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할 와카문학의 흐름을 각종 전문서적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작품 중심으로 정리 했습니다. 물론 시대 순입니다만.)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으니 소설 읽듯이 쭈욱- 몇번 읽으시면
배경지식과 함께 기본 토대가 잡히실 듯합니다.(대학 전공시험에서 서술형 답안 작성을 위해 많이 찾아 오실 듯!) 

만요슈,운문문학등 이 분야에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구정호(현 중앙대 교수)님의 저서를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운율을 살린 시가번역이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인 견해론 이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Ⅰ. 들어가기에 앞서 - 와카란 무엇인가?


 일본인은 원래 문자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인이 처음 만나게 되는 문자는 한자였다. 그러나 일본에 한자가 전래되고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다. 운문문학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문자에 의한 창작활동의 결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와카(和歌)다.상대문학에서 와카라고 하면 '만요슈(万葉集)'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처음이다.'만요슈'는 현재 전하는 와카집(和歌集)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수록되어 있는 노래의 수는 4500여수이지만,그 내용을 살펴보면 구승으로 전래되던 가요가 문자에 의해 정착된 것과 처음부터 문자를 수단으로 하여 지어진 창작 와카가 섞여있다.
 일반적으로 와카라고 하면 '야마토우타'즉'일본의 전통시가'라는 의미이지만,이는 헤이안(平安)시대가 시작되는 10세기경의 일이다.그 이전에 편찬된 '만요슈'에도 '와카'라는 표기를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서로 화답하여 지은 노래'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와카가 명실상부하게 중국의 한시(漢詩)맞서는 '야마토의 노래'라는 의미를 가지고 개인의 서정적 내용을 노래하며 문자로서 완전히 정착하는 시기는 '만요슈'의 제 4기라고 말하는 8세기 후반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Ⅱ. 와카(和歌)문학의 흐름

 1. 『만요슈』

  1)시대 – 상대

 일본문학사에서 시대를 구분할 때, 가장 첫머리에 오는 시기를 상대라고 한다. 상대란 고대전기라고도 부르며, 일본이 수많은 씨족국가로 나뉘었던 AD 1세기경부터 794년 교토로 도읍지를 옮기기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일본이 4-5세기경 처음으로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며 자리 잡은 지역이 '야마토'였기에 이 시기를 '야마토 시대'라고도 부른다. 이 당시의 문학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은 천황에서부터 변방을 지키는 군인, 그리고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모든 이가 문학의 주체였다. 
 

   2)사회적 배경

 일본은 6세기 쇼토쿠 태자가 헌법 17조를 제정하여 율령 국가 체제의 기초를 마련하고, 중국의 수 왕조에 견수사를 파견하여 대륙문화 도입에 힘씀으로써 중앙 집권제 국가로 첫발을 디뎠다. 그 후 7세기 ‘다이카 개신’을 통해 당의 율령제를 기본으로 한 공지공민제(654년 다이카 개신에 의해 실시된 제도로, 땅과 백성이 모두 국가에 속하는 제도)가 실시되고, 진신의 난을 거치면서 천황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귀족 계급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개별적인 자아에 눈뜨게 된 것이다.
 게다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자와 불교, 유교 등 대륙문화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일본 고유의 신앙이나 원시적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곧 한자의 문자관과 불교 철학, 유교의 윤리관이 일본인의 집단적인 성향을 일상생활 위주의 개인 중심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본인들은 개체 의식에 눈을 떴고, 그것이 점차 ‘개인’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변화를 배경으로 문학도 집단적인 성향에서 개별적인 성향으로 발전하여 귀족들에 의한 개인 서정가 창작이 이루어졌다. 이전의 집단적 공동가요가 아닌 개인의 창작 시가가 등장한 것이다. 이 일본 고유의 서정시는 당시 한자와 함께 전래된 중국의 한시에 대응되는 일본-곧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의 노래라는 뜻에서 와카(和歌)라고 칭한다. 상대의 대표적인 와카집에 오토모노 야카모치(718년-785년)가 편찬한 사찬집 『만요슈』가 있다.


