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만감일기 - 8점
박노자 지음/인물과사상사



일마 전에 박노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이 정권은 '잘사는 북한형 사회'를 만들려는 것 아닌가 하고. 무릎을 쳤다. 단 한마디로 핵심을 찌르는 것도 모라자 모든 것을 설명해 버린다.  

박노자가 쓴 책은 봐줘야 한다. 왜? 박노자가 썼으니까.   





37. 박노자의 만감일기 / 박노자 / 인물과 사상사

 

 이시가와의 『로마자 일기』는 부인이 알아보지 못하게 일부러 로마자로 적은 데다가 성관계의 묘사가 하도 노골적이라 1970년대에 와서야 그 전문이 공개되었다. 『로마자 일기』로 대표되는 통상의 일기란 말 그대로 남들이 보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서 쓰는 자기와의 대화다. 그러나 이번에 책으로 내게 된 『만감일기』는 좀 다르다. 인터넷, 블로그에 쓰는 일기인 탓에, ‘자신과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상당히 의도적인 남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이건희의 명예철학박사 수여 반대시위로 찍혔다가 나중에 보직교수 몇 명을 억류했다는 이유로 출교라는, 대학사회에서의 사형을 받은 일곱 명의 고려대 학생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입학기록까지 말소되어 입학 사실 자체가 백지화되는 출교를 당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사회는 벌써 이 문제를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우리는 남의 아픔을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다.

 

 

 경제력을 독점한 남성이, 경제력이 결여된 여성에게 경제력을 무기로 폭력을 휘두르는 게 성매매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 구매는 경제력에 의한 강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성욕을 돈으로충족하는 사람들은 경제력에 의한 강간을 오랜 기간 당해온 여성의 심신이 과연 어떨지 생각이나 할까? 점점 변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과 일본의 남성 문화에서 경제력에 의한 강간이 당연시되는 건 대단히 놀랍고 경악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의 폭력성에 무감각해서 그런가? 차라리 스웨덴처럼, 법적인 혼인관계와 무관하게 좋아하는 사람과 자보는 것에 별다는 죄의식을 갖지 않으면서도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여 감옥에 보내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섹스처럼 아름다운 것을 매매하는 게 인신을 매매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서구 젊은이들이 마약중독에 빠지는 현상과 유사하게 한국에선 게임중독이 퍼졌다. 국가와 자본으로선 참 좋은 일이다. 마약중독이 대중화되면 범죄 문제 등이 생기는데 게임중독은 1조 원 이상의 게임시장을 유지시키면서도 어떤 가시적인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 말이다. 10여만 명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PC방에서 게임으로 자기 인생을 망가뜨리고 게임 안 하곤 못사는 정신적 불구자가 돼도 그건 국가와 자본의 관심 밖의 일이다.

 

 

 검찰청의 검사들이 세계문학을 얼마나 읽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을 주된 화두로 삼아온 일본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책을 보면 성적 표현의 노골성이 마 교수보다 한 수 위다. 그런데 다니자키는 1910~50년대 일본 문단에서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특히 1945년 이후엔 거성’ ‘문단 원로로 매우 높이 대접받으며 독자들의 대단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똑같이 성을 화두로 문학을 한 마광수 교수는 대한민국 인텔리 집단의 낙오자가 되었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보다 더 높은 4% 비율을 성매매 산업이 차지하는 나라에서 마광수 교수가 독자들의 순결함을 모독했다는 무서운 죄악으로 잡혀갔을 때 대한민국의 다수 지식인들은 왜 그렇게 태연했을까? 이문열이 마광수 교수가 교수 직함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망발을 했을 때 왜 이문열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을까? 그냥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취미대로 살아온 것일 뿐인데 그 정도의 도전도 대한민국은 용서하지 않는다. 게다가 마 교수가 학생들을 평등한 인간으로 대하고 스승님으로서 폼 잡지 않은 것도 추가적인 괘씸죄에 걸렸을 것이다. 쓸쓸한 이야기다.

 개인의 내면세계에선 성적 판타지, 성적 상상력 등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그것들은 매우 당연한 것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인정하며 사는 게 가장 현명할 터인데, 결국 마 교수는 난 손톱이 긴 여자가 좋다는 식의 커밍아웃으로 왕따가 되고 말았다. 성욕의 개인적인 형태들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큰 반지성적 범죄인가? 내가 보기에 성욕은 소유욕과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욕망이다. 성욕은 결국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것이고 의 경계를 넘게 하는 어떤 초월성을 내포하지만 자아 지향적 소유욕은 파괴욕망으로 연결되기가 쉽다. 성에 대한 억압은 곧 권위주의·극단·폭력으로 이어진다고 라이히가 이야기한 지 벌써 70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그걸 알고도 그 악순환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현대 한국의 제대로 된 역사가 미래에 쓰이게 되면 외로운 개인 마광수의 개인 독립전쟁이 대서특필될 듯하다.

