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공개된 박정희 혈서의 진실. 박지만 긁어 부스럼 만들었나.



불과 3시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의 만주군 혈서지원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몇몇 분들은 많은 증거가 있음이 분명한데 왜 공개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 측이 모든 정치적 입장을 배제한 채, 사실만을 근거로 사전편찬 작업에 몰두한다는 신념으로 움직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최대한 정치적인 싸움은 피해왔다는 뜻이지요. (추가 : 실제 혈서를 증명하는 신문 기사는 10월 중순에 입수했다고 합니다. - 친일문제전문가 정운현 선생님 블로그 참조)


혈서에 대한 사실을 배제하고서라도 친일의 증거는 확실하다고 판단했기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요.(게다가 수천명의 친일파 중 박정희만 자료를 공개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정치적인 거겠죠?)  하지만 최근 박정희의 아들인 박지만씨가 사전의 배포금지 신청을 하는데다 우익 인사들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민족문제연구소도 더 이상 사태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항의 전화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친일인명사전 작업은 많은 뜻있는 분들과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응원에 힘입어 겨우 여기 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친일 후손들과 수구단체의 탄압에 배포가 늦어지고 있는 상태지요.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역사는 민족 앞에 비겁했던 자들을 제때 걷어내지 않았기에 그 아픔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죄를 묻자는 것도 아니요,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부당한 이익을 돌려 받자는 것도 아닌, 단지 죄만이라도 제대로 기록해 놓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막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자료 공개로 혈서설은 더 이상 '설'이 아니게 됐습니다. 한때 '박정희 친일행적 10가지에 대한 명쾌한 반박'이란 글의 1번으로 혈서설은 박정희 대통령을 음해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카더라 통신'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떠오르는군요. (사실 그 반박문이란게 한 정치인 까페 회원이 자기들끼리 만들어 놓고 좋아하던 거였죠.) 재밌는 것은 그걸 제일 처음 화제로 만든 사람이 조갑제 였다는 사실이구요.(현재는 신인개그맨으로 영역을 넓히고 계시는 듯합니다만 이분이 과거에 보여준 자료수집능력이나 기자로서의 치밀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발 더 이상은 친일인명사전 배포가 친일파 후손들과 수구단체의 탄압으로 늦춰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추신 : 제일 황당한 것 중 하나가 이런 일이 있으면 꼭 힘 없고 가난했던 농민들과 당시의 일반 소시민들을 잡고 늘어지는 겁니다. '박정희가 친일이면 그들도 다 친일이다, 대한민국에 친일안한 사람 없다'는 식의 물귀신 작전 말입니다. 정말 묻어 가는 것도 이런 황당한 묻어 가기가 있습니까? 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친일파나 사기꾼 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봅니다.


기준은 '자발성'입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친일을 했나요? 어째서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과 자발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을 힘없는 농민들과 같은 선에서 놓고 봅니까.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런 기준을 철저히 정해놓고 사전을 편찬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논리로 여론을 움직이는 사람들,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

 

* 추신2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임기가 내년 초까지 인거 알고 계시나요? 상부의 결정에 따라 2년 연장이 가능한데 아마 이번 정권하에서는 조금 힘들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항일 독립운동, 해외 동포사, 민간인 집단희생, 군의문사등의 진상을 규명하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갖은 반대와 무수한 장애를 무릅쓰고 '겨우 겨우' 2005년에 출범할 수 있었습니다. 


거대 권력에 의해 저질러 졌지만 밝혀지지 않은 억울한 죽음들. 씻지 못할 죄를 짓고도 최상층의 권력에서 떵떵 거리고 사는 사람들의 뒷면. 그런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만큼, 어떤 부류의 단체나 사람들에게 탄압을 받을지 짐작이 가시죠?


저는 아직도 2004년의 기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삭감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예산을 불과 11일 만에 국민들의 힘만으로 5억을 넘겼던 그때를요.(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 그리고 시민이 함께 이루어낸 기적이었지요.)


민족문제연구소 만큼이나 고생하시고 뜻있는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과거사 정리 위원회'라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쪼록 2년의 임기가 더 연장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들이 끝까지 지켜 봐 주셨으면 합니다. 시민 여러분이 함께하면 기적은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래는 민족문제 연구소가 오늘자로 공개한 자료 전문입니다.



그간 말로만 전해지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발굴 공개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1월 5일,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을 공개하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인명사전 등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만주신문』기사에 의하면 박 전대통령은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재차 응모한 것으로 나타난다. 편지 내용도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 등 확고한 신념을 담고 있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박전대통령은 세 차례의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다.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연구소가 자료 공개를 결정하게 된 데는 박 전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가 지난 10월 28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지가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관련 보도가 나간 뒤 연구소에는 욕설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

연구소는 특정 정치인의 입지와 무관하게 1991년부터 편찬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도 해방 이후 60년이 넘도록 미결 상태로 끌어왔던 친일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학문적 정리를 마치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듯이 왜곡하는 일부 의견에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근거 없는

비난 을 방치할 때 민족사 정립이라는 대의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전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박지만 씨는 4일 북부지원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를 추가하여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앞서 제출한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의 요지는 “1. 박정희는 만주군이었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며, 2. 만주군의 주적은 마오쩌뚱의 팔로군이었으므로 박정희는 만주국의 용병이 되어 중국공산당과 싸운 셈이며, 3.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1.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 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계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 2.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가 군관을 거듭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 4. 엄밀히 말해서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적국의 장교이다. 5.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으로 볼 수 없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으로 이해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변론을 준비 중이다.         연구소는 혈서지원 『만주신문』기사와 함께,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만주신문』 1939.3.31. 7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