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뭐... 설날이 온다면서요. 같이 떡국이나(울먹이며)먹을라 그랬는데 정말 원통합니다. 정말... 원통합니다."





백기완은 이말을 마지막으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쓸쓸하게 단상에서 내려왔다. 수천명의 시민과 전국의 언론매체가 집중하고 있는 그 순간, 남대문 경찰서 바로 앞에서(서울역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대문 경찰서와 마주보고 있다.)대통령의 이름 석자를 마음대로 부르며 일갈하던 노인이 그렇게 눈시울을 적시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사람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명숙, 용산참사 유가족, 울먹이는 시민, 강기갑, 김근태, 정세균.


개인적으로 김근태를 보면 항상 마음이 짠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몇날 며칠을 분향소 앞, 오직 한자리에 죽치고 앉아 취재했다. 가장 유심히 본 사람은 바로 상주들. 그 중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이가 김근태다.


올해 나이로 64. 그 악명높은 이근안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사람. 얼마나 참혹했으면 고문을 전담하던 사람 중 한명이 몰래 김근태를 찾아와 손을 잡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고문하는 것을 보니 나도 구역질이 날 정도라고. 허위로라도 다 인정하라고, 안 그러면 죽는다고.


김근태는 며칠 후, 또다시 집단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라는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고문의 후유증은 피로가 쌓이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2009년 5월, 마치 한여름처럼 뜨거웠던 그 땡볕 아래, 상주를 하던 그가 손을 떨면서 몸짓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걸 보았다. 추모객들도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김근태에게 들어가 쉬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의 손을 보니 갑자기 그때가 생각났다. 





이어지는 김정환의 조시와 박준의 조가.





각당 대표가 조사를 준비하기 위해 단상 바로 옆에서 대기 중이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다른 당은 국정에 바쁜 모양이다.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진혼무. 

무용가 김미선은 조계사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제 때도 진혼무를 맡았다. 언제부턴가 이런 사람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이익을 받게 되는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어서 각당 대표의 조사가 이어졌다. 4명 모두 한 목소리로 진상규명을 외쳤고 고인들의 넋을 달랬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마지막 노회찬의 조사다. 그는 조사의 끝에서 영결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몇마디를 덧 붙인다. 아래의 음성파일을 클릭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또 한가지. 테러.... 테러를 진압하기 위해 테러진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살인진압 명령에 강제 동원되어 그 참사과정에서 함께 운명하신 특공대원 고 김남훈씨. 돌아가신 열사들과 마찬가지로 무허가건물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특공대원 생활을 하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남훈씨를 만나시거들랑 위로해 주소서. 함께 손을 잡고 보듬어 주소서.

 
  

이 마지막 조사가 용산참사 영결식이 갖는 의미를 순식간에 확장시켰다. 그리고 언론이 만든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결 구도를 깨부수는 순간이었다.(메이저 언론은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을 집요하게 파렴치한 가해자로 몰아갔다.)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으로 누구보다 철거민의 아픔에 공감했을 사람이 고 김남훈 경사였던 것이다. 진압 명령만 아니었다면.


고 김남훈 경사의 부친인 김권찬씨는 원래 이날 서울역 영결식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해자를 경찰로, 피해자를 용산참사 유족으로 대립시키는 일부의 태도가 염려돼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겼다.


원불교당에서 치른 49재 때 돌아가신 다섯 분의 위령제를 함께 올렸듯이 애도를 비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고 했다. “다만, 제 아들은 맡은 일을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고, 철거민 희생자들도 생존권을 위해 (그곳에) 있었을 뿐이고요. 저도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 피해자인데, 저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간할 수 없습니다.”

(한겨레 1.10일자 사회기사 참조.)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고 김남훈 경사, 양쪽을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철저하게 필요한 이유다. 


덧붙이자면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진압군으로 참여한 이들 중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후유중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 중엔 20년이 넘게 전국의 정신병원을 돌아다니는 이도 있다. 그 모습을 견디다 못한 부친이 홧병으로 세상을 뜨고 일가족이 병시중을 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을 해야할 사람들은 아직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호의호식하고 있다. 용산참사의 진실도 결국 그렇게 끝날까 무섭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상식처럼 굳어 버릴까 나는 겁이 난다.



마지막 조사를 맡은 배은심 전국민족 민주유가족협의회 회장.


1987년 민주화운동 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여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람이 있었다. 지금의 10대들에겐 그저 전설같이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 바로 이한열. 배은심이 바로 그의 어머니다.  


아들이 저 세상으로 간지 20년이 넘었건만 그녀는 오늘도 부르튼 입술에 핏자국을 남긴 채 한겨울 단상 위에 섰다. 

 



용산참사 유가족 인사.


고 이상림의 부인인 전재숙은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모두가 함께 해줘서. 


그녀의 막내 아들인 이충연은 감옥에서 나와 처음으로 아버지의 영전에 절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가 망루에 올라갔을 때 그녀의 부인인 정영신은 마지막 통화에서 다치지 말고 그냥 내려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래도 (경찰이)한번은 이야기를 하게 해줄거라고, 한번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거라고 말했다.