 

 

 자본주의의 합리화 논리 중 가장 보편적이며 위험한 것은 바로 현존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인간의 본성으로 귀속시키는 식의 옹호론이다. 그러한 논리에서는 이윤 추구 활동이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소유욕의 당연한 표현이 되고, 전쟁이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공격성의 표현이 되며, 스포츠가 서로 겨루고 경쟁하고 싶은 인간 본성의 표현이 된다. 이 논리는 성악설의 일종인데 순자나 한비자에 비해 훨씬 야비하다. 자본주의적인 본성론에서 인간의 본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틀에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 직장 규율에 복종하면서 소비를 즐기려는 의욕이 흘러넘치고, 공격성이 강해 축구 월드컵 같은 대리전쟁을 통해서만 그 배설이 가능하고······. 사실, 사회의 부조리한 점들을 하늘의 도리’ ‘자연질서에 가탁 하는 방법 그 자체는 별로 새롭지도 않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입장에선 노비가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도 하늘의 도리’ ‘인간에게 내재돼 있는 주인의 은덕에 대한 보답의 마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어떤 본성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상황에서 자본주의 옹호론적 본성론이 이렇게 널리 퍼져있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 생각 안 하려고 그게 인간이야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인지 그렇게 주입된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정말 소유욕이 내재돼 있는 동물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인간 집단들(예컨대 호주 원주민)은 소유도 소유욕도 없었기 때문에 역경을 연대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영국 정착민들의 양을 잡아 구워먹었다가 도둑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그들에겐, 한 인간이 뭔가를 소유하고 그걸 남에게 안 줄 수 있다는 것, 물건 때문에 다른 인간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었다. 일제 초기의 조선 농민들도 마찬가지다. 대대로 이용해온 마을의 임야가 왜 소유가 돼야 하는지, 왜 지권을 가져다 면서기에게 제출해야 되는지 도저히 납득을 못했기 때문에 토지조사때 강탈당한 게 아닌가? 인류의 절반 정도가, 무소유를 주장했던 예수와 붓다를 공경하는 것만 봐도 소유욕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게 아니고 역사적으로 발전·정서화된 하나의 허위의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공격성도 그렇다. 미국의 초기 정착민들이 본 인디언 마을의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착했단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가 가혹했던 영국 마을들과 달리 서로 싸움을 안했다는 것이다. 역시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카리브해 섬의 원주민들은 거의 그때까지 무력 갈등이란 걸 겪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몇십 년도 안 가서 유럽인들에게 몰살당하고 말았다.

 계급사회의 원리는 그 자체로 인간의 연대 지향을 파괴하며 나아가 인간을 매우 인위적으로 원자화시킨다. 때문에 개체들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늘 가혹 스포츠 같은 것이 제공되곤 한다. 이종격투기를 보라. 칼이 없어서 그렇지, 로마의 검투사와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계급사회는 2,000년 전의 야만을 되살릴 만큼 퇴영적이지만 그건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다.

 실제로 폭력은 물론 경쟁도 별로 안 보이는 스포츠들을 동아시아 역사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주나라 때 성행했던 활쏘기나 투호는 이기고 지는 것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공자가 활쏘기를 두고 군자가 서로 힘 겨루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조선 시골에서 씨름 한 판 벌일 때만 해도 승부보다 그냥 서로 어울리는 게 중요하지 않았는가. 나는 도저히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볼 수 없다.

 

 

삼성그룹의 이학수가 신영복 교수와 잠깐이라도 따뜻해 보이는 대화를 나눈다 치자. 이 대화장면이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잡히면, 이 장면은 벌써 삼성이라는 무노조조직의 비정상성을 약간이라도 덮어두고삼성에게 사실상 없는 인간적인모습을 만드는 데에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다. 삼성은 부러움의 대상이 돼도 존경의 대상이 되기 힘들고, 신영복 선생을 부러워할 사람은 없어도 존경할 사람은(나를 포함해서) 많다. 결국 이 땅의 삼성들은 이 땅의 신영복들을 이용하려고 늘 애쓰게 돼 있다.

 

 

 어제 영문 일간지에서 대학도 아닌 학원가에서 흑인 강사들이 당하는 차별에 대한 기사를 읽고서 거의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한국 법체계에 아직 인종차별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인지 한원가에서 강사직을 구하겠다는 흑인에게 죄송하지만, 우리 학부모들이 백인을 선호한다” “참 미안한데, 우리는 백인을 찾는다라고 대답해도 무방한 모양이다. 3년 전에 내 아내가 여기 오슬로에서 구직운동을 했을 때 누군가 동양인이니까 서양음악을 어떻게 가르치겠느냐라고 하기만 했다면 소송을 제기하여 아주 큰돈을 벌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곳 노르웨이에서 공석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거의 공인으로서의 자살에 가까운 행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흑인이니까……”가 아직 통하나 보다. 밖에 나가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 있는 분이면, 그 흑인 구직자들이 한국 학원가에서 이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뭘 느꼈을지 잘 알 것이다. 아니, “조센징데스가라(조선인이라서……)”를 듣고 괴로워했던 식민지 피해자의 자손들이 왜 꼭 그렇게 옛날 주인들의 행세를 흉내내려 할까?

