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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직장 생활을 돌아 보았다.

딴지일보는 출퇴근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곳 중, 유일하게 근무하고 싶었던 직장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한 딴지일보는 내가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 바로 그 자체였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현재의 구글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10대, 20대 초중반에게는 딱히 이거다라는 느낌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딴지키드 1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들에게 딴지일보는 전율이었다. 한국의 천재와 괴짜들을 모두 모아 한 공간에 압축시켜 둔 느낌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조부의 영향도 컸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는 그는 단순한 엘리트가 아니었다. 내가 이 세상을 눈곱만큼이라도 날카롭게 관찰하는 능력이 있다면, 내가 역사를 조금이라도 큼직하게 바라 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일백프로 그의 피가 섞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조부가 껄껄 웃으며, 게다가 손님들이 올 때마다 추천했던 책이 딴지일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60이 넘은 노인이 그리 즐겁게 웃으며 책을 추천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당시 집안에 오는 손님들은 학식과 사회적 지위에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이었다. 

딴지일보의 풍자 글은 정치나 역사를 깊이 알 수록 웃음이 큰 글이었다. 조사 하나까지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고 때때로 방대한 지식을 연결해 나가는 과정이 탄성을 지를만 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선배들의 센스와 집념은 특출난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누구보다 냉철했던 조부가 그리 즐겁게 웃지는 못했을 것이다. 딴지일보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이런 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듯하다.

그래서 두번 지원했고 두번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공채 1기, 그러니까 가장 순도가 높았던 괴짜와 천재의 시대에 수석으로 입사한 이가(사실 수석인지는 모른다. 왠지 있어보여서 그렇게 적었다.)김용석 편집장이다. 알고보니 필독형도 그때 떨어졌다고 한다. 신짱형은 공채1기로 알고 있다. 

당시 나는 학교를 자퇴하고 걸레질부터 하겠으니 입사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 당시는 진심이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아니, 돈을 줄테니 글만 쓰게 해달라는 사람들로 넘치는 시절이었다. 우연히 문서를 정리하다 본 불합격 이력서 중엔 사법고시 합격생도 있었다. (그 이력서는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난 최소한 고시 합격생보다는 잘났구나라는 '정신승리'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 딴지일보를, 불합격 10년 후에 몇번의 설득을 받아가며 들어가게 됐으니(내가 잘난 탓이 가장 크지만)주제 넘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이 점에 대해선 편집장님에게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인생에 다시 없는 좋은 씨앗을 뿌린 날이다. 




 

<2편 예고 두둥>

 

'딴지天下, 솔밭의 형세' 

 

3편 총수 김어준

 

4편 대장 너부리

 

5편 선배 필독

 

6편 쿠데타....

 

등으로 마음대로 이름 지었는데 언제나 처럼 쓸지는 모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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