  3)편찬 배경

 만요슈가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힘들다. ‘고지키’와 같이 성립과정을 명기한 서문도 없고 『만요슈』의 편찬이나 성립 사정이 역사서에 기록된 바도 없다. 그냥 대략적으로 8세기경에 편찬되었다고 본다.
 다만, 『만요슈』안의 기록이나, 와카의 수록 상황등을 검토하고, 『만요슈』수록된 와카의 작자들에 관해서 기록한 역사서 등을 점검하여 그 상황을 추정하는 수밖에 없는데, 오토모노 야카모치(718-785)를 최종 편찬자로 보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이전에는 다치바나노 모로에(684-757)를 유력한 편찬자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야카모치는 모로에 사망 후, 무려 28년을 더 살면서 창작활동을 계속 하였다. 『만요슈』 17권에서 20권까지의 4권을 야카모치의 노래일기와 같은 성격으로 파악하는데, 만약 모로에가 편찬자라고 한다면 사후에 다시 살아나 『만요슈』를 편찬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모로에가 편찬자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일까?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점은 『만요슈』의 편찬자를 이야기할 때, ‘최종 편찬자’라는 말을 쓴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들이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만요슈』는 총 20권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20권이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편찬되었다고 보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만요슈』는 대개 세 단계의 성립과정을 거쳐서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가장 먼저 편찬된 것은 1권과 2권이다. 이후 3권에서 15권까지 그리고 16권이 편찬되고, 17권에서 20권까지가 마지막으로 첨가되었다고 본다.
 『만요슈』에서 가장 새로운 노래는 『만요슈』의 마지막 노래인 4,516번으로, 이 노래는 759년 정월 초하루에 지은 야카모치의 노래다. 야카모치는 718년에 태어나서 향년 68세의 나이로 758년에 죽었고, 야카모치가 최종 편찬자이니까, 그렇다면 현존하는 『만요슈』의 성립은 759년 이후 785년 이전에 편찬되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4) 가풍과 주요인물

 『만요슈』는 고대인들의 노래답게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을 사실적, 직접적으로 표현하였고, 이러한 노래의 세계를 에도 시대의 학자는 「마스라오부리[ますらおぶり․丈夫風]」, 즉 남성적이라 평가하였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보았을 때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작자계층이 광범위하고 제작기간도 길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요 가인(歌人)들의 활동시기, 가풍의 변천,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정치․사회적 상황들을 기준으로 대개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눈다.


   ①제1기

 조메이[舒明]천황(629~641)의 시대에서 임신(壬申)의 난(671)까지 약 40년간이 이 시기에 해당한다. 집단적인 고대가요의 모습을 여전히 남기면서 차츰 개인적인 창작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로 감동을 솔직히 표현한 생동감이 넘치는 소박한 노래가 주를 이룬다. 이 시기는 조메이천황, 덴치[天智]천황, 아리마노미코[有間皇子], 누카타노 오키미[額田王] 등 황실 가인들이 주로 활약을 하였다. 격동하는 고대사회를 배경으로 왕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이나 전승(伝承)을 토대로 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 그 중에는, 덴치천황의 군왕다운 스케일이 큰 서경가, 『만요슈』전체를 대표하는 여류가인 노카타노 오키미의 섬세하고 애절한 가락, 모반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젊은 왕자 아리마노미코의 역사 드라마적 배경이 오버랩 되는 절창 등이 있다.


   ②제2기

 임신의 난 이후 덴무[天武]․지토[持統]․몬무[文武]의 3대 천황이 중심이 되는 시기로 710년 나라[奈良]로 수도를 옮기기까지의 약 40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국가 체제가 정비되어 가고, 왕실이 번영해 가던 시기로 노래의 내용, 표현기법이 다양해지며 일본시가사상 보기 드물게 장가(長歌)가 발달하는 시기이다.
 덴무천황의 자녀 등 왕손들이 많은 활약을 하며, 왕실가인 이외에 궁중의 전문 가인들이 전면(前面)에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 가인으로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 덴무천황, 지토여왕, 다케치노 구로히토[高市黒人], 시키노미코[志貴皇子], 오쯔노미코[大津皇子] 등이 있다.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는 와카 역사상 특기(特記)할 만한 위대한 시인으로 궁중찬가, 만가 등 공적인 장의노래, 작자 개인의 감회를 읊은 사적인 노래, 연가, 만가 등 다양하고 장대한  내용의 노래를 자유자재로 읊었다. 그의 노래의 세계 중 특히, 마쿠라고토바[沈詞], 조코토바[序詞], 대구법, 반복, 점층법 등의 수사기법을 자유로이 구사한 장중하고 웅대한 장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반가(反歌․단가 형식으로 장가의 뒤에 붙어서 장가의 내용을 강조․보충함)의 세계는 일본 와카의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다케치노 구로히토는 여정(旅情)을 읊은 단가에 뛰어났으며, 모반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오쯔노미코 등 왕자들의 노래는 왕족들간의 정권쟁탈 등 복잡한 인간관계를 이면에 담고 있어 더욱 극적(劇的)이다.


