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문학은 언어의 음악이다 - 8점
제이 루빈 지음, 이나경 옮김/문학사상사

중학생 때로 기억한다. '상실의 시대'를 사기 위해, 아니, 그때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나. 여튼 그 책을 사기 위해 점심시간에 학교를 뛰쳐 나왔다. 버스를 타고 단골인 개미글방으로 달려갔다. 하루키 탓에 의무교육을 저버린 셈이다.
 
내 대학 졸업장에는 우습게도 '일본문학사 심화 이수'라고 적혀 있으나 일본문학에 대한 깊이는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는 그릇 정도라 생각한다. 허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에 대해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군더더기, 없음' 

원서로 이 아저씨의 소설을 읽어 보면 참으로 깨끗하다. 문장의 불순물을 이 정도까지 제거할 수 있다니.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의미같은 건 모르기에, 거기에 대해서 논할 순 없으나 이런 정갈함은 나의 재능 따위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을 알기에 하루키가 더욱 좋다.   


 


65.
하루키 문학은 언어의 음악이다 / 제이 루빈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가

초판 인쇄 2003.06.20

 


 하루키의 역사적인 관심 가운데 변치 않는 부분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보인다. 하루키는 편안하게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기를 꺼린다. 특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작품에서도 삼촌은 여럿 만날 수 있지만, 아버지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언 부루머는 <뉴요커>지 프로필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냈다.

 

 전쟁 전, 하루키의 아버지는 교토대학교에 다니는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다 그는 징집되어 중국 전투에 참가했다. 어렸을 때, 하루키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겪은 일 가운데 매우 충격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엄청난 마음의 갈등을 겪은 것은 기억한다.

 

 그 결과, 하루키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하여 오랫동안 애증을 느껴왔다. 이는 그가 처음으로 쓴 단편 <중국행 슬로 보트>(1980)에 드러나 있다. 이 단편은 화자가 자신이 만난 몇 안 되는 중국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된 과정을, 기이한 감동을 전하며 섬세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이 주제는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 사람들과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이 등장하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 또 다루어지며, <태엽 감는 새>는 전쟁에 대한 끔찍한 묘사 면에서는 가장 괴로운 전개를 보여준다.

 

 하루키는 학교 시험 공부에 염증을 느낀 인물로, 일본의 악명 높은 시험 지옥을 치러야 할 때가 오자 그 염증은 더욱 심해졌다. 착실한 중산층 집안의 아들이었던 그는 그 체제에 전적으로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래서 부모님 마음에 들 만한 대학 몇 곳의 입학 시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법학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여 전공하기로 했지만, 첫해에 낙방하고 로닌(주인 없는 사무라이)’이 되어 재수를 하는 많은 학생들 틈에 끼게 되었다. 그는 1967년의 대부분을 아시야 시립 도서관에서 공부하며 (혹은 그의 말에 따르면 졸며) 보냈다.

 영어는 입학 시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과목이었지만, 하루키는 찬찬히 문법 공부를 하지 못하고, 대신 좋아하는 미국 스릴러 소설의 단락을 번역했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 그는 수험 서적 한 권에서 새로운 감동거리를 발견했다.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 <머리 없는 독수리>의 첫 부분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하루키는 그것이 온갖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다가 처음으로 진정한 문학작품을 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커포티의 단편집을 찾아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게 한 해 동안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그는 법학보다는 문학에 더 큰 흥미를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도쿄 와세다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했다.

 18년 동안 간사이 사투리만 쓰며 살아온 하루키는 도쿄 표준어를 말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사흘 만에 마스터했다. “저는 꽤 적응을 잘하나 봅니다.”

