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의 일이 었습니다. 저녁 쯤에 국제 전화 한통이 날아 오더군요.



"야."

"왜?"

"청첩장 좀 써라."

"돈은?"

"그런 거 없다."

"알았다."

(뚜 뚜 뚜 뚜...)




녀석의 이름은 김창희. 철원에서 삽질 하다 만난 사이입니다만 그때는 안타깝게도 제가 존대말을 써야했지요. 녀석이 저보다 2달 고참이었기 때문입니다. 뭐, 2달 고참이라면 꽤 가까웠겠구나 생각하시겠지만 녀석과 저 사이에 11명이 있었다는 걸로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여자 분들께서는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상황인지 주위 남자 분들께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대에 들어갔을 때 12명의 이등병이 각잡고 앉아 있는 기분은 꽤나 상큼한 정신적 공황을 선사하지요.   




<저희 소대 사진입니다.>



어쨌든 나오니까 다 친해지더군요. 제가 군에 갈 시기가 약간 늦어져서 그런지 고참들 대부분이 동갑이고 개중엔 1,2살 어린 친구도 있었는데 나중에 다 친구 먹었습니다. 창희도 그 중에 한명이었죠.


녀석과는 인연이 좀 있어서 인지 수년 전, 일본 유학 중에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야 전공이 그쪽이라 간 것이지만 창희는 돈을 벌러 갔었지요. 히라가나도 모르면서 비행기 티켓만 끊고 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생활력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할듯합니다.




<잡지에 실렸던 창희와 나>



녀석은 거기서 미래의 반쪽을 만났고 다음 달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정되어 있지요. 사실 결혼은 예전에 했고 결혼식만 잠깐 국내로 들어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청첩장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게 부탁을 한 것이고요.


연애편지 대필, 자기소개서 대필등은 많이 해보았지만 청첩장은 한번도 써본적이 없는지라 조금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좋은 추억이 아닐까 싶어 흔쾌히(?) 승낙했지요. 아무래도 청첩장은 양가 부모님과 어르신들도 오는 자리라 글을 쓰는데 제약이 있더군요. 어쨌든 나름대로 6개의 문구를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평범한 청첩장과 좀 다르게 써 보려 했는데 어째 그리 다른 것 같지는 않군요.(웃음)


아래가 나름대로 써 본 청첩장 문구입니다. 여러분은 몇번이 가장 마음에 드시는지요?  참고로 제 친구와 그의 짝은 6번을 선택했답니다.



1.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기분 좋은 바람 부는 선선한 가을에

저희 평생을 약속하려 합니다.

행복의 증인으로 당신을 모십니다.

 

 

2.

 

oo년 동안 서로의 이름조차 몰랐던 두 사람이

가까운 이국 땅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저희는 이 우연을 영원으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동경에서 시작된 사랑, 서울에서 확인 받으렵니다.

 

 

3.

 

향수병에 울고 있을 때

내 어깨 감싸준 그 사람,

이국 땅에서 홀로 아플 때

내 손 잡아준 그 사람.

그 마음 잊지 말고 평생 함께 하려 합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언제나 함께 하려 합니다.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날, 당신을 초대합니다.

 

 

4.

 

동경의 한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참 많이도 울었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향수병에, 때로는 너무 지쳐.

이국 땅에서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던 두 사람이

이제 평생을 그러기로 결심했습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항상 함께 하겠습니다.

소중한 당신이 그 약속의 증인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5.

 

항상 큰소리로 웃는 한 남자가 소리 죽여 눈물 흘릴 때

작고 귀여운 한 여자가 조용히 그를 안아 주었습니다.

항상 강한척하는 한 여자가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을 때

덩치 크고 잘 웃는 한 남자가 조용히 그녀를 안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가슴에 쏟아 부었던 눈물이 어느새 사랑으로 피었나 봅니다.

이제 서로의 슬픔을 영원히 보듬어 주는 사이가 되려 합니다.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파란 하늘 아래서

소중한 당신에게 그 사랑 확인 받고 싶습니다.

 

 

 

6.

 

가까운 이국 땅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그 우연을 영원으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을 냄새 물씬 풍기는 파란 하늘 아래서

소중한 당신에게 그 사랑 확인 받으렵니다.

행복의 증인으로 당신을 모십니다.



<수년 전, 처음 둘을 보았을 때 사진입니다. 이때는 두 사람이 만난지 몇일 되지도 않았는데 창희가 계속 억지로 손을 잡을려고 하는게 재밌어서 한창 찍어 두었습니다. 누가 결혼할지 알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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