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토시형과 나는 맛집 찾아다니는 걸 즐긴다. 다른 이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싸고' 맛있어여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레스토랑 점장 출신의 사토시형에게 꽤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형은 과거의 직업 탓인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머릿 속에서 원가가 계산 된단다.(반사적으로) 하여 아무리 맛있다 해도 무시무시한 영수증을 주는 식당을 곱게 보지 않는다. 그의 지론은 가격 대비 맛의 비율이 누구나 납득 가능하고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


다만 오늘은 평소 지론과 조금 다른 식당을 찾았다. 이런 의외의 경우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할 때나 우리가 계산을 하지 않을 때.
 
오늘은 후자다. 


2.  
 



63빌딩 58층의 고급 일식집 슈치쿠. 1인분에 21만원하는 카이세키 요리(키쿠 코스)다.

(http://www.63restaurant.co.kr/home/63RESTAURANT/wako/introduction.jsp 홈페이지에 가면 메뉴를 모두 볼 수 있다.)제목에 25만원이라고 적은 건 세금이랑 봉사료를 포함하니 정확히 1인분에 254,100원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포스트는 이 정도 가격이면 어떤 요리가 나올까 호기심을 가지는 이들을 위한 마음이 0.3%, '나 이런 거 먹었지롱!' 하는 찌질한 자랑이 99.7%인 점을 밝혀둔다.  

만날 비싼 거 먹는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블로그에 올릴 이유가 없지만 나는 아니니까 자랑한다. 

다만 평가는 날카롭게.
   


2.




슈치쿠로 검색하면 내부 인테리어는 꽤 많이 나오므로 생략. 룸 사진은 나와 있지 않은 듯한데 이런 분위기다. 전반적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에 셋팅이 단출하여 여백의 미를 준다. 야경도 맛을 더하는 요소다. 나는 편하게 츄리닝 차림으로 나섰는데 형이 그지쉐키라고 쫒아낼 확률이 있다 하여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5천원짜리 양복으로 갈아탔다.


젓가락, 탐난다. 일반 나무 젓가락 보다 얄쌍하게 잘 빠졌다. 차받침은 냄새로 보아 히노끼 나무로 만든 듯하다. 과연 고급 일식집.

처음에 호우지차가 나왔는데 녹차를 불에 볶은 차다. 일본에서 형과 자주 놀러가는 산장에서 잘 나오는 차인데다 형이 오래되어 향이 변질된 녹차를 후라이팬에 볶아 준 적이 있어서 맛을 기억하고 있다. 다만 비싼 차로 호우지차를 만들면 애써 비싼 돈 주고 산 차의 향과 맛이 모두 날아가므로 주의해야 한다. 

호우지차는 주로 싼놈으로 만드는데 먼저 호우지차가 나오는 이유는 속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스를 시작. 


참고로 요즘은 음식 사진을 찍는데 크게 열정이 없어서 대충 간다. 먹는데 계속 사진을 찍으면 내가 먹으러 온건지 찍으러 온건지 헷갈리기도 하고 내가 먹고 행복한 게 우선이니까.     


사키즈케로 나온 음식이다. 가볍게 입을 씻어내는 요리라고 할까? 일본에서 먹어 본 카이세키 코스는 꼭 식전주가 나왔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건가, 라는 의문이 든다.

사토시형의 음식 받침에 털이 붙어 있었는데 털 모양이 아무리 봐도 음모;;;;였다. 음식 안에 나온 게 아니라 왠만하면 넘어갈랬는데 이 정도 가격에 봉사료까지 받으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음식 주위에 털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라.
 


미안하다고 서비스로 가져 왔는데 순서를 생각하면 사키즈케 다음은 젠사이(우리말로 전채)다. 따로 젠사이가 나오지 않은 거 보면 이게 젠사이 일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갸우뚱했다. 서비스로 줬다는 말은 구라인 건가. 젠사이는 산, 들, 바다에서 나는 제철 재료를 계절감을 알 수 있도록 담는 것이 특징이다.