 처음 와세다에 들어가자 그는 <상실의 시대>에서 그리게 될, 와케이 주쿠라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재단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설 시설인 이 기숙사(와세다를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의 숲 속에 있다)는 어느 대학 한 곳과 연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너 곳의 대학생들을 받아준다. 하루키는 그곳을 우스꽝스러운 우익에다, 일류 대학 학생들을 선호하며 무시무시하게더러운 곳으로 묘사했다(마지막 부분은 전세계 다른 남자 기숙사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일문학을 전공하는 외국인 학생들도 종종 그곳에 살지만, 하루키가 워낙 형편없는 곳으로 묘사해 놓는 바람에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자 그곳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상실의 시대> 주인공은 도쿄에서 처음 2년간을 그곳에서 지내지만, 하루키는 6개월 만에 그곳을 나와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주는 작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하루키는 대다수 일본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강의에 별로 출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때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대학에 가서는 정말로 공부를 안 했습니다.” 대신 그는 신주쿠의 재즈 클럽이나 기숙사가 있던 언덕 바로 아래 와세다 근처의 바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 캠퍼스는 정치 구호가 적힌 합판 플래카드로 숲을 이루었는데, 너무 취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술친구를 집에 데려다 줄 때 플래카드는 들 것 대용품이 되기도 했다. 취한 하루키를 가파른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 기숙사로 옮기던 도중, 그를 싣고 있던 임시 들것이 두 동강이 나는 바람에 머리를 계단에 세게 부딪쳐 며칠 동안 아픔이 가시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하루키가 마음껏 즐겼던 한 가지는 난생 처음으로 혼자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있었다. 아니, 특별한 여인은 하나였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학 시절에 딱 두 명뿐이었요. 그 하나가 지금의 아내입니다. 다른 친구도 여자였어요. 몇 안 되는 친구들이 다 여자였지요.”

 




 

 하루키의 작품이 그보다 나이가 많은 미시마 유키오(하루키가 가장 싫어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의 작품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제 삶은 애초의 기대에 절대 미치지 못한다는 깨달음에 있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늘 인생이 영화처럼 근사하게 펼쳐지기를 바랐으며, 그의 작품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좇아 거침없이(혹은 너무 손쉽게) 뛰어든다. 하루키는 J.D. 샐린저와 더 비슷하다. 대체로 그는 집에 앉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거나, 전에는 마술적인 능력을 지녔던 뭔가를 희미하고 막연하게 체험한다. 학생운동의 붕괴는 그 세대가 처음으로 겪은 상실감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실의 시대>는 이렇게 순수함을 상실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다룬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작품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다.

 1971년 스물둘이 된 하루키와 요코의 사이는 점차 깊어졌다. 두 사람은 동거만이 아니라 결혼하여 함께 살고 싶어했다. 하루키의 부모는 반가워하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교토오사카 지방 이외의 타지 사람을 며느리로 맞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정상적인수순에 따라 정상적인경력을 쌓기 전에 결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키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의 부모와는 반대로, 요코의 아버지는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하루키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요코를 사랑하는가?” 그는 공평무사하고 구식 권위주의를 지니지 않은 장인 다카하시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하루키와 요코는 별다른 행사 없이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고,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니, 거의 마무리되었다. 두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다카하시 씨는 강하게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처가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전에 요코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매 둘은 시집을 갔기 때문에 신혼부부와 요코의 아버지, 세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하루키의 부모에게 그 결혼은 영원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요코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기도 했다. 결혼 직후 두 사람은 아시야의 하루키 부모에게 인사를 갔다. 그녀는 잠에서 깨자 꼼짝도 못하게 온몸을 쇠로 감아놓은 가나시바리’(외국에서는 거의 알 수 없지만, 사회 체제가 엄격한 일본에서는 상당히 흔하다)의 상태였다고 한다. 요코는 마비가 풀려 방에서 하루키가 보일 때까지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키의 학업은 중단되었다. 결국 그는 7년 만에 졸업하게 된다. 그는 1년 정도 쉬기로 했지만, 영원히 장인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TV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얻을 생각으로 몇 차례 면접에도 갔지만, “일은 정말 바보 같았다. 차라리 조그만 가게를 차리고 혼자서 고상하게 일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 재료를 골라 물건을 만들고, 내 손으로 손님에게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재즈 클럽밖에 없었다. 재즈를 좋아하니, 어떻게든 그것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하루키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결혼한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었다. 이제 그와 아내는 술집이나 카바레 같은, 지저분한 물장사를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하루키의 부모는 요코를 취한 손님을 상대하는 술집 여주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재즈 클럽과 마찬가지로, 하루키가 차린 곳 역시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대화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음악을 듣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하루키의 마음을 끌었다. 요코의 아버지는 이 사업을 위한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빌려준 것이다. 즉 이자를 받고 꾸어준 것으로, 그의 공평무사한 성격의 일면이었다.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썼을 때, 저는 스물아홉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도쿄에서 조그만 재즈 클럽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가 샐러리맨이 되고 싶지 않아서, 대출을 받아 클럽을 열었습니다. 학생 시절, 저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지만, 가게 일을 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를 듣고, 칵테일과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은 글을 쓰지도 못했고, 쓸 생각도 못했습니다. 날마다 양파를 한 포대씩 다져야 했습니다. 이 경험 덕분에 저는 지금도 울지 않고 양파를 썰 수 있습니다. 그때 저와 어울리던 친구들은 대부분 재즈 뮤지션이었지,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1978 4월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날이 뚜렷이 기억납니다. 그날 오후 야구를 보러 가, 외야 쪽 스탠드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팀은 야쿠르트스왈로스였습니다. 히로시마 카프스와의 경기였습니다. 스왈로스의 1회 말 첫 타자는 미국인 데이브 힐턴이었습니다. 아마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그는 미국에서 좋은 전적을 내지 못해서 일본으로 온것이었습니다. 분명 그가 그해 최고의 타자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그날 첫 볼을 외야 2루타로 쳐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문득,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갑작스러운 계시 같았습니다. 이유도, 설명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든 것뿐입니다. 할 수 있다. 할 때가 왔다.

