임기입니다. 르네상스가 태동하는 느낌이랄까.

여느 때처럼 재우를 잡으러 갔는데(중학교 때도 ‘재우 전담조’는 존재했습니다. 그간의 이력을 인정받아 중학교 때도 포획 임무를 맡았습니다) 탐문 수사 끝에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재우를 찾아냈다.

왜 탐문 수사 끝이냐면, 그의 출몰 장소를 이 잡듯 뒤졌으나 실패, 어쩌면 제일 처음 간 장소인 집에 매복해있지 않을까 돌아갔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에 거울을 붙여 쇠창살 창문 안쪽을 살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게임하는 재우를 발견했다(집이 1층입니다). 문을 안 열어주어 창문을 떼 버리려 했는데 다행히 열어주었다.

지난한 회유에도 재우는 신념만큼은 관철시키는 사내였다. 묵묵히 게임을 계속 하기에 같이 하는 도중(어디까지나 심리적 친밀감을 유지하다 포획 기회를 노리는 작전의 일환입니다), 전화가 온다. 재우는 전화를 받고 한참 말없이 듣고 있더니 ‘으으으으으으’ 하고 끊어버린다. 

‘누군데?’

‘아…. 담임’ 

학교를 안 가고 집에서 게임만 할 정도의 각오라면 선생님의 전화는 받지 않는 편이 좋다. 10대 맞을 걸 100대 맞기 때문이다. 이후의 이야기지만 재우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한 번도 쉬지 않고(정말로), 엉덩이 100대를 맞아 전설이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나는 공부나 운동에 탁월한 이들보다 그런 친구에게 감탄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그 날을 기록하는 의미로 MD 헌정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고등학생은 이런 의미없는 짓도 하는 법입니다.

4.

고등학생 때다. 재우는 혼자 대학생이었다. 아니, 대학원생쯤 되는 느낌이려나. 자유롭게 등하교를 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맞는다. 다만 그림을 그리는 실력만큼은 톱클래스였고 지금도 그런 재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고 3 때 같은 반, 게다가 짝꿍이 된다. 기가스라는 만화 잡지가 창간되던 해다. 재우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스토리를 써 만화작가로 데뷔하는 것이 당시의 꿈이었는데 기가스라는 잡지의 창간 이벤트에 이런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써, 1등 상품인 플스 2를 받게 된다(상품이 플스 2라면 누구나 구구절절해지기 마련입니다). 

플스 2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때, 19년 전 가격으로 약 70만 원이다.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이 어찌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이걸 따내다니! 부산 구서동의 어느 거리, 잡지 명단에 이름을 확인하고는 한 손을 위로 치켜들고 하늘을 쳐다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다, 이루었도다.  

재우에게 1등 한 사실을 전하고, 우리 꿈을 적어 받은 상이니 먼저 즐기라 했다. 사양할 재우가 아니다. 플레이스테이션 2는 콘솔계의 전설이고 그 전설은 등장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니까. 

한 달이 지났을까, 나 또한 전설에 빠져들고 싶은 기분에 가득해져 재우에게 전화했다.

 … … 

받지 않는다. 

5.

첫날은 그런가 보다 했지만 둘째 날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셋째 날에 받은 것도 아니다. 넷째 날에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1주일 뒤에도 받지 않았고 10일 뒤에도 받지 않았으며 2주일 뒤에도 받지 않는다. 3주째라고 달라지진 않았다.

잊었을까 봐 다시 말하자면 재우와 나는 한 동네에서 자라 초중고를 같이 나왔다.

6.

대학교 1학년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마침내 재우가 전화를 받는다. 매일, 빠짐없이 전화했더랬다(‘재우 전담조’의 초대 조장은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재우는 한참 말이 없다가 ‘팔아무따’라는 네 음절을 발음한다. 아, 언어를 잊은 것은 아니구나. 왜 팔아먹었냐 하니 어머니 세탁기를 바꾸어주었다 한다.

나는 사람을 제법 신뢰하는 타입이다. 재우는 어려서부터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라면을 끓여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 우리 세계의 룰이다.

어머니는 재우의 유일한 ‘정상적 친구’라 생각한 나에게(사실이기도 합니다만) 잘해주신 기억이 많다. 이후, 그 일에 대해선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재우가 뜬금없이 웃으며 한 말만큼은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사실 그때 플스 2 세탁기 산 거 아이고 그냥 팔아무따. 맛난 거 사무따’

일반적인 경우, 살인을 해도 정상참작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7.

곧 태어날 하루를 생각하다 친구를 사귀는 방법만큼은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좋은 친구가 많았다.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에 끌리는 모양인지, 인간의 기괴함이나 묘함에 끌리는 모양인지, 어느새 엉망진창인 친구들만 남아버렸다. 이미 그렇게 살아온 이상,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하루에게, 적어도 아빠의 친구들만큼은 보여주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한다.

......

그러고 보니 엄마 친구들도 딱히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으음. 

 

 

추신: 재우의 얼굴을 공개할 순 없어 비슷한 걸로 골라 봤습니다. 

참고로 사진은 마카크 원숭이로 인간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영장류입니다. 우주비행사 후보로 훈련까지 받은 적이 있지요. 뭐, 딱히 주제와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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