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와이셔츠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무스로 올린 30대 초반의 키 큰 남자 한명
남색 양복을 입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스포츠형 머리를 한
50대 초반의 눈이 매서운 남자 한명
바닷가 모래색 양복을 입고 금테안경을 낀
(그리고 머리가 벗겨진)
충실할 것 같아 보이는 50대 후반의 남자 한명
나는 이 3명의 일본인에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니시닛뽀리역에서 전철을 타려던 도중
덜컥하고 잡혀 버리고만 것이다.
일본에서 장기간 체류하기 위해선 외국인 등록증이란게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 받지 못했다면
꼭 여권을 들고 다녀야 한다.
아쉽게도 나는 오늘 여권을 들고 있지 않았다.
(사실은 항상 들고 다니지 않지만)
순간
첫 수업때 선생님이 한 말씀이
'정말' 토씨하나 빼지 않고 머리속에 떠올랐다.
'한일 방문의 해인 관계로 현재는 노비자로 여행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기 전에는 꼭 여권을 들고 다니십시오.
장기 체류자가 일본에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 머무르고 있다 해도
외국인 등록증이 없는 상태에서 여권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위법입니다.
예전에는 가볍게 봐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법에 따라 처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풀려 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룻동안 구치소에 머무르고 풀려 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남습니다.
장기체류자가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 머무르고 있다해도
외국인 등록증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여권을 소지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일본의 법을 위반하는 행위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경찰서에 가서 풀려 났다고는 하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게되고 이것은 후에 일본에 여행을 하거나
학교에 진학 하려는 경우 상당한 마이너스가 됩니다'
... 라는 말이
정말 1초만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나 첫번째 별은 일본에서 다는 것인가란 생각도 함께)
나는 학생증을 보여 주곤
내가 일본에 온 날짜와 다니는 학교에 대해 말했지만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장기체류자가 여권을 들고 다니지 않는 자체가 위법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는 내 학생증을 가져갔다.)
'경찰서로 가자...'
할 수 없이 나는 그들과 함께 역 앞에서 경찰차를 기다렸다.
경찰서까지는 차로 20분정도 걸린단다.
세명이 나를 둘러싼 채 5분 정도 기다리다 보니
분위기가 좀 완화되는 듯 했다.
(나는 위법인 사람치곤 너무 당당했고 일본어가 미숙한 주제에 너무 기분 좋게(?) 말했다.
일본에 몇번 왔는지도 물어보고 친구는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중간 중간 말이 통하지 않아 사전을 꺼내기도 했고
급기야 가벼운 미소를 주고 받을 정도의 대화가 오갔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나이 든 남자 2명이 대화를 했고 눈이 매서운 남자가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모래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거주지를 다시 한번 물었다.
그리고
역에서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 보길래
'오까치마치에서 5분'이라고 대답했다.
눈이 매서운 남자는
우에노에 산다면서 왜 오까치마치역이냐며 물었고
나는 집이 딱 중간이라 그나마 오까치마치에서 내리는게 빠르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전철을 탔고 분위기가 좋아진 탓에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아직 일본친구가 없다니까 빨리 사귀라는 말도 했다.
역에서 내려 나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내가 빨리 걸으니 눈이 매서운 남자가 빨리 걷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집앞에 도착해서는 같이 들어가자고 했더니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권을 들고 나오면 학생증을 돌려 주겠다고 말하고는 어서 갔다 오라고 말했다.
나는 집에 있는 여권을 들고 나와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은 몇번이나 외국인 등록증이 나오기 전에는 여권을 들고 다니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방금 집 앞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 ...
돌아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한비야 누나가 했던 말이 떠 올랐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지는 확신 할 수 없지만...)
'자기가 아무리 세계인이고 사해동포주의자라고 떠들어 봤자
현실은 뭐냐면, 우리가 우리나라 밖에 한발 자국 밖으로 나갈려면
여권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여권은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것... 그게 없으면 밖에 나가서 아무 일도 못한다는 거다.
역시나 우리의 울타리는 한국이란 것이다.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이 울타리, 그리고 이 한국...'
이 말은
비야 누나가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한 내용으로
여행을 많이 해서 정체성을 찾으라는 뜻에서 한 긴 이야기중 한 부분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그 구절이 떠 올랐다...
그리고...
경찰에게서 풀려나니까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자축하는 의미에서
과자와 라면을 잔뜩 사고 말았다.
<하지만 가난한 유학생이므로 많이 사봤자 이 정도>
by 죽지 않는 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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