 경기가 끝나자 , 스왈로스가 이겼습니다, 스왈로스가 이겼습니다저는 문구점에 가서 만년필과 종이를 샀습니다. 그리고 매일 일이 끝나면 주방 조리대에 한두 시간씩 앉아 맥주를 마시며 소설을 썼습니다. 새벽 세 시, 네 시 까지 깨어 있곤 했습니다. 하루에서 짜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 잘해야 두 시간이었습니다. 제 첫 소설의 문장과 장이 짧게 끊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때 커트 보네것과 리처드 브로티건을 좋아했던 것과 그들에게서 이런 식의 단순하고 호흡이 짧은 문체를 배운건 사실이지만, 첫 소설의 문체가 그랬던 가장 큰 이유는 긴 산문을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6개월이 흘렀습니다. 소설을 완성하자, 문학지에서 매년 신인작가에게 상을 주는 공모에 냈습니다. 1979년 군조 신인상을 탄 건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작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으니까요(그런데 그 일이 있은 다음 저는 데이브 힐턴의 사인을 받았고,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제게 행운의 부적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제 소설을 문학이라고 불렀고, 짧고 조각난, 상징적인 문체 때문에 새롭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스타일은 제가 바빴기 때문에 나온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땐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훨씬 더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훨씬 더 좋은 소설가가 될 수 있다.’

 

 하루키가 소설을 <군조>지에 낸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원고만큼 긴 원고를 받아주는 공모는 거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그곳이 새로운 종류의 글을 더 많이 받아준다고 그는 생각했다. 훗날 다른 잡지사의 심사위원들은 그가 소설을 자기 측 공모에 냈다면, 절대 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하루키가 종종 말했듯이, 상을 타지 못했다면, 그는 다시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살아도, 그럭저럭 잘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이십대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에 대한 청구서를 받은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장부 정리를 해야 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소설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 소설을 쓰는 바람에 돈을 벌 시간을 엄청나게 손해 보았다. 긴 하루 일과가 끝나고도 집에 돌아가지 않곤 했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글을 쓰다가 정오가 되면 다시 일을 해야 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화자는 자신의 책에 어딘가 한두 가지 교훈은 담고 있을지 몰라도, 고상한 예술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처음부터 독자의 마음을 열어둔다. 제목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이 가볍고 장난스러운 소설은 분명 교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삶의 모델을 제시하는 근대 일본의 전통(나쓰메 소세키나 시가 나오야를 꼽을 수 있겠다)을 많이 따르고 있다. 하지만 <피너트>처럼 부모의 권위를 지닌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이 작품은 젊은 독자들에게 곧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장년층 비평가들은 이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오에 겐자부로가 하루키는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모델을 제시하여 넓은 의미의 지성인에게 어필하는 데 실패했다라고 주장한 것은 상당히 잘못된 평가다. 후기 작품에서 노골적인 교훈성이 줄어드는 반면, 독자들에게 보쿠가 하루키의 세계로 통하는 친근한 창문이라는 사실은 늘 변함없다.

 하루키는 군조 신인상을 탈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놀란 것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그런 상을 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며, 그 책을 읽은 친구 한 명은 너무나 형편없으니 다시는 소설을 쓰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루키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거나, 혹은 남들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을 전할 때는, ‘평범하다는 표현이 곧잘 나온다. 사실 그를 만나보면 상당히 평범하며, 편안하고,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는, 흔히 만날 수 있는 남자다. , 아무런 예고 없이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곤 할 때면, 그는 조금 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당신을 마주 보고 앉아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먹고 있는 사람이 글을 쓰는 그와 동일 인물이 아니며, 그 두 사람을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평범한 하루키는 다른 하루키가 써낸 소설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런 까닭에 여느 때의 하루키가 그렇게 고상하고 진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잘난 체하지 않으며,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샐린저 같은 은둔자도 아니다.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지 않고, 홍보 이벤트도 피하는 편이지만, 강연에 모인 사람들을 웃게 하는 재주가 있으며, 일단 파티에 끌려가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다음 날 아침에 글을 쓸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집에 일찍 보내주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평범함과 친근함이 가득하다. 하루키가 이룬 가장 큰 성과는 세상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의 미스터리와 거리를 감지해 낸 것이다. 평범한 하루키가 창조적인 하루키의 업적에 대한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자아가 집중하는 데 필요한 절제를 스스로에게 가르친 데 있을 것이다.