서비스한 분은 미인에 친절했지만 왠지 이 정도 가게에서 일하는 숙력된 분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일본어로 계속 대화해서 방해를 하기 싫은 탓인지 요리 설명이 거의 없었는데 대화가 끊겼을 때도 특별한 설명은 없었다. 요리의 명칭에 관한 초보적인 질문도 왠지 엉뚱한 대답을 해서 의아했다.   



스이모노. 맑은 국인데 사시미를 먹기 전에 속을 데워 주는 역할을 한다. 이거 정말 괜찮다. 질 좋은 송이 버섯과 대합의 앙상블이 심각하게 좋은 향과 맛을 낸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다.
 





오츠쿠리. 사시미의 높임말인데 역시 대만족이다. 굉장히 좋은 재료를 썼다. 혀와 이에 전해지는 질감이 허접한 사시미랑은 차원이 다르다.  전복도 아주 좋은 놈으로 써서 야들야들한데다 와사비도 직접 갈아서 나온다. 이 정도 가격이면 당연하지만, 여튼 재료는 굉장히 양심적이다.

'털'+_+로 인한 초반의 실망이 반전되는 순간들.  

 


야키모노. 구이요린데 된장, 간장 등으로 맛을 낸다. 특히나 적당히 기름진 생선이 아주 좋다.

형은 가마보코가 들어가 있는 게 아쉽다고 한다. 이런 고급 요리에 가마보코가 턱 하니 놓여 있어서 왠지 싸구려 음식같아 보인다고. 만약 이 집에서 직접 만들어 낸 거면 평이 달라지겠지만 형이 보기엔 그렇지 않다고.  


니모노. 조림 요리다.

사진으로는 모르겠지만 게 껍질 안에 정갈하게 만들어 내 놓은 것이 정성이 깃들어 있다. 종류는 전혀 다르지만 살짝 '게감정'이 떠올랐다. 게감정은 게의 등딱지를 떼어 그 속에 소를 넣어 지진 다음 다시 끓여내 찌게로 만드는 한국의 궁중요리다. 굉장히 손이 많이가는데 그만큼 먹는 사람은 편하다. 

조선시대에 왕이 게를 들고 뜯어 먹으면 체통이 없어 보여 게감정 같은 음식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너무 손이 많이가는 탓인지 게감정을 하는 식당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아게모노. 스이모노. 튀김요리와 찜요리다.

코스요리를 보며 눈치 빠른 분들은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일본 요리는 5가지 조리 방법과 5가지 맛을 조화시켜 5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쏟아 붇는다. 5감은 시각, 후각, 청각, 촉각, 미각이고 5가지 조리 방법은 날것, 굽기, 끓이기, 튀기기, 찌기, 5가지 맛은 단맛, 신맛, 짠맛, 쓴맛, 매운맛이다.  


그리고 식사. 한국으로 치면 영양밥같은 느낌인데 자연 송이로 향을 내서 과연, 이란 말이 나온다.
 
사토시형은 츠케모노(채소를 절임한 일본의 저장 음식)가 아쉽다고 한다. 이 정도 고급요리점이라면 츠케모노를 직접 만들어 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맛을 보니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기성품이 확실한 것 같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의 츠케모노는 한국의 김치와 같은 느낌으로 보면 된다. 각 집마다 전해져 오는 방법과 맛이 다른데 한국에서 '와, 이 집 김치 누가 담그냐'라는 걸 일본에서 '이 집 츠케모노 비법이 뭐야'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디저트와 차가 나온다.


전반적으로 누가 먹어도 과연! 이라는 느낌이 나는 고급재료를 쓴 것이 손님을 속이는 일식집은 아니다. 고급요리점이라 불릴 만하며 장소나 가게 인테리어, 손님 수준을 고려하면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불만은 없을 듯하다.

다만 중간 중간 세심한 포인트와 서비스를 하는 분의 숙련도가 약간 아쉽다.


이상 오랜만에 비싼 거 먹어서 거드름 피우며 에헴에헴하고 쓴 맛집 총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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