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면서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박정희 옹호단체는 그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분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박정희의 친일경력은 극히 미미하여 친일파로 분류될 정도가 아니라는 것, 또는 공이 크니 그 정도 과는 덮어 주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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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집회 사진을 보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죄 없이 빨갱이로 몰려 죽고 고문당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친일파가 아니라, 그리고 박정희가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그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저렇게 들고 일어나 주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에 밉보였다는 이유 하나로 빨갱이로 몰려 죽은 독립운동가들, 강요당한 사인 하나로 이유 없이 생매장 당했던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들, 그리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빨갱이로 낙인 찍혀 아직까지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말이다.
친일파 후손이 존경받는 길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고 언론들의 추이를 살펴보면 확고한 판단과 주장을 갖춘 곳이 있는가 하면 어설픈 중립이나 양시양비론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곳도 많다. 개인적으로 가장 달갑지 않은 행태다.
확고한 주장을 제외하고 중립을 지키는 흉내를 내며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글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친일파에게도 공과가 있으니 그걸 잘 따져야지 무조건 나쁘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어도 친일파가 안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내 조상 모두가 친일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친일인명사전을 쓴 민족문제 연구소는 깨끗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
첫째,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족문제연구소는 깨끗하지 않다. 왜 깨끗하지 않느냐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유지를 받들고 있는 독보적인 친일문제연구가인 고 임종국의 부친조차 친일을 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 부친의 친구들, 그의 은사조차도 친일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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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철저하게 고증하여 기록으로 남긴 사람도 바로 그, 고 임종국이다. 그는 문학계의 대선배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예외 없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한 길이며 그런 철저한 자기반성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이 친일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으면 친일파를 비판하면 안 되는가. 친일파의 후손이라면 무조건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을 반대해야 하는가. 친일파의 후손이기에 더욱 철저한 자기반성으로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고 임종국이 독보적인 친일문제연구가로 존경 받는 것처럼 말이다.
박정희와 필리프 페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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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 하는데 백 번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어떤 공으로도 덮을 수 없는 과가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민족을 배신한 '과'다. 이건 내가 주장하는 게 아니라 프랑스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박정희 옹호단체들이 주장하는 것과 놀랍도록 똑같은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 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영웅이자 육군 원수까지 지낸 필리프 페탱(Henry Philippe Petain)이다.
필리프 페탱은 제 1차 세계대전 때, 베르됭 공방전을 지휘하면서 필사적인 참호전으로 프랑스를 지켜냈다. 그 전투로 페탱은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1차 대전 후, 육군 원수(5성 장군)로 승진하여 프랑스의 국부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 받고 위대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뒤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며 프랑스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대통령의 자리란 것이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운 것처럼 나치가 프랑스에 세운 괴뢰정권이란 것이다.
프랑스에서 드골의 항쟁파와 페탱의 휴전파가 나누어 졌을 때, 페탱은 독일과 휴전을 맺고 나치의 협력 하에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연합국은 대부분 이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유일한 프랑스의 합법적 정권으로 페탱의 비시정권을 인정하는 분위기라 작은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후, 연합국이 승리하자 페탱은 이렇게 주장했다.
'프랑스를 베르 같은 지옥으로 만들 수 없었다. 나는 프랑스를 최악으로부터 보호했다. 만약 내가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방패라도 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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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누군가와 소름 끼치도록 닮은 주장 아닌가. 당시의 시대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는 뜻이다.
만약 박정희를 옹호하는 단체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그를 위해 이렇게 변호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800만 국민의 처참한 희생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또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페탱이 지켜내고 구해 주었는데, 그 덕택에 프랑스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비난하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프랑스의 국민들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나 보다. 어떤 언론도 어떤 국민도 그를 비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과를 정확히 따져야 한다는 생각은 일치했다. 그가 세계 제 1차 대전 때 프랑스를 구한 공은 그를 총살형에서 종신형으로 만들어 주었다. 과거 국가를 구한 그의 공은, 민족을 배신한 그의 총살형을 종신형으로 만들 정도, 딱 그 정도였다. 결국 그는 유형지에서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우리만큼 정이 없고 야박한 사람들이라서 나라를 구한 사람 조차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걸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했을 때 모두가 나치 협력자가 안될 자신이 있기에 그토록 배신자들을 혹독하게 처벌하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지금 친일파를 비난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똑같은 상황에서 그보다 더한 일을 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그들을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의 존립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프랑스가 단 한 번이라도 조국을 부정한 이들을 그토록 철저하게 처벌하는 이유다.
한국은 불행히도 민족을 배신한 자들을 처벌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기득권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들을 재판장으로 보낼 만큼 패기 있는 정치가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반대로 그런 힘을 가진 몇몇 언론은 그런 주장을 할 만큼 당당하지 못하다.
하지만 그런 부끄러운 기록이라도 남겨서 철저한 자기반성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남아있고 그 사실을 똑똑히 직시하는 국민들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이 아직도 대한민국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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