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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전쟁의 뒤편(2) - 그런 것도 못하는 국가가 무슨 놈의 국가입니까.


2010. 07. 07. 수요일

죽지 않는 돌고래

 

 

전쟁의 뒤편(1), 아군을 죽인 아군 - 1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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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표인용 : 경향신문 - 민간인 학살,  미완의 진실규명과 해원

 

 

전후(戰後)의 삼엄한 냉전 분위기 속, 그들은 피눈물을 머금고 친족의 억울한 죽음을 삼켜야 했다. 아군이나 미군의 학살에 대해 입만 뻥긋했다간 빨갱이로 몰려 고문이나 감옥행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년을 기다려서 '4.19혁명'이라는 기회가 왔다. 이런 류의 범죄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규명이 어렵고 십수년이 지나가면 사실파악조차 힘들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음에도(1960년) '전국피학살자유족회'가 정부에 보고한 학살의 규모는 113만명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나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민간인들이 거짓말을 꾸며 학살의 규모를 늘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신고하지 못한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규모였다. 

 

 

 

<사진인용 : 오마이뉴스 - 2009년 9월 30일,

이상길 교수가 발굴된 유해를 설명하는 모습> 
 

그들의 억울함을 밝혀 줄 핏줄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 없다. 10살 때, 바닷가에 수장당한 어머니의 아들이 이제는 환갑, 20살 때 아버지의 총살을 목격한 딸이 이제는 팔순이다. 

 

유족 2대, 3대, 4대... 대를 거듭할 수록 정권과 세상에 환멸을 느낀 유족들은 진상규명의 의지를 잃어간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마저 모두 떠나버린다면,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불편한 세력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는다면, 이 억울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 혹은 '반동세력에 의해 조작된 허구'로 이땅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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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시작 시간인 오후 3시. 국회 도서관 소회의실이 빈틈없이 채워졌다.

 

 

 

국민의례가 이어진다. 조국과 권력의 이름 아래 가족이 학살당했음에도 이들의 모임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가 빠지지 않는다. 지난 60년간, 누군가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죄라면 이승만 정권 하에서 학살당했다는 것 뿐이다. 아군인 줄 알았던 미군에게 살해당했을 뿐이다. 열심히 밭을 메다가 경찰이 불러 갔더니 생매장을 시켰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미군의 기관총에 맞았을 뿐이다.

 

그 이유 하나로 평생을, 아니 대를 거쳐 빨갱이로 살아야 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평생 직장에서 거절 당했다. 좋은 학벌과 실력을 가지고도 공무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심지어 이혼까지 당한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이 언제나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빼놓지 않는다. 

 

세금을 횡령하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아야만 애국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을 지지해야만 애국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친일파에 관대하고 독재자를 옹호해야만 애국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까.

 

빨갱이와 애국자를 가리는 기준이 궁금하다.

 

 

 

 
국회 독도영토수호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강창일. 제주시 갑 국회의원이자 오늘 행사의 주최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각 지역에서 온 대표 및 국회의원들을 소개하고 개회사를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유해발굴 사업, 추모사업등이 지지부진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도대체 이일을 어떻게 해야하나고 한탄하며 던진 한마디가 의미심장하다.

 

'그러니까 대통령을 잘 뽑으셨어야죠. 결국 이렇게 됐지 않습니까. 역사가.'

 

 


전 제주시장이자 현재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김영훈. 

 

오늘의 토론회가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재영 국회부의장. 세계전쟁사를 살펴 봤을 때,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자가 훨씬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 6.25 때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고 처절하다고 했다. 

 

사실, 보복차원에서 혹은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까지 합치면 피학살자의 수는 2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한겨레 사설 인용 : 민간인 학살, 이제 시민이 말해야 한다)

 

 
김영진 의원은 국회의원들이 언론에 각광받는 사건에만 관심을  쏟고 아픔과 한의 절규에 찬 사람들을 외면하는 현실에 씁쓸해 했다.

 

  

 

전 법무부장관, 천정배 의원이 말을 이었다.

 

'과거에 우리에겐 비정상적인 특별한 시기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일제시대가 있었고 또 한국전쟁과 같은 참혹한 전쟁의 시기가 있었고 또 그 이후에 군사독재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습니다. 

 

바로 한국전쟁 때 희생당한 분들이 그런 분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나라가 민주화됐고 정상화됐는데, 국가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상을 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할 최소한도의 도덕적임무입니다. 그런 것도 못하는 국가가 무슨 놈의 국가입니까.'

 

천정배 의원은 참여정부의 4대개혁입법(참여정부 당시, 문제점이 있는 네 가지 법안을 반드시 개혁하겠다고 거론한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대상은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이다.)중, 과거사진상규명법의 입법 활동을 펼치며 위와 같은 정신과 신념을 가지고 추진했다고 말했다.

