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편찬 8년 만에 드디어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다. 아니나 다를까. 민족문제연구소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편할 날이 없다. 수구단체들의 거센 반발 탓으로 보고대회를 불과 이틀 앞두고 대관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당했기 때문이다.

 

숙명아트센터측은 수구단체와의 충돌 등 자칫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하여 문화재나 관람객에게 피해가 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책임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민족문제연구소측은 긴급대책회의를 연 끝에 예정대로 행사를 강행하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데 슬며시 웃음이 난다. 하기사 그 정도의 반발이나 협박이 두려웠다면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임종국 선생님께 승전보를 올립니다

 

오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지 못하는 한 민족의 자주는 공염불이며 민족의 통일도 백일몽이라고 말했던 사람, 그래서 가난과 제도권의 소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친일문제 연구에 바친 사람, 바로 고 임종국 선생이다.






서울에서 천안으로 거처를 옮겨 집필에 전념하던 80년대 중반의 임종국 선생. 





 

1929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한 그는 시인을 꿈꾸던 문학소년이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1956년에는 <이상전집>을 발표하며 이상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세웠다. 1959년에는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해 정식으로 등단한다.

 

계속해서 그 길을 걸었다면 우리는 그를 유명한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65년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목격하면서 당시 37세의 임종국은 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이대로 가다간 제2의 이완용이나 송병준이 계속해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때부터 임종국은 고독한 친일문제연구가의 길을 걷는다. 본래 무언가를 파고들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던 그는 이상연구 때 모았던 1차 자료를 바탕으로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결국 원고에 펜을 댄지 불과 8개월 만에 명저 <친일문학론>(1966년)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지금은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적인 업적과 탁월한 기록물로 인정받고 있는 책이지만 당시는 출판한지 10년이 지나도록 초판 3000부조차 소화하지 못했다. 정치와 역사, 문학계의 기득권층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육사를 나온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가장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임종국의 평전을 내기도 한 친일전문가 정운현은 문학계의 대선배와 부친까지도 실명비판의 도마위에 올린 그의 엄격함에 감탄하며 '친일문학론은 아직도 그 권위를 능가하는 성과물이 없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이 책을 평했다.>




유신몰락의 길을 걷던 1979년, 그 유명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왔을 때도 정부관계자는 직접 출판사 대표를 불러 "친일행위 따위를 지금 들춰내서 뭐하겠다는 거야!"라며 호통을 치고 책을 판금시켰다.

 

직접적인 판금의 계기는 책에 실린 임종국 선생의 논문인 '일제 말 친일군상의 실태'였다. 친일파들 대부분이 고스란히 독재권력으로 탈바꿈한 사실을 누구보다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보다 훨씬 서슬 퍼런 권력을 자랑하던 60년대 중반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빨갱이로 몰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권력에 밉보인 자들은 모조리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고문과 구금에 시달려야 했던 시대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노력을 쏟아 부은 연구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제도권 학자들의 조롱과 비난이 이어졌으니 큰 실망감에 포기할 법도 한데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졌다.

 

실제 제도권에서는 임종국 선생을 넝마주이라고 비난했다. 헌책방의 더러운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까지 자료를 수집하는 그를 조롱조로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모아 놓은 자료와 혼을 바쳐 써낸 저서들은 친일문제연구의 소중한 밑바탕이 되어 지금까지도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그렇게 임종국은 6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목숨을 건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온갖 악의에 찬 협박을 무릅쓰고서도 편찬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리고 수많은 정치인이 상대후보의 친일경력을 캐기 위해 접근을 시도해도 단 한번도 그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그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부친과 은사의 친일행위까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피눈물로 역사를 기록한 그 정신,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하면서도 제도권의 온갖 비난과 조롱을 참고 견디며 마지막까지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그 정신 말이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자정작용을 믿는다

 

친일인명사전은 나오기까지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아마 지금부터가 더한 고난의 길이 될듯하다. 민족문제연구소측을 향한  폄훼의 강도가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거세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지겹게 반복된 친일파 후손들과 수구세력들의 주장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지금 과거를 들추어 내 봤자 외교관계에도 우리에게도 아무런 득이 없다. 이제는 과거와 화해하자. 용서와 화합의 시대로 나가자.'

 

적어도 이 말은 친일파가 아닌, 그들에게 피해를 당한 대부분의 국민들이 해야 할 말이다. 임종국이 말했듯 친일파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바로 설 수 없다. 왜일까.

 

친일을 묻어 버리는 것은 우리에게도 외교에도 정말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흔히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리며 프랑스와 비교한다. 또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유럽의 이웃들에게 신뢰를 얻고 화합의 길을 걷고 있는 독일을 일본과 비교한다.

 

그런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이 그렇게 엄격하게 자국 내의 나치 협력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독일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정작용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결단코 아니라고 본다.

 


<89세의 나이로 10년형을 확정받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모리스파퐁.
그는 프랑스 파리의 경찰국장, 장관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민간단체의 추적으로 결국 추악한 나찌 협력자임이 밝혀져 재판장에 서게 됐다.
그는 적의 관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다며 변명했지만 그런 항변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 국민 아무도 그의 업적이 그의 과거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족과 국가를 배신한 행위는 어떤 업적으로도 용납받을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의 극우파와 반성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싫어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선 아무런 악감정도 없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일문학을 전공했으며 유학시절 본의 아니게 무일푼이 되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도와 준 사람도 일본인 버스 운전기사였다.

 

하지만 그런 고마움이 내가 과거의 역사를 망각한 채, 역사적인 주제가 나올 때마다 그들과의 대화를 슬그머니 넘어가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일본 대다수의 국민은 한일간의 역사를 정확하게 배우지 않았을 뿐, 내가 과거의 역사를 당당하게 밝히고 설명했을 때,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활발하게 친일을 연구하며 사죄하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해방 이후, 이 나라의 권력으로 재등장한 수많은 친일파와 일본육사 출신들이 철저한 자기반성대신, 그 인맥으로 당시의 일본 기득권층과 끈끈이 야합하며 스스로 당당할 수 있는 기회를 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본 권력층 또한 자기반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혹자는 일제 강점기가 35년이나 되었고 미군정의 영향이 컸기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임종국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일랜드는 300년 만에 압박을 벗었고 유대 민족은 2천년을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으나, 그들은 민족의 전통을 상실하지 않았다. 우리가 불과 35년으로 이 지경까지 타락했었다는 것은 단순히 친일자들의 수치로만 끝날 일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수치로서, 맹성은 물론 환골탈태의 결사적 고행이 수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조상의 죄를 감추기 위해 오히려 죄 없는 당시의 농민들까지도 친일로 몰아가기에 바쁘다. 일제의 지배 하에 세금을 냈으니 친일파요,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으니 모두가 친일이라고. 너무나 비겁하고 옹졸한 주장이라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도대체 어떤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자발적으로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과 힘이 없어 당한 사람들을 한데 묶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일본의 극우파 정치인들과 전범들을 일본국민들과 따로 분리해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증오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우리들 스스로와 외교관계마저도 망치고 있는 것 아닌가.

 

혹자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웠던 역사를 강조하며 이 나라에 정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오늘, 대한민국의 자정작용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중이다.

 

기득권과 권력층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때, 그리고 그들이 나라를 팔아 먹으면서까지 호화호식할 때, 항상 이 나라를 구한 건 백성들이자 소시민들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도 기적 같았던 전국민적인 모금 때문 아니었던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국민이 있는 한, 기어코 역사를 바로잡는 첫 단추를 끼워내고야 마는 저력이 있는 한, 나는 세계 어디에서나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용서와 화합의 시대로 나가는 제 일보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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