   ③제3기

 710년 나라[奈良]로 수도를 옮긴 후부터 쇼무[聖武]천황이 활약한 733년까지 약 20년까지 약 20년간을 말한다. 정치적․사회적인 변혁기로서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풍토기(風土記)』 등 역사서가 편찬되는 시기로, 만요 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개인의식의 자각과 함께 한학(漢学)의 소양이 풍부한 지식인들에 의해 개성 있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시기이기도하다.
 대표적인 가인으로는 스케일이 크고, 이미지가 선명한 자연묘사로 서경가의 새로운 장을 연 야마베노 아카히토[山辺赤人], 인생고(人生苦), 가족애(家族愛), 인간세상의 무상 등을 주로 노래하여 야마노우에노 오쿠라[山上億良], 명문집안에 태어나 대륙의 사상, 문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여유롭게 읊은 풍류인(風流人)인 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 등이 있다.


   ④제4기

 734년에서 759년까지 나라 시대 중기의 약 25년간이다. 이시기는 덴표[天平]문화가 번성하다가 쇠퇴해 귀족간의 정쟁이나 음모, 반란 등에 의해 사회불안이 점차 심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차츰 만요 시대는 종말을 향해가고, 노래의 세계도 사교적,유희적 경향이 현저해지며 장가가 사라진다. 이 시기의 대표적 가인인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는 인간의 고독한 심정을 진솔하게 토로한 근대적이라고 조차 할 수 있는 노래를 섬세한 가락으로 우아하게 읊었다. 이 밖에 여류가인(女流歌人) 중에 가장 많은 노래를 남긴 오토모노 사카노우메노 이라쯔메( 伴坂上郎女), 이별의 슬픔과 정열적인 사랑의 증답가로 유명한 사노노치가미노 오토메등이 있다.


  5)내용

 『만요슈』는 고대 와카의 집대성적인 성격을 띠며 내용, 형식, 표기법 등 그 이전의 다른 가집에서 볼 수 없는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보여 준다.
 전 20권으로 되어있으며, 전체 노래 수는 약 4,500수이다. 그 중 장가가 약 260수이며, 세도카가 약 60수, 렌가체[連歌体]가 1수, 불족석가체가 1수이며, 나머지 약 4,200수는 단가이다.
 『만요슈』에 수록된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는 『만요슈』의 기록에 의하면 인덕왕비의 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5세기에서 오토모노 야카모치의 노래가 만들어진 759년까지 약 350년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7세기 이전의 노래는 연대, 기재내용 등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아 사실상 중심을 이룬 시기는 7세기 전반에서 8세기 후반까지 약 130년간이라 할 수 있다.
 『만요슈』는 한자를 표기하고 있으며, 그 음과 훈(訓)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표기방법이 상당히 복잡하다. 그 중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한 것을 만요가나[万葉仮名]라고 한다.
 작자는 천황, 귀족, 승려에서 지방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며, 작자 수는 약 530명, 작자미상의 노래가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은 정치의 중심지였던 야마토[大和]를 중심으로 관동지방(東国)에서 규슈[九州]지방에 이르기까지 과히 전국적인 규모라 하겠다.
 가집은 노래의 내용에 따라 분류(부다테․部立라고 함)되어 있으나 20권 전권이 통일되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소몬[相聞], 만가(挽歌), 잡가(雑歌)의 3부로 되어 있으며,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배열법을 병용하고 있다. 소몬가는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가 중심이며 서로 주고받는 증답․화답가를 다수 포함한다. 만가는 원래 운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来人)에 의해서라고 전해진다. 잡가는 소몬, 만가 이외의 노래로 각종 궁중의례, 연회, 자연, 여행, 왕의 행차(みゆき․行幸) 등 공적인 장(場)에서 사적인 장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노래가 이에 해당한다. 만가가 중시되고 사계절의 자연을 읊은 노래가 분류상 독립되어 있지 않은 점등이 『만요슈』 이후의 가집(歌集)과 크게 구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2. 국풍암흑시대

  1)시대

 ‘만요슈’에서 제1대 칙찬집인 ‘고킨슈’가 편찬된 될까지의 약 150년간의 시기를 국풍암흑시대라고 한다.(거꾸로 당풍전성시대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하지만 ‘와카’자체가 읆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고 읆어지긴 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기록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킨와카슈』에 실려 있는 작자미상의 노래들은 대부분 이 공백기에 읆어진 작품들이다.


