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그 이미지로 소화되는 엄마의 이미지가 있다. 리모컨을 냉장고에 넣거나, 단어가 생각 안 나 이상하게 바꿔 말하거나,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거나.

2.
아내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어디까지나 나에 비해서다. 어릴 적에 묘한 훈련을 한 탓도 있지만 트럼프 카드 54장을 한 번에 역순으로 외우거나 A4 두, 세 장 분량을 소리 내어 말하면 최소 5년은 기억한다. 여기서, 기억한다, 라는 뜻은 머뭇거리지 않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다.

살면서 나보다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을 만난 적은 2번뿐이니(물론 안 만나본 사람 중엔 훨씬 많겠지만) 아내로선 나와 비교하기는 조금 억울할 수 있다.

해도 그녀는 평균치보다는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다. 노래든 대사든, 급할 땐 몇 페이지 분량을 하루, 이틀 사이에 다 외워야 하고 그게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3.
결혼 후, 아내가 무언가를 찾아 허둥대거나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까먹거나, 드라마를 엄청 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헌데 아이를 낳고 난 후, 이 세 가지 일을 모두 보았다.

부부가 함께 육아를 한다 해도 모유수유를 하는 한 100%, 엄마가 아빠보다 힘들다. 해서, 수면부족을 '극단적'으로 경험하는 건 대부분 엄마다. 수면이 부족하다는 건 쉬지 못한다는 의미이며 쉬지 못하면 행복감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에 뇌가 무반응해진다. 의학적으로, 예외 없이, 인간이라면. 

해서, 누구나 수면이 부족해지면 건망증이 생기고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며 행복하지 않게 된다. 물 올려놓은 걸 까먹고, 휴대폰을 찾고, 쉬운 단어를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내 친구들이 가끔 놀러 온다 해도, 내가 퇴근을 하고 항상 함께 있어도, 아내의 대부분 시간은 신생아, 그러니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하루(제 자식입니다)와 함께다. '만성 수면 부족인 상태'에서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이다. 세상엔 인간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많으나 공부를 하기에도, 책을 읽기에도 뇌는 집중력과 논리력이 부족해진 상태.

이런 상황을 별도의 준비나 생각 없이 즉각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욕구, 즉, 자극엔 영상이 제격이며, 그중 드라마만 한 것이 없다(더구나 수유시간이라면).

아내는 요즘 드라마를 많이 본다.

4.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 TV에 나와 엄마나 아줌마를 개그 소재로 쓰는 장면들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자식 키우다 그리 되었군, 으음, 하고 나의 아내 보며 그 틈새를 엿본다.

아내와 하루, 둘 다 수면 부족의 느낌?

제법 나중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하루가 "엄마는 건망증!"이라고 놀리거나, "엄마는 드라마만 보면서!"라고 소리치면, 한 번쯤은 잡아서 휘휘 돌린 다음, 슈웅하고 던져버려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추신: 아, 중간에 트럼프 카드, A4용지 어쩌구저쩌구 하는 저의 기억력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매번 거짓말을 하나 끼워 넣어 죄송합니다.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가 있지요). 그런 기억력이 있다면 정신이 나간 친구들(적절한 예: 부모에게 닮지 말아야 할 인간관계)에게 자꾸 돈을 빌려주는 일은 없겠지요.

뭐, '빌려준 쪽이 기억 못 하는 것도 잘못이잖아',라고 매번 설득되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어쨌든 생긴 걸로 보면 나쁜 쪽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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