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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8일 오후 4시가 좀 넘어서다. 편집장에게 용산참사 영결식 취재를 맡겠다고 문자를 날렸다. 편집장은 바로 전화를 걸더니 예의 그 겸손하고 흔쾌한 태도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그의 이런 권위의식 없는 태도는 언제나 존경스럽다.


<사진 설명 : 1월 9일 12시 20분, 영결식 시작 10분 전> 

2.

취재를 자처한 이유는 추모의 마음이 오십, 현장에서 내눈으로 시대의 흐름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오십이었다. 사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분석기사나 논평을 쓰는 체질과는 거리가 멀다. 프리랜서 기자 때부터 현장 취재와 인터뷰가 훨씬 좋았다. 물론 양쪽의 균형이 맞는 것이 기자로서는 가장 적절한 형태일 테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현장을 선택할 듯하다.


사람이 본디 나약해서 그런지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다보면 어느새 감정에 무뎌진 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아픔에 공감하기 이전에 냉철함을 따지고 이론적인 중립을 내세운다. 순서가 바뀐 일이며 인간성을 잃는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냉철한 이성인이 된듯 착각하고 가슴으로 알기 전에 머리로 달려 든다. 하지만 현장에 한번 갔다오고 사람을 한번 만나고 나면 한동안은 그런 비열함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사실 나에게 주어진 취재 시간은 3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1월 9일 낮 12시부터 3시. 정확히 영결식이 행해지는 시간. 마음 같아서는 발인식부터 하관식까지 모두 취재하고 싶었지만 다른 곳에서 맡은 일과 선약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라도 영결식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아마 스스로를 치유하고 싶었기 때문인 듯하다.


3.




1월 9일 12시 21분, 영결식 시작 9분전.


카메라가 잡아 내지 못한 곳까지 추모객들이 이어져 있고 계단과 횡단보도에 이르기까지 빈틈이 없다. 앞쪽에 놓여진 의자만 1200개인데 그 6,7배에 달하는 공간을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그것도 모두 선채로 말이다. 하지만 경찰추산은 2500명이다.





12시 23분.


유가족에 의해 영정이 하나 하나 영결식장으로 올라 온다. 위 사진의 영정은 고 한대성씨. 일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던, 162cm, 몸무게 58kg의 일용직 노동자. 영정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한승균씨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군에서 휴가를 받고 나왔다. 작년 1월 20일, 군생활의 반도 마치지 못했을 그는 부대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접했을 것이다.


그의 뒤편으로 아버지의 시신이 운구되고 있다.





12시 27분.


마지막 운구가 완료되는 순간이다. 355일동안 냉동고에 얼어 붙어 있다가 겨우 바깥으로 나왔는데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다. 장갑을 끼고도 카메라를 쥔 손이 시렵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날씨 속에서 물대포를 맞았다. 





12시 29분.


영결식 진행을 위해 모든 기자가 식장 아래로 내려왔다. 영정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부터 고 윤용현(49), 고 양회성(58세), 고 이상림(72세), 고 한대성(54세), 고 이성수(51세). 


모두 가족이 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남편이었다.
 



12시 30분.


김태연 장례위 상임집행위원장의 개식 선언과 함께 민중의례가 진행됐다.




 '민중의례'라고 하면 10대 또는 학생 운동과 거리가 먼 20대 친구들에겐 생소한 단어로 들릴지 모른다. 엄숙한 영결식에서 조용하고 익숙한 '국민의례'대신 주먹을 쥐고 투쟁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를 부르는 '민중의례'가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학창시절에 했던 국민의례는 1968년 충청남도 교육위원회가 처음 작성하여 보급하기 시작한 것을 1972년 박정희 유신 시절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해서 만든 것이다.


국민적 반대 속에 3선개헌을 강행하고 부정선거로 겨우 김대중에게 이긴 박정희는 당연히도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때 종신집권을 위해 사용한 방법 중 하나가 무조건적인 애국주의 강조다. 일제시대에 강요되었던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매우 비슷하다. 국가가 의롭지 않아도 최고 권력자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국민은 무조건 충성해야 된다는 뜻이다.


72년도에 수정된 국기에 대한 맹세를 자세히 살펴 보면 그 의미를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초기 맹세문)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72년 수정후 2007년 6월까지 사용된 맹세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 이후 수정문)





72년도의 수정문에서 '정의와 진실로서의 충성'이 '몸과 마음을 바치는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바껴있다. 전자는 자신의 양심과 도덕적 판단에 의해 충성을 결정하지만 후자는 맹목적이다. 국가나 최고 권력자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라고 명령하면 그것에 따르는 것이 '진짜 충성'이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점이 불거져 2007년에 일부 문구가 수정되었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을 가지고 있다.