  2)사회적 배경

 이는 헤이안 천도 이후 대륙문화융성의 시기로, 한시문이 공적인 학문, 공적인 언어로 위치하던 시기다. 이는 바로 율령제를 확립하고자 한 간무천황의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한시문의 문장경국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문장경국이란 학문하는 마음이 바로 나라 경영의 마음과 일치한다는 통치 이념으로 율령 관료의 기본 이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간무천황을 이은 사가천황과 쥰나천황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료운슈』『분카슈레슈』『게이코쿠슈』라는 칙찬 3대 한시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3. 『고킨슈』

  1)시대 – 중고

 일본문학에서 중고시대라 함은 간무천황이 수도를 헤이안으로 천도한 794년부터 가마쿠라 바쿠후가 개설된 1192년까지를 일컫는다. 도읍지가 ‘헤이안쿄(平安京)’였던 까닭에 다른 말로는 헤이안시대 또는 왕조시대라고도 한다.


  2)사회적 배경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인 율령제를 강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후지와라씨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부와 권력을 잡고 천황을 능가하는 섭관정치의 영화를 누리게 된다. 섭관정치는 천황에게 딸을 시집보내 태어난 외손자를 천황에 앉히고는 외조부가 섭정,관백의 자격으로 국정을 제 마음대로 운영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섭정이란 천황이 어릴 때 정무를 대행하는 것이고 관백이란 천황이 성인이 된 후에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한 귀족들은 이처럼 다투듯이 딸들을 천황의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권력을 누리는가 하면, 문화적으로 풍류를 즐기며 우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의 멋을 즐기는 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 문화의 저변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대륙문화의 모방이 깔려있다. 한자와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고, 특히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한시가 성행하게 된다. 남성 귀족들이 중국 모방에 빠져 있을 무렵, 다른 한편에서는 궁중에 후궁으로 들어간 여성들과 그들을 보필하는 궁녀들에 의해 왕조 여류문학이 꽃피게 된다.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이 꽃피게 되는 데에는 가나문자의 발명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가나문자의 보급과 더불어 그동안 잠잠했던 와카가 다시 부흥케 되고 산문문학도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때마침 중국의 모방에만 급급하던 남성귀족들도 자신들의 전통적인 와카의 소중함과 일본적인 소재를 재관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서 바야흐르 귀족적인 분위기의 헤이안 문학이 절정을 맞게 된다.


  3)편찬 배경

 세상에 유포되는 와카만을 골라 임금의 명령으로 편찬된 최초의 ‘초쿠센와카슈’가 바로 『고킨와카슈』다. 『고킨와카슈』이전에는 국가나 천황이 한시만을 공적으로 인정하다가 『고킨와카슈』에 이르러 비로서 와카가 국가나 천황이 공인한 문학으로 인정된 것이다. 『고킨와카슈』는 다이고 천황의 명령으로 905년에 완성되었다. 초쿠센슈를 만들 때에는 임금이 당대의 가인들 중에서 노래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편집인으로 지명하여 노래를 모아 선별, 분류,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했는데 이들을 ‘센자’라고 한다. 『고킨와카슈』의 ‘센자’는 기노 도모노리, 기노 쓰라유키, 오시코치노, 미부노 다다미네, 네 사람이다. 이들은 『만요슈』이후부터 불려진 방대한 노래들 중에서 1100여수를 엄선하여, 전 20권의 와카슈를 편찬하였다. 이 시대에는 이미 와카는 5-7-5-7-7의 31자로 된 단가의 형태로 고정되었기 때문에 1100여 수의 노래는 거의 대부분이 단가의 형태이며 기타의 형태로는 장가 5수, 세도카4수가 있을 뿐이다. 이들 센자들은 와카를 어떤 식으로 배열할 것인지 많은 토의를 거친 후, 내용별로 분류를 하여 배열하였다. 이때, 와카의 내용별 분류를 ‘부다테’라고 불렀으며, 부다테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축하의 노래, 이별의 노래, 여행의 노래, 사물 이름을 읆은 노래, 사랑의 노래, 죽음의 노래, 기타의 노래, 형태가 다른 노래, 궁중의 축하노래 순으로 13종류로 분류하고 있다.
 

  4) 가풍과 주요인물

 『만요슈』의 세계를 마스라오부리라 평한 데 대해 『고킨슈』의 세계는 다오야메부리[だおやめぶり․手弱女風], 즉 여성적이라 평가하였다. 섬세하고 우아한 세계를 7․5조로 노래한 것이 전체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고킨슈』도 『만요슈』와 마찬가지로 가풍(歌風)의 변천 등에 따라 대개 다음 3기로 나눈다.


