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번호 444번,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법의 정의
법. 요즘들어 뉴스에 가장 많이 보이는 단어다. 저작권법, 미디어법, 명예훼손, 미란단원칙등, 때때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갑자기 여기 저기서 왜 이렇게 법을 강조하는 걸까. 또 왜 그렇게 많이들 잡아가는 걸까. 사람들이 갑자기 못되진 걸까. 아니면 이제서야 법치가 바로 선 걸까.
중학교 때 「법은 무죄인가.」라는 책을 읽고 할아버지께 '법은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진 기억이 난다. 그는 내게 누구보다 똑똑한 사람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할아버지는 중학생의 어린 손자에게 한마디로 법을 정의해 주었다.
'권력자의 통치 수단이지'
어느 따스했던 봄날, 그의 묘한 미소와 함께 들려온 대답은 당시의 모든 기억을 사진처럼 만들어 주었다. 그 날을 떠올리면 거실의 햇볕사이에 춤추던 먼지 하나가 아직도 내 눈 앞에 멈춰서 있는 듯하다. 나는 좀 더 따뜻한 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할아버지의 삶을 몰랐던 탓도 있고 그가 살아 온 시대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력자를 비판하면 징역을 살고 바른 말을 하면 법을 급조해서라도 감옥에 넣었던 시절. 고문을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고 경찰들이 별다른 설명없이 사람을 끌고 갔던 시절. 지금도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법 위에 존재하지만 그 때는 법을 짓밟고 놀았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렇게 하고도 언론만 잘 통제하면 사람들의 의식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시대였다. 물론 깨어있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 중의 절반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을 분노로 바꾸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그 두려움을 분노로 바꾸기 보다 자기합리화로 바꾸는 편이 더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분노하면 자신도 괴롭고 가족도 괴롭다. 언젠가 이 땅에 서게 될 후손들은 좋은 세상에 살게 될지도 모르지만 자기는 평생 싸우기만 하다 비참하게 죽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합리화를 시작하면 모든게 편해진다. 더 이상 비겁하지 않을 수 있고 애국자도 될 수 있으며 자신을 무시했던 많은 이들을 오히려 깔아 뭉갤수 있다. 이것이 아직도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나는 요즘, 그때의 시절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덧 붙이는 이야기 : 5.16직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할아버지의 사진이다. 당시 그가 받았던 수감번호는 444번.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니 사진사가 마지막으로 사진을 남기자고 하자 할아버지는 당당하게 웃으며 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다행히 2년 7개월을 복역하고 풀려났지만 그 이후, 평생을 불법연행과 고문에 시달렸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비가 오거나 갑자기 다리가 쑤실 때, 종종 나를 불렀다. 그럴 때면 나는 등에 땀이 흥건할 때까지 다리를 두드려 드렸다. 그는 어린 손자가 힘들까봐 항상 얼마 지나지 않아 '힘들제, 이제 그만 가보그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항상 '아입니다. 괜찮심니다'라며 계속 다리를 주물렀다. 그런 대화가 3번 반복되기 전까지 단 한번도 할아버지의 다리에서 손을 뗀 기억이 없다.
어린 나이의 내가, 그리고 항상 잠이 많던 내가, 그 야밤에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할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렀던 기억은, 그리고 단 한번도 더럽다고 생각한 적 없이 할아버지의 발가락 사이 사이를 손으로 꼭꼭 눌러 드렸던 기억은 지금도 내 평생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 중의 하나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불러 다리를 주무르게 한 이유가 고문 휴유증인 걸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10번, 11번 그만하라고 말씀하셨어도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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