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경주서 100명 넘게 죽인 이협우,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떵떵’

학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죽인 사람은 밝혀진 것만 100명이 훌쩍 넘는다. 그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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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를 보니 하루 할아버지가 최근, 바쁜 것으로 보인다. 가끔씩 기사로 ‘아부지가 오늘은 저기 가셨군’ 하고 근황을 접한다.

중앙정보부의 고문 이야기는 나도 제법 들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2.
고문이 잠시 끊긴 시간, 사근사근하게 '배고프지요? 뭐 먹고 싶으세요?' 라 물어본다. 할아버지는 짬뽕이라 말한다. 곧이어 중국집에서 음식이 배달되고 고문하던 방에서 수사관과 함께 밥 먹는다.

식사가 끝나고 수사관은 담배를 맛있게 피운다. 상냥한 말투로 이제 인정하는 게 어떻겠냐 말한다. 할아버지는 사실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 한다.

아, 그래?

상냥한 얼굴은 사라지고 할아버지가 먹고 남긴 짱뽕국물을 주전자에 담는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차례 차례 넣는다.

상대방이 남긴 짜장, 식초, 춘장, 양파, 단무지, 고춧가루, 재떨이의 가래침과 담배꽁초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피던 담배를 넣는다.

눈 앞에서, 말 없이, 천천히, 차근차근, 주전자에 넣는다.

그것은 곧 할아버지의 코와 눈과 입에 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3.
어린 날을 돌이켜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서로 이견이 많았다. 그러면서 친했다.

한 때 같이 도망다니면서 쌓은 묘한 동지애는 조금은 특이한 부자지간을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나로선 그 기분을 다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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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전국유족회 비상대책위원장(66·사진)의 아버지인 고 김영욱 선생은 당시 전국유족회의 총무 간사로 활동하다가 39세에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김정태다. 그는 1950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세탁·염색업을 하며 재산을 모은 아버지가 4·19혁명 이후 사비를 털어 학살당한 할아버지의 시신과 유골 272구를 발굴하고 위령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당시 9세였던 김 위원장도 상주 역할을 맡았다.

5·16 쿠데타 이후 김 위원장의 아버지는 1961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당했다. “김 선생, 그냥 (김일성) 만났다고 하고 도장 찍으면 풀어줄게.” 수사관들은 수감 생활로 굶주린 김 위원장의 아버지에게 짬뽕을 사주며 설득했다. 도장을 찍는 순간 사형당할 거라고 생각해 거부했다. 고문이 뒤따랐다. 거꾸로 매단 후 짬뽕 국물에 고춧가루와 식초, 각종 오물을 넣은 뒤 얼굴에 부었다.

의자에 묶어놓은 채 M1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발가락을 ‘탁탁’, 내려찍었다. 세번째로 발가락을 내려찍을 때 기절했다. 가장 약한 것이 전기고문이었다. “빨갱이를 장례 지냈기 때문에 너도 빨갱이다.” 혁명재판소는 김 위원장의 아버지를 다그쳤다. “해골에 빨갱이라고 써있기라도 합니까. 사람 도리로 죽은 사람 장례 지내는 게 죄입니까”라고 따져 물어도 소용없었다.

핍박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계속됐다. 어선이 납북되거나 북한에서 총이라도 쏘는 일이 생기면 김 위원장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낯선 장소에 버려졌다.

그가 고문당한 사실을 김 위원장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처음 알린 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고 나서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그 모든 게 민간인 학살을 알리려고 유족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은 “6·25전쟁으로 숨진 군인들의 유해 발굴은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반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유해 발굴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족회는 전국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이 10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면서 “여야는 물론 대통령 역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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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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