   ①제1기 – 작자미상의 시대

 나라 시대에서 한시문이 번성하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수가 이 시기의 노래이다. 와카가 사적인 자리에서 읊어졌을 뿐, 아직 전면에는 등장하지 않아 「국풍 암흑시대(国風暗黒時代)」라고 불리기도 한다. 만요풍의 소박함을 남기면서도 헤이안 귀족들의 우아함을 엿 불 수 잇는 새로운 가풍을 탄생시켜 간다. 새로운 수사기법인 미타테[見立て-비유법의 하나로 실제의 것과 다르게 보는 것, 즉 흰눈을 지는 꽃으로, 단풍을 비단으로, 봄비를 눈물로 보는 등]는 이러한 미의 새로운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②제2기 – 롯카센 시대

 9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해당하는 시기로, 『고킨슈』서문에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는 6명의 와카 명인이 활약한 시기라하여 「육가선 시대」라 한다. 『고킨슈』를 대표하는 「가케코토바[동음이의어를 살려 한 단어에 둘 이상의 뜻을 담음]」, 「연어(의미, 발음상 관련이 있는 단어를 사용하여 시적 효과를 높임)」등의 수사법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육가선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 헨조[遍照],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 훈야노 야스히데[文屋康秀], 기센[喜撰], 오토모노 구로누시[大友黒主]이며, 이들 중 나리히라, 헨조, 고마치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가인이다.
 나라히라는 헤이안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풍류인으로 풍부한 감정을 간결하게 표현하였고, 여정(余情), 여운이 남는 노래를 읊었다. 헨조는 여유롭고 소탈한 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으며, 고마치는 『고킨슈』를 대표하는 여류가인으로 사랑의 체험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켜, 인생의 비애,사랑의 슬픔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를 남겼다.


   ③제3기 – 편자들의 시대

 글자 그대로 『고킨슈』가 편찬된 시기를 말한다. 기노쯔라유키[紀貴之](868~945)등 편찬자들이 활약한 시기이다. 『고킨슈』에 작자명이 기록되어 있는 약 130명의 가인중 과반수 이상이 이 시기에 작품을 남겼으며, 편의상 3기로 구분하였지만 이 시기가 『고킨슈』의 중심을 이룬다.
 기노 쯔라유키는 『고킨슈』를 대표하는 가인으로서, 『고킨슈』편찬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신분은 낮았지만 와카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노래는 신선한 착상과 새로운 구상을, 조코토바[序詞], 가케코토바[掛詞] 연어(縁語) 등의 다양한 수사법을 구사하여 표현, 『고킨슈』의 주류를 이루는 가풍을 창출하였다. 또한, 최초의 가나로 된 일기인 도사일기(土佐日記)를 쓰는 등 가나문학의 발달에 많은 공적을 남긴 가인이다.
 편찬자 이와의 가인으로는 탐미성이 농후한 노래를 읊은 소세이[素性], 여류시인으로 사랑의 번뇌를 섬세하고 세련되게 읊어 앞서 인용한 고마치[小町]와 쌍벽을이루는 이세[伊勢]등이 있다.


  5)내용

 전 20권으로 노래 수는 약 1,100여 수이며, 세도카와 장가가 소수 포함되지만 대부분이 단가이다. 가나서문[仮名序]과 한문으로 된 서문(真名序)이 있으나, 양 서문의 내용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기노 쯔라유키의 가나서문은 와카의 본질, 효용, 기원 가인평(歌人評), 편창경위 등을 가나문[仮名文]으로 기록한 최초의 가론(歌論)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작자계층은 『만요슈』와는 달리 거의 귀족으로 한정되지만 귀족 계급 중에서도 중하류 귀족, 승려, 궁중의 여인(女房․뇨보)등이 중심이 되며 왕족 및 상류귀족은 많지 않다. 이름이 알려진 총 작자 수는 127명이며, 그 중에서는 쯔라유키(102)를 비롯한 편찬자들의 노래가 총 244로서 전체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그리고 작자미상의 노래가 3분의 1이상 포함된다.
 노래의 내용은 대개 소재에 따라 분류되어 있으며 전 20권 중 11권을 차지하고 있는 자연과 사랑이 내용상의 주축이 된다.(약700수). 사계절의 노래가 제 1권에서부터 6권까지 권두에 등장하며, 자연중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밖에도 창작 동기(이별, 여행, 애상 등), 표현기법(物名․모노노나), 노래의 형식(잡체부․雑体部)에 따른 분류가 있다.
 사계절의 노래는 입춘에서 섣달 그믐까지 계절의 추이에 따라, 사랑은 첫사랑에서 이별, 회상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수록하고, 또 제목에 따라 유기적으로 와카를 배열하여, 노래 한 수의 독립성과 함께 가집(歌集) 전체로서도 하나의 미적 세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편찬하였다. 그리고, 『고킨슈』의 이러한 구성, 배열방법은 그 이후의 칙찬집의 규범을 이룬다.


