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으로 건너오기 전
나는 1년동안 같은 반이었던 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나를 꽤 좋아해줬고
그래서 종종 도시락을 들고 내 자리로 왔다.
게다가 고맙게도 나를 많이 챙겨 주었다.
하지만

-
나는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반갑게 내 어깨를 치며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그 친구는 더듬거리는 나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내 곁을 지나갔다.




나에게 완전히 실망하고는
같이 지내온 시간이 싸그리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저런 녀석에게 그렇게 잘해줬을까- 하고.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변명이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사람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건 그렇다 치자.
얼굴을 기억못하는 것이 평균치를 넘어서는 편이다.




나에겐 한 친구가 있었다.
아주 오랜기간 같은 방을 쓴-
게다가 마음을 나눴다고 할 만큼
진지하게 서로의 속 마음을 보여줬던 친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3개월이 넘어갈 때쯤이야 그 친구에게 쌍꺼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것도 뻔뻔하게 당사자에게 물어 알게 된 것이다.
항상 얼굴을 맞대고 눈을 보며 얘기를 했음에도 말이다-
그런 것조차 기억못하는 나를 그는 도대체 어떻게 봤을까.
그리고 그런 점은 때때로 나조차 나를 싫어하게 만든다.




나는 생각했다.
같은 방을 쓰게 되었고 오랜기간 같이 지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믿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나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인간적으로도 믿을 만한 녀석이며
그만큼 내게 조건없이 잘해 주었던 녀석은 없었기에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왜 얼굴 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던 것일까-
사실은 내가 그를 그렇게 마음에 두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그럼 왜-?




이것은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말로 좋지 않다.
기본 예의가 안되어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이런 나의 결점은
나의 생각에서 나왔다고 마무리 지었다.
나는 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아무리 바보라도 1000번 정도 들으면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않는다.
(아주 이기적인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래서 내가 길치일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진짜 마음 깊은 곳 한구석에선
'길을 찾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럴것이다.
100%확실하진 않지만 거의 그렇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 만큼은
그 사람이 내게 남긴 느낌만큼은
그게 누구든 간에 정말로 확실히 기억하는 편이다.
(이런 류의 것을 '기억한다'라는 표현을 쓴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은 몰라도
그 사람의 이름은 몰라도
그 사람이 내게 남긴 느낌, 그 사람이 내게 준 마음만큼은
천재적이다 싶을 정도(자신에게 이런 말을 쓰는 게 웃기긴 하다)로 싸그리 기억한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분야의 기억에 관한
내 뇌세포 만큼은
단한번 책을 읽고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다.

(역시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면 웃기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의 세세한 가지까지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더욱더 완벽해지기 위해 적고 또 적는다.
완벽에 가까운 기억에 끝없이 되새기는 기록.






잊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것 만큼은.
어떤 한 사람의 느낌만큼은.
어떤 한 사람이 내게 준 마음만큼은.
어떤 한 사람이 내게 해준 일 만큼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
정말 웃긴 일이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나도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미친듯이 기록하는지 모른다.
이제 부터는
그 누구라도
이름도
얼굴도
느낌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 보면 과거의 반성인 셈.
적어도
더 이상 그런식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피하자.
-라고 생각하니까.




아직도 잘 안되긴 한다.
역시나 마음 깊은 곳 한구석으로는
'이름도 얼굴도 중요하지 않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이기적이다- 나한테는 소중하지 않지만 그것은
타인에겐 소중하다.)

 








by 죽지 않는 돌고래 / 0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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