 절제. 집중. 하루키는 뭔가 하기로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낸다. 뉴햄프셔의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 그는 균형을 잃고 얼어붙은 눈더미에 얼굴을 부딪히며 넘어진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경기에 경험이 없었던 동료는 스키를 벗고 걸어 내려가던 중, 하루키가 정신이 흐릿한 채 입술에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하루키는 알코올 솜으로 상처를 몇 번 두드린 다음, 다시 꼭대기로 올라가 도전했다. 제대로 할 때까지 다시, 또 다시. 그것은 대단한 결의였다.

 하루키의 작품에 변화가 없었더라면, 그는 고교생과 대학생 독자에게 반짝 인기를 얻는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었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소설의 첫 장그는 거기서 해야 할 말은 다 써버렸다고 한다은 당시 독자에게 어필했던 것의 견본이자, 후기 작품을 논의할 참고 지점으로 전부 인용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신인 소설가가 글쓰기에 대해 자기 성찰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루키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테마와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홋카이도에서 보쿠가 겪는 정화에는 자전적인 측면도 있다. <양을 쫓는 모험>의 집필을 마칠 무렵, 하루키는 담배를 끊었고(하루 세갑을 피웠는데 한 개비도 피우지 않게 되었다), 달리기를 열심히 했다. 그는 소재를 찾기 위해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수양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전형적인 일본의 문인 이미지는 항상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많이 피우는 퇴폐적인 사람으로, 육체를 소진해 글의 소재를 얻는다고 여겨져왔다. 하지만 하루키는 육체적인 건강이 작가로서 직업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항상 소박한식사를 만들듯이, 하루키도 건강을 위해 야채(엄청난 양의 샐러드!), 저지방 일본식 요리와 적당한 양의 탄수화물 섭취를 크게 강조하는 소박한 식사를 한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의 여러 인물들과 같이 정식으로 만든 파스타를 좋아하며, 잘하는 요리도 굉장히 많지만 아마도 이탈리아식을 가장 좋아할 것이다.

 그가 중국 음식을 매우 싫어하는 것은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한 예민한 반응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져왔지만, 그는 풍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며, “체질적으로 중국 음식뿐만 아니라, 한국 음식과 베트남 음식도 먹지 못한다”(일본은 한국과 베트남에도 천사처럼 굴지는 않았다)라고 말한다. 절대 과음하지 않는 하루키는 이따금 맥주나 와인 한 잔 정도를 즐기며, 특히 싱글몰트 위스키를 좋아한다. “소설은 건강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더 건강하게 유지할수록 내면 속의 건강하지 못한 것을 끄집어내기 쉬워지는 법이다.