 4. 8대집(八代集)

 이 시기에 고킨슈가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고킨슈는 와카집의 매뉴얼이 되었고, 고킨슈 이후, 계속되는 칙찬집의 편찬은 모두 고킨슈를 모방하였다. 가집의 체재뿐만 아니라, 고킨슈는 표현뿐만 아니라 가풍(歌風)에 있어서도 헤이안 왕조 와카의 패턴이 되어버렸다. 고킨슈 이후에 근세에 이르기까지 천황의 명에 의해 편찬된 와카집은 고킨슈를 포함해서 21개. 이들 가집의 이름을 살펴보더라도 얼마나 고킨슈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고킨슈 이후 와카문학에서 하나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8번째 와카집인 신고킨슈(新古今集)까지의 와카집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구정호 교수님 블로그 참고) 

1) 고킨슈(古今集)

2) 고센슈(後撰集)

 ‘고킨와카슈’편찬 이후, 50년 가까이 지난 951년에 무라카미 천황의 어명에 따라 니시쓰보노 고닌에 의해 편찬되었다. 전 20권으로 가수(歌数)는 유포본에는 1,426수로 되어 있으나, 전본에 따라 본문과 가수의 차이가 꽤 있다.
 ‘고킨와카슈’이후 와카가 귀족의 일상생활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증답가는 188수나 되며 증답가를 중심으로 후궁을 무대로 하는 사적인 연애의 실태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궁중문학으로 와카를 격상시키려던 ‘고킨와카슈’와는 그 목적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류가인이 많다는 것도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와카부흥의 강한 의식을 보여주는 ‘고킨와카슈’에 비해 ‘고센와카슈’의 특징은 언뜻 보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모노가타리나 일기를 통해 엿볼 수 있듯, 그때까지의 소박하게 일상에서 읆어 오던 와카가 활성화되고 널리 또한 당당하게 읆어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오히려 시대에 충실한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슈이슈(拾遺集)

 ‘고센와카슈’성립 50년 후, 와카 애호가인 가잔천황이 퇴위한 후 개인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1005년 이후 성립되었다고 보이지만, 성립과정이 확실하지 않고, 내용도 ‘후자와라노 긴토’의 ‘슈이쇼’를 증보 개편한 형태다. 전체 20권으로 가수는 유포본에 따르면 1,315수다.
 와카의 성격이 일상적인 생활 와카에서 공적인 입장의 와카로 편찬방침이 다시 되돌아갔다는 점에서, ‘고킨와카슈’로의 회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내용과 표현 기법의 조화, 여정을 중시한 점 등은 ‘고킨와카슈’의 미의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확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고슈이슈(後拾遺集)

 사라카와 천황의 어명으로 후지와라노 미치토시가 편찬한 가집이다. 성립 당시부터 논란을 일으킨 가집으로, 이 시기를 와카사의 전환기로 볼 수 있다. 공적인 문학으로서의 일체감보다는 사적인 행위로 예술 지상주의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여류가인이 특히나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섭관시대 최전성기에 후궁을 중심으로 여류가인들이 배출된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나, 그들의 와카에는 일기문학이나 모노가타리를 통해 자라온 자조의 정신과 짚은 감성이 나타나 있다는 점이 ‘고슈이슈’의 독자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5) 긴요슈(金葉集)

  시라카와 법왕의 어명으로 도시요리가 편찬한 다섯 번째 칮찬집으로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다이슈의 전통적인 발상을 계승하면서도, 한 수의 와카 안에 한가지의 새로운 가풍을 느낄 수 있도록 한 와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시카슈(詞花集)

 스토쿠 상황의 어명으로 후지와라노 아키스케가 중심이 되어 편찬되었으며, 직전의 ‘긴요와카슈’를 따라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찬된 전대 가인들의 와카는 주로 선명한 인상을 주는, 시각적 이미지가 강한 와카가 많고, 당대가인의 와카는 ‘긴요슈’의 세계를 발전시킨 것이 많다.

7) 센자이슈(千載集)

  고시라카와 법황의 어명으로 슌제이가 편찬한 가집으로서, 그 구성은 이전 ‘긴요와카슈’,’시카와카슈’의 10권이 아닌, ‘고킨와카슈’를 의식한, 20권 구성이다. 가수는 1280여수이고, ‘가나서’가 있다.
 자연을 보는 시각이 신선하고, 서정성이 풍부한 여운을 느낄 수 있으며, 실존적 내면에 대한 자조를 나타내는 와카가 많다. 이는 편자 슌제이가 ‘고킨와카슈’의 서정성에 대해 늘 공감하고 있었음에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고전의 세계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와카 한 수의 이미지를 복잡하고 요염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작품들도 ‘센자이와카슈’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중세 와카의 전통을 이어 ‘센자이와카슈’가 싹 틔우고 있었던 것을 추정하게 하는 가풍이라 하겠다.