 인종차별이란 인륜에 거역하는 잔혹 행위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바보짓이기도 하다. 40년 후에는, 소위 백인들은 미국에서 소수자 신세가 될 것이고, 100년 후라면 이 지구를 지배할 언어는 어쩌면 중국어와 에스파냐어일지도 모른다. 지금 백인을 우월시하는 것은, 사실상 조선 말기에 만동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난리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거의 고정관념 속에서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노르웨이에서는 육아 첫 단계의 비용을 국가에서 지불한다. 직장이 없는 여성의 경우 목돈으로 3 2,000 크로네, 우리 돈으로 약 500만 원을 받고, 직장이 있는 여성은 유급 휴가와 보조금을 받는다. 당시 직장이 없었던 아내는 노르웨이 시민이 아님은 물론 영주권조차 없었지만, 그 돈을 다 받았다.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여유있게 아이를 위한 모든 것들을 다 장만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출산하는 주부들에게 500만 원의 보조비를 주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사실, 나는 국민 1인당 소득 2만 달러보다 산모 1인당 보조금 500만 원 시대라는  구호가 훨씬 더 구미가 당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안타깝게도 개인 복지사회가 아니라 건설기업, 재벌기업의 복지사회다. 이명박 같은 이가 대통령이 되면 대운하라는 건설업체 복지 프로젝트로 건설 쪽 주식을 대폭 올리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복지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원래 저산인 노르웨이의 출산율이 거의 1.8에 달하는 반면, 원래 다산이었던 한국의 출산율은 현재 1.1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명박 류의 정객들은 건설 경기는 살릴지언정 결국 그들의 잉여가치 수취과정의 원천인 노동력 재생산 과정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할 모양이다. 물론 지금까지 보건복지부가 의료급여를 가져다가 하는 꼴을 봐서는 노무현 정부도 나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노르웨이 생활이 한국 생활에 비해 좀 안락한 구석이 있다면 그건 무의미한 국민 총소득의 통계가 아니라 내가 사회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며 어떤 불운이 닥치더라도 사회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여기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복지가 포함돼 있다. 단순히 평균 연금이나 실업 수당이 얼마인가와는 차원이 좀 다른 이야기다. 가령 내가 자동차에 치여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몸이 되더라도 다른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늘 배려를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고, ‘병신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가족이고 동창이고 연고있는 사람들이 다 챙겨주겠지만 내성적 성격 때문에 연고를 안고 살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차라리 공동체가 챙겨주는 형태의 생활이 더 편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또 나중에 학교에도 보내야겠지만 적어도 선생님으로부터 손찌검이나 모독적인 야단 소리를 안 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 그것이 어떤 숫자 놀이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설령 숫자 놀이를 계속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방식은 곤란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은 그리스( 1 8,000달러)와 비슷한데, 그리스는 한국과 달리 대학교까지 무상 교육이지 않은가? 노르웨이처럼 석유 부자가 아니어도 서민마다 좀 행복해질 수 있는 구조로 충분히 갈 수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보수 정객들에게는 그것을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데에 있지만.

 

 

 소련시절 말기, 중·고교시절을 보내는 동안 나는 부모님과 함께 거의 매 여름마다 당시 소련의 속지 격이었던 리투아니아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때는 별로 신경 안 썼으나 지금에 와서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내가 그때 리투아니아를 단골로 왕래하면서도 인사말 이외에 리투아니아어를 배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저쪽에서 소련의 공식 민족 간 소통의 언어인 러시아어를 하겠지 싶었고, 가끔 버스 운전기사나 상점의 판매원이 러어 인사에 이해 못한다(nesuprantu)’라고 답할 때면 그들을 놀란 눈으로 째려보곤 했었다. 아니, ‘민족 간 소통의 언어를 모른다니 무슨 반소 감정 때문에 일부러 이러는가 싶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러한 단어도 몰랐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일본어를 모른다고 답했던 조선인들에게 화를 벌컥 냈던 강점기의 내지 손님일본인들과 똑 같은……. 어릴 때부터 식민모국, 패권 국가의 언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는, 아무리 본인이 진보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오만이 자리 잡기 쉽다. 불평등한 세계 질서 속에서 무의식화된 안락한 위치에 대한 우월감이란 아주 끈질긴 것이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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