물론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그날 부친을 떠나 보내야했다.


"우리는 갈데가 없다고. 우리는 할 줄 아는게 없다고. 돈도 필요 없으니 우리 그냥 장사하게 해주면 안돼냐고." (한겨레 정연신 인터뷰 참조) 그는 단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영결식의 마지막 조가를 부른 안치환>



언론에서는 마치 다 해결된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실질적으로 '사망한 이들'의 보상금 외엔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농성자들은 생존권 보장은 커녕, 언론에 의해 파렴치범이 된 채 보살펴야할 가족과 떨어져 수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메이저 언론은 유가족이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와 아픔은 뒤로 한채 보상금 기사를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게 유도한다. 그리고 그 보상금은 그들의 죽음에 비해 훨씬 큰돈이며 그들은 결국 돈을 노렸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게 만들어 독자들을 현혹시킨다.


결국 사람들의 눈에는 억대의 보상금이라는 숫자만 보인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결단력을 발휘했고 유가족들도 뜻한 바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두가 그 돈이 많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 보상금이 자기 세금에서 나가는 줄 알고 화를 낸다.(보상금은 재개발 조합측이 부담한다.)


사람들은 그 보상금보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배의 이득을 얻어낼 곳이 어딘지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다. 메이저 언론이 아예 그런 생각의 씨앗조차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사람의 목숨에 매겨진 돈은 많다고 생각한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일부가 아무도 자기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가입했다던 전철연은 천하의 죽일놈이 되었다. 과격 폭력시위를 하는 전문꾼들이며 자신들은 호화주택에 살고 건수만 있으면 몰려가 데모를 하고 돈을 받아내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메이저 언론은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입장도 단 한번도 기사로 실어 주지 않았다. 아예 겉치레 중립마저도 포기한 것일까. 


아래에 한겨레 21의 “폭력투쟁? 이웃의 죽음을 모욕 말라” [2009.02.06 제746호]  남경남 전철연 의장의 인터뷰 일부를 싣는다. 전문을 읽고 싶으면 링크를 따라가 보기 바란다. 그들이 정말 철거민들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악마에 떼돈을 벌어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인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적어도 메이저 언론이라면 어느정도 공평한 정보를 독자에게 던져주고 판단하게 하는 것이 예의다.



- 공안당국이 시민·사회운동을 탄압할 때는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것 외에도 단체 관련자의 부정·비리·추문을 들춰내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 전철련과 남 의장에 대해서도 검찰은 관련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 어느 신문을 보니 내가 땅을 몇 평씩 마련해서 ‘알박기’를 해 부당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도했더라. 내가 무슨 땅투기라도 한 것처럼 의혹을 제기해놓았다.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다. 빈민운동을 못하도록 빈민운동가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거액을 챙겼다느니 호화 주택에 산다느니 하는 악담을 하는데, 차라리 그랬다면 내 가족에게 덜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집은 공시지가로 6100만원이 안 되는 그야말로 작은 집이다. 이 집은 70년대에 지은 집이어서 지금도 방에 난로를 피우고 지낼 정도다. 나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성실하게 노력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점이 늘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전철련의 주장, 전철연의 요구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나와 전철련을 공격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할 정도로 일부 언론과 정부의 처지가 곤궁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 상근 활동가들은 얼마씩 받나.

= 내가 한 달에 50만원을 받는다. 그거 받으면서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다. 사무국장이 40만원, 총무국장이 20만원 정도 받는다. 다른 임원들은 5만원, 10만원 정도씩 받는다. 나만 해도 2007년까지 한 달에 30만원씩 받았다.

(활동비 이야기를 꺼내자 곁에 있던 전철련 관계자들이 한숨을 내쉬며 멋쩍게 웃었다.)


- 그 정도의 돈으로는 생계는커녕 활동비도 안 될 텐데.

= 물론 생계 해결이 안 되는데, 아내가 식당에서 일하면서 나한테 자장면값 정도를 더 쥐어준다. 한 달에 40만~60만원씩 버는 것 같다. 그런데 아내도 나이가 드니까 누가 써주지 않아 일거리가 없다. 지금은 딸자식의 벌이에 기대서 해결하고 있다.








장례음악 공연팀 “향”의 연주가 진행되는 가운데 분향 및 헌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떠나 보내야 할 시간.




울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영결식 내내 꿋꿋한 모습을 보여줬던 유가족들은 지인들이 그들을 안아주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너무나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고 이성수의 부인인 권명숙은 한 지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는 한참이나 아기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장례를 치르기까지 355일. 355일 동안 그들은 무엇을 보았으며 무슨 꿈을 꾸었을까.


약 1년전, 그러니까 2009년 1월 23일. 유가족들은 똑같이 이 자리에 모여 호소했다. 기자님들, 제발 양심을 찾으라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당신들은 우리를 두번 죽이고 있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실 뿐이라고. 우리를 도와달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을 알려고 투자하는 단 5분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큰 힘이며 의지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또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한다.




고 윤용현, 고 양회성, 고 이상림, 고 한대성, 고 이성수, 고 김남훈.


...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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