8) 신고킨슈(新古今集)


 5. 『신고킨슈』

  1)시대 – 중세

 일본의 중세시대는 12세기말의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서부터 17세기 초의 에도막부 개설까지의 약 400년간이다. 그 기간을 또한 세분해서 1333년의 가마쿠라 막부 멸망까지를 가마쿠라 시대, 1392년의 남북조 합일까지의 기간을 남북조 시대, 그 후 무로마치 막부를 거펴 1573년의 무로마치 막부 멸망까지의 기간을 ‘아즈치모모야마’시대라고 부른다.


  2)사회적 배경

 중세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전란이 많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무사들이 지배하는 막부정치로 인하여 귀족들이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귀족 계층이 어지러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내지는 한탄으로 일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영향이 문학작품에도 나타난다.
 중세시대의 특징을 크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귀족계급의 몰락과 쇠퇴, 그를 대신하는 무사계급 대두와 신장, 나아가서는 지방사회, 서민사회의 커다란 성장이 서로 대립하며 융합, 지양되어 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함께 운문문학도 와카에서 렌가로, 렌가에서 다시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하이카이 렌가로 중심축이 이동을 하여, 그 후 에도시대에는 다시 하이카이 렌가에서 변화한 하이카이가 서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학의 형태로 정착되어 갔다.
 

  3)편찬 배경

 ‘신고킨와카슈’는 고토바인의 칙명으로 전시대의 마지막 칙찬집인 ‘센자이와카슈’를 편찬한 후지와라 도시나리의 아들, 후지와라 사다이에가 고토바인과 함께 중심이 되어 편찬한 가집이다. 따라서 운문 문학사적으로 중고시대에서 중세시대를 이어주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풍을 구현하여 왕조 와카와는 색채가 다른 신풍 와카의 시대를 가져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칙찬집이다. 이 시대에 사다이에와 함께 신풍의 와카를 이끌어간 가인들로 이루어진 가단을 일반적으로 ‘신고킨가단’이라고 부른다. 이 신고킨가단은 많은 ‘우타아와세’를 개최하여 새로운 와카문학 세계를 추구하고 구현하였다.
 

  4) 가풍과 주요인물

 『신코킨슈』의 세계를 환상적, 음악적, 상징적 또는 고전주의적, 관념주의적이라고 하는 다양한 평가가 있듯이 그 예술적 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미의 세계를 산쿠기레[三句切れ,세 번째 구에서 내용이 한 번 중단됨], 다이겐도메[体言止め,와카의 마지막을 체언으로 끝내 여운을 남김], 혼가도리[本歌取り,유명한 옛 노래에서 표현이나 내용의 일부를 빌려, 옛 노래의 세계를 연상하게 함으로써 중층적인 표현 효과를 보게 함]의 수사기교법으로 상징적이며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 신고킨 세계이다.
 대표적인 작가인 사이교[西行]와 슌제이[俊成]는 헤이안 말기와 가마쿠라 초기에 걸친 전환기에 많은 활약을 했으며, 시가사(詩歌史)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코킨슈』에 가장 많은 노래가 수록된 시인은 사이교(1118~1190)이다. 그는 수도자이면서도 쉽게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솔직히 토로한 노래로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방랑시인이다. 또한 당시 가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슌제이(1114~1204, 도시나리라고도 함)는 전통적인 내용과 표현을 중요시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의 세계를 개척한 학자이며 시인이다. 그의 미의 세계는 유현(幽玄)이란 말로 상징되는데, 이것은 일본 중세미를 대표하는 미적 세계로서, 렌가, 노의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데이카(1162~1241)는 『신코킨슈』당대의 가풍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부친인 슌제이의 노래 세계를 더욱 발전시켜 상징적이며 환상적(幻想的)인 미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데이카와 함께 새로운 가풍을 개척한 이에타카[家隆], 여류가인으로 시대의 격류 속에서 비극적인 생애를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킨 쇼쿠시나이신노[式子内親王], 『신코킨슈』편찬을 주도한 고토바인, 편찬당시 현존하는 작자로서 가장 많은 노래를 남긴 지엔[慈圓] 등이 있다.