이와 대척점에 있는 '민중의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이유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그 뿌리가 있다. 당시 계엄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숨진 사람 중 시민군 지도자 윤상원이란 이가 있었다. 그를 기리며 백기완(위 사진 중 흰 목도리를 한 사람)이 지은 시가 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된다.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이 가져온 공포를 가장 먼저 깨달은 광주를 기점으로 이 노래는 퍼져나갔고 오늘날의 민중의례가 된 것이다.


이후 민중의 투쟁에서는 당연하게도 '국민의례'의 자리를 '민중의례'가 차지하였고('정의롭지 못한' 국가에는 무조건적인 충성을 할 수 없어 싸우는 사람들이기에)오늘과 같은 영결식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국기에 대한 맹세대신 불리는 것이다. 




       



12시 35분.


이강실·조희주 공동상임장례위원장이 개식사를 낭독했다. 이제 고인대신 우리가 망루를 세워야 할 때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망루말이다.   





건너편의 시민과 전경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어서 고인들의 약력보고와 용산참사 경과보고가 이어졌다





박정희가 칼을 들었을 때 맨주먹으로 박정희와 싸웠고 전두환이 총을 들었을 때 맨주먹으로 전두환과 싸운 남자. 대의를 위해(군정종식을 위해)김대중 김영삼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 남자. 감히 그 누구도 진보와 통일을 입에 담지 못했던 시절부터 겁 없이 그 가치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남자. 티끌만큼이라도 미국을 비판하면 빨갱이가 되는 시절부터 때려도 때려도 제 할말은 다하고 다녔던 남자. 영원한 재야, 80년간 변치않는 아웃사이더, 그 남자가 나왔다.
  
바로  백기완. 




과연 그였다. 단박에 영결식의 절정을 때렸다. 잔잔한 물결처럼 등장했던 그는 이내 성난 파도가 되어 폭풍을 일으켰고 곧 슬픈 물거품이 되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설픈 문학적 수사라 부끄럽지만 나는 그의 조사를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그의 조사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녹음한 조사의 일부를 잘라서 올리니 아래의 팟캐스트를 클릭해 들어 보기 바란다. 글로서는 도저히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제대로 듣지 못한 부분은 X 처리했다. )




 
<파일 11>

"신문 방송에서는 용산참사 그러는데 그말은 사실은 용산 학살입니다. 이명박 정권이 학살한 거거든요.  그러면 정권의 맨 마루(첫째)에 앉아 있는 이명박이가 오늘 이자리에 나와 갖고 '국민 여러분, 제가 그동안 xxx 사람을 이렇게 많이 죽였습니다. 정말로 무릎을 꿇고 사죄합니다.' 그러고 큰절을 올려야 되는거 아니예요? 그렇지 아니하고 부하들만 여기 보내갖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용산에서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을 또 한번 죽이는 겁니다.


며칠전에 언론보도를 보니까 XXX 범죄를 저지른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부자 이건희가 사면복권을 했더라구요. 그런데 용산에서(갑자기 목소리 커짐)아무 죄도 없는 이땅의 선량한 시민을 함부로 학살했으면 그 XXX도 다 없애고 폭도니, 그야말로 얘기해서 테러리스트니 그 따위 개수작을 다 없애고!!! '국민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이러면서 폭도, 테러리스트의 누명을 벗겨야 하는 겁니까.

세번째 죽이는 겁니다. 세번째 죽은 거예요!"




<파일 22>

"이명박씨~. 이 사람 얘기를 듣고 지금이라도 달려와서! 우리 열사들 앞에 무릎을 끓어야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열사들을 땅에 묻는다면서요? 저는 내마음에는 묻겠습니다만은  삽질은 못하겠습니다. 삽질을 해서 묻어야 될 건 누구요!! 이명박입니다!!"  











이제 곧 80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에너지였다. 그는 정말로 분노했고 정말로 슬퍼했다. 태어나서 평생을 한길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단 한번도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79세의 나이에 타인의 아픔에 이렇게 절실히 공감하고 또 분노하는 이가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위키백과를 보면 그의 연설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두가지 나온다. 첫째는 대통령선거 연설 녹화때 단 한번의 중단없이 주어진 시간을 채워 방송국 관계자들을 경탄시킨 일. 두번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팀 정신교육을 위한 강연에서 히딩크 감독이 강한 인상을 받아 '다시 한번 뵙고싶은 분'이라는 말을 들었던 일이다. 눈 앞에서 그의 사자후를 듣고 있노라면 이 일화가 거짓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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