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록: "나의 호랑이"란 그림책엔 도대체 어떤 심리학적 요소가 있는 걸까 2020.09.24
1.
그림책이란 장르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다. 허나 자식이란 요망한 녀석이 생기면 그림책을 보기 마련, 누구나 낭독 노동자가 되어 노예와 같은 중노동의 삶을 살기 마련이다.
2.
인생의 3대 쾌락 중 하나는 느긋이 누워, 쿠팡보다 빠른 속도로 세상의 천재와 전문가, 성숙한 자들을 거실 소파로 불러들여 피와 뼈로 깎아 만든 생각을 헐값에 먹어치우는 양아치짓을 하는 것인데(줄여말해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는 거지요) 넨장, 이 녀석 때문에 점점 내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든다.
더 큰 문제는 30개월 차 아이가 볼 수 있는 책 수준이란 게 드릅게 재미없다. 헌데, 어제와 오늘, 심리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반응을 보인 그림책이 있다.
3.
퇴근 길에 그림책을 들고 갔다. 월천상회에서 출판한 네델란드 작가 얀 유테의 작품으로 제목은 “나의 호랑이”다.
하루는 30개월 차라 글을 모른다. 대략 본인이 좋아하는 자동차나 요리 그림이 나오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어라.
이 책은 진지하게, 탐독한다. 30개월 차 아이에게 진지하다, 탐독한다, 라는 표현을 써도 무리가 없는 표정이 첫 번째로 놀란 점이다.
4.
책에는 조세핀과 우연히 만나 즐거운 한 때를 보낸 호랑이가 향수병에 걸려, 어두컴컴한 거실에 몸을 뉘인 장면이 있다. 책을 보다 이 장면만 6번이나 다시 돌아가 호랑이가 뭐하는지 물어본다. 곧, 생각에 잠긴다.
나는 애가 좀 모자라 호랑이의 무늬가 옅어지고 톤이 어두워져 같은 호랑이인 줄 모르나 했다. 호랑이의 마음이 아프다 설명했는데, 30개월이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리 없다. 그럼에도 유심하고 진지하게 보는 게 두 번째 놀라운 점이다.
결국 나의 호랑이를 다 보더니 그 나이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호랑이 책 안 볼 거야’를 3, 4번 반복한다.
녀석은 창가로 가더니 제법 긴 시간 동안 무거운 표정으로 밖을 바라본다. 나는 ‘땅콩만한 녀석이 개폼 잡기는’ 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책을 보여주면서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그야말로 묘했다.
5.
다음날,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호랑이는? 호랑이는? 하고 묻더니 다시 “호랑이 책 안 볼 거야”, 라 말한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도 머리 속에 잊혀지지 않는구나 했다.
잠시 후, 아침을 먹으며 뜬금없이 “이제 호랑이랑 친해졌어” 하더니 나의 호랑이를 몇 번이나 본다. 특히 호랑이가 향수병에 걸린 장면은 몇 번이나 본다.
책의 후반부, 조세핀은 호랑이의 향수병을 달래주기 위해 함께 배를 타고 가 정글로 떠나보낸다. 이후,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시간을 보내다 길고양이를 다시 키우는데, 이 부분도 몇 번이나 다시 본다.
자식이라도 그 속엔 들어갈 순 없는 법이라 무어라 설명할 수 없으나 고양이를 다시 키우는 부분에서 마음을 회복하는 듯하다.
6.
나는 무딘데다 예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대부분 글에서 느낄 뿐, 그림이나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는 평균적인 감수성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후지다.
이 그림책에 무엇이 있길래 며칠동안 호랑이를 맴돌게 하는지 나로선 영영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이러다 머리가 크면 섬세한 마음을 아는 엄마만 좋아하고 무딘 아빠는 싫어, 라고 할 게 뻔하니 그때는 어릴 때부터 책으로 연마한 북두신권의 힘을 보여줄 수밖에 없겠다.
2020. 0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