 

'그런 것도 못하는 국가가 무슨 놈의 국가입니까.' 라는 부분에서 박수가 터졌다. 

 

 

천정배 의원의 말을 인용하자면 당시 협상파트너인 한나라당 원내대표 김덕룡 의원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그때는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었지만 지금의 이명박 정권처럼 야당을 무시하지 않고 합의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2004년 12월 30일, 양당 원내대표끼리(천정배, 김덕룡)이 법에 대한 합의서까지 썼다. 하지만 다음 날인 12월 31일, 국회에 본회의가 열렸을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여야간의 합의를 깨고 느닷없이 폭력으로 단상을 점령했다.  

 

과거사법('과거사법'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의 약칭이다.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적 통치시대에 이르기까지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공권력의 행사 등으로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국민의 화해와 통합을 이룩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이다.)을 강력히 반대하던 사람들은 당시 한나라당의 당대표를 하고 있었던 박모의원(천정배 의원은 '그녀'를 이렇게 표현했다.)을 필두로 한 세력이었다고 한다. 이 법이 통과되면 입지가 흔들리는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저는 그 순간부터 그런 세력들이 이 나라의 책임을 맡아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천정배 의원은 '우리가 조금 더 잘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정권을 재창줄 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민주당이 확실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서 죄송하다. 변화하고 쇄신하겠다'며 반성의 말을 덧붙였다.

 

 

이낙연 의원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 과거사 진상규명에 관한 일들이 얼마나 급격한 변화를 맞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이 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할 수 있는 명쾌한 요약이었다.

 

'2007년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했고 이명박씨가 당선되었습니다. 그 이듬해, 2008년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는데 압도적인 의석을 한나라당이 차지했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008년 4월에 한나라당이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뒤에 시도한 일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 정리를 빨리 흐지부지하게 만들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맨 처음 착수한 일은,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관한 일입니다. 그중에는 오늘 여러분이 다루실 한국 전쟁기의 민간인 학살 사건 해결 문제도 있고 일제 강점기 때의 진상규명과 사후대책에 관한 그런 위원회도 있습니다. 이걸 뭉뚱그려서 과거사 정리 위원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과거사 정리 위원회 통폐합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런 기구를 관장하던 국회위원회가 행정안전위원회인데, 행정안전위원회에 속했던 신아무개 의원(신지호다.)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의원입니다만, 그분이 대표가 되서 과거사정리위원회 통폐합 법안을 내놓습니다.

 


그 무렵에 동경을 갔습니다. 일본 민주당, 그러니까 당시엔 야당이었지요. 일본 민주당에 있는 제 친구 국회의원인 아이치현의 곤도 쇼이치라던가 이런 친구들이 저 좀 만나자 그러더군요. 그리고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 이거 막아달라.>고 저한테 부탁했습니다.

 

참 고맙죠. 고마운데 부끄러운 거예요. 왜 그러냐고 물어 봤더니 <이건 일본으로서도 더 이상 기회가 없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스스로 과거사를 정리해주면 일본이 짐을 내려 놓는 건데, 이걸 가다가 갑자기 중단해 버리면 다시 일본은 과거사의 짐을 지게 될 것 아니냐, 해결될 때까지 통폐합을 막아달라. 그것이 일본으로서도  편하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좀처럼 먹히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 있는 한국 대사가 일본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이거 심상치 않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결국 일본에 있는 권철현 대사가 한국 정부한테 <통폐합 무리하게 하지 마시오.> 이렇게 편지를 보내서 다행히 흐지부지 됐습니다.

 

지금은 또 어떤 식으로 하고 있냐면, 아시다시피, 활동시한이 끝나면 자연사하게끔 내버려 두는  전략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사가 들춰지는 것이 내키지 않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낙연 의원의 발언을 끝으로 행사의 1부인 개회사와 축사가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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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안병욱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은 '
정원이 꽉찬 보트가 중간 단계까지 왔는데 다른 배에 탄 사람까지 몽땅 태운다는 발상'이다. 고로 배가 침몰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고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자는데 '편의와 효율을 위해 통폐합을 하자'는 발상은 너무나 유치하고 천박하다. 다행히 통폐합은 무산됐지만 그런 당장의 편의와 효율만을 생각하는 사고가 결국엔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는 논리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이 통폐합의 분위기를 조성할 무렵, 15개 일본 시민단체 대표단이 방한했다. 여야4개 정당을 방문하며 통폐합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본래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해야하는 업무를 대신 수행하고 있으니 통폐합을 해서 진상조사에 차질을 빚는 일은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나라당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트위터 : kimchangkyu

 

3편에 계속

편집국정치부국회담당 죽지않는돌고래 (tokyo1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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