  5) 내용

 전 20권으로 노래 수는 약 2,000수이며, 전부 단가형식이다. 이름이 알려진 총 작자 수는 396명으로, 그 중 10수 이상 수록되어 있는 작자는 46명이며, 『고킨슈』에 비해 작자미상의 노래는 훨씬 적다. 동시대 가인들의 노래와 함께 만요 이후의 옛 가인들의 노래도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중심이 된 것은 역시 동시대 가인들의 작품이다. 동시대 가인들 중 수록된 노래 수가 많은 가인은 사이교[西行](94수), 지엔[慈圓](92수), 요시쯔네[良経](79수), 슌제이[俊成](72수), 쇼쿠시나이신노우[式子内親王](49수), 데이카(46수), 고토바인(35수)이다. 전시대의 유명 가인들 중에는 쯔라유키[貴之] 32수,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25수, 히토마로[人麻呂]의 노래 23수, 등이 수록되어 있어 신고킨 시대 이전의 와카에 대한 평가를 잘 알 수 있다.
 노래의 내용에 따른 분류는 『고킨슈』에 따랐으나, 부다테[部立]명은 『신코킨슈』직전에 성립한 『센자이슈[千載集]』와 일치한다. 종교가인 「진기[神祇]」, 「샷교[釈教]」부가 각 한 권씩 새로 생겨, 종교적 색채, 특히 불교적 인생관과 무상관이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그밖에 봄 노래에 비해 가을을 소재로 한 노래가 많고, 여름노래에 비해 겨울노래가 많은 것이 새로운 경향이다.


  6. 와카의 쇠퇴

 중세에 들어서서 권문세가나 귀족은 정치의 실권을 잃어, 귀족문화의 중심이었던 와카도 자연히 중앙 무대에서 멀어졌다. 신흥 무사에게 중앙의 정군을 빼앗긴 귀족들은 정치와는 관계없이 와카와 같은 전통 문화를 마음의 의지로 삼고 심취했다. 그들은 중세 신흥 도시인 가마쿠라에 대한 대항 의식을 갖고 도읍지인 헤이안쿄에서 와카에 열의를 보냈다.
 1205년 고토바인의 칙명에 따라 『신고킨와카슈』를 편찬했다. 와카 2000여 수를 20권으로 묶었는데, 편자는 후지와라노 데이카등이다. 내용을 전체적으로 보면 현실적인 체험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세계를 읊은 것이 대부분인데, 그것은 무력해진 귀족들이 현실에 등을 돌리고 오로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만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신 고킨와카슈』라는 제목은 『고킨와카슈』에 ‘신’자를 붙인 것으로, 『고킨와카슈』를 모범으로 삼아 편찬했음을 표방한다. 서문을 가나와 한문 두 가지로 쓰는 등 『고킨와카슈』의 체제를 많이 따랐다. 『고킨와카슈』 이후 편찬된 8대 칙찬 와카집 중에서 여덟 번째에 해당되는데, 편자인 후지와라노 데이카의 아버지인 도시나리가 헤이안 말기에 제창한 ‘여정’과 ‘유겐’의 이념이 주조가 되었다. 가풍은 혼카도리에 의해 노래에 중충적 의미를 부여하고, 다이겐도메에 의해 여운을 남기는 등 요염하고 극적인 분위기다. 『신 고킨와카슈』는 『만요슈』『고킨와카슈』와 함께 일본 3대 가집으로 칭해지며, 고킨풍 왕조 문학의 전통을 발전시켜 와카 미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신 가인으로는 자연에 대한 사랑이나 인생관을 읊은 사이교, 만요풍 노래를 읊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유명했다. 그리고 『신 고킨와카슈』편찬의 중심인물이었던 후지와라노 데이카 사망 후에는 그의 아들 다메이에가 가단의 지도자가 되어 활약했다.
 다메이에가 사망하자 가단은 세 파로 나뉘어, 니조파 • 쿄고쿠파 • 레이제이파가 되었다. 이들 세 파는 주도권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었으며, 앞서거나 뒤서거니 칙찬집을 편찬했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부터는 승려나 무사가 중심적으로 와카를 읊게 되었고, 지방에도 와카 문화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미적인 정수나 사상 추구 없이 형식에만 치우쳐, 질적인 면은 점점 떨어졌다. 중세에 와카는 『신 고킨와카슈』를 정점으로 하여 한때 발전하다가 이후에는 점차 형식적주의로 흘러 쇠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요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 일본 운문 문학의 중심이 되어왔던 와카-57577의 단가형식-는 그 역할을 다하고, 가마쿠라 시대부터 서서히 유행한 렌가가 점차 융성했다.   

 

 

 

 

 

 

 

 

 


Ⅲ. 참고문헌

1) 일본시가문학사 / 최충희, 구정호외 3인 / 태학사
2) 일본고전문학비평 / 정순분 / 제이앤씨
3) 모노가타리에서 하이쿠까지 / 한국일어일문학회 / 글로세움
4) 일본설화문학연구 / 문명재 / 보고사
5) 신 일본문학의 이해 / 한국일본학회 / 시사일본어사
6) 일본문학의 이해 / 최재절 / 민음사







note by 죽지 않는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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