 1999년까지 하루키는 마라톤 완주를 열여섯 차례나 했고, 한 잡지에서는 그의 달리기와 글쓰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25페이지짜리 기사를 실었다. “1년 동안 소설을 쓰고, 1년 동안 그것을 열 번, 열 다섯 번씩 고쳐 쓰려면 신체적인 힘과 지구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하루가 스물세 시간이라 생각하고 살면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시간은 운동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지구력과 집중력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글이 잘 써지든 안 써지든, 괴롭든 즐겁든, 매일 책상에 앉아 글을 씁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보통 정오가 지나도록 계속 글을 씁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보통 정오가 지나도록 계속 글을 씁니다. 매일 이렇게 하다 보니, 결국 달리기처럼 제가 늘 원했던 지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해내려면 육체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벽을 뚫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뚫고 나아가는 겁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단련은 하루키로 하여금 해가 지날수록 놀라울 정도로 많은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훈련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는 초기 작품의 짧은 비트를 내는 에너지를 제공해 준 것이 재즈라면, 후기 작품의 지속적인 힘은 장거리 달리기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양을 쫓는 모험>을 쓴 다음 해, 1983년에 하루키는 첫 해외여행을 했다. 그는 혼자서 아테네 마라톤 코스를 달린 후, 그해 말 호놀룰루에서 마라톤 대회에 처음 참가하여 완주했다. 그는 그 후로 일본(1996년 홋카이도에서 열린 1백 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을 그는 열한시간 만에 완주했다)과 해외에서 마라톤, 하프 마라톤, 트라이애슬론에 참가해 왔다. 1997년까지 해외에서 참가한 곳은 아테네, 뉴욕, 뉴저지, 뉴베드퍼드, 보스턴 등 다섯 군데였다. 그의 최고 기록은 3시간 31 04(1991).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한 것은 전업 작가로서 성공적인 출발 덕분에 생활이 나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을 쫓는 모험> 6개월만에 5만 부가 팔렸다. 하지만 이따금 알파로메오나 벤츠를 사는 것 외에, 상업적인 성공은 하루키의 스파르타식 생활 방식을 바꾸어놓지 않았다. 그는 문인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TV 출연을 하지 않기로 했다(드물게 공개 석상에 얼굴을 드러낸 자리는, 19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그 지역 도서관들을 돕기 위해 자진해서 가진 낭독회였다). 그는 지금도 대부분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플라스틱 손목시계를 더 좋아하고, 2000년에 갖고 있던 양복 다섯 벌과 타이 스무 개는 거의 걸치지 않는다. 도쿄의 상당히 고급(즉 조용하고 사생활 침해가 없는) 지역에 위치한 아파트와 도쿄 서쪽 해안에 위치한 별장은 그의 미니멀리즘적인 산문과 마찬가지로 장식이 거의 없다.

 하루키는 글쓰기와 관련 없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 일중독자이지만, 사실 그는 글쓰기를 정말 좋아한다. 그는 운동도 글쓰기를 위한 건강 유지 활동으로 생각한다. 그가 하는 대부분의 여행은 여기저기 잡지사에서 출장으로 가는 것이며, 종종 카메라맨을 대동한다(또는 요코와 함께 가는데, 그녀의 훌륭한 사진이 하루키의 글과 함께 게재되기도 한다). 즉 그는 보통 여행객으로 방문할 때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배운 것을 글로 쓰며 큰 즐거움을 맛본다.

 2000년 신년 연휴 동안 하루키는 잠시 일을 쉬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그는 컴퓨터 스위치를 켜지 않는 동안 무료함을 참을 수 없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는 회문回文, 소주 만병만 주소처럼 앞에서부터 읽으나 뒤에서부터 읽으나 같은 문장들을 만들었다. 물론 일본어로 문장을 만들었다. 그는 일본어 음절( 44) 1개당 하나씩의 회문을 만들었다. 여느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겠지만, 하루키는 각 회문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달아 도모자와 미미요의 귀여운 삽화를 곁들인 작고 귀여운 책으로 출판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늘어나는 저작 리스트에 또 한 권이 더해졌다.

 이 책의 제목은 <마타타비 아비타 타마>인데, 앞에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똑같이 읽힌다. ‘타마는 고양이 이름이다. 이런 회문은 아마도 외국어로 번역할 수 없을 것이다. 제목을 그대로 옮겨놓으면, ‘개다래나무로 목욕한 고양이 타마라는 뜻으로, 거꾸로 읽으면 마타 이양고 한욕목 로무나래다개가 된다.

 마침내 춥고 바람 부는 미코노스에서, C.D.B. 브라이언의 <위대한 데스리프>의 번역을 마친 후, 하루키는 자신의 내면에서 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 한 편에 시간을 들일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런 것들은 그의 글쓰기와 평정 상태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 돌아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서 받은 충격은 대단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러한 평정 상태는 깨졌다. 빨강과 초록으로 표지를 한 <상실의 시대>와 그 광고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출판사 고단샤가 건물에 빨강과 초록 현수막을 쳐놓은 것을 보고, 그는 끔찍할 정도로 무안했으며, 사무실에 갈 때마다 그것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운전 교습소에 오갈 때, 만원 지하철에 끼어 탈 때마다, 곧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을 피할 수 없었다. 하루키는 일본 어디에서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으며,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책이 50만 부가 팔렸을 때 물론 기뻤다. 자신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데 기뻐하지 않을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쁘기보다 놀랐다……. 10만 명은 상상할 수 있었지만, 50만명이라니. 게다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백만, 150, 2백만……. 그렇게 엄청난 숫자를 생각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나의 소설이 10만 부 정도 팔릴 때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고, 응원받는 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상실의 시대>가 백만 부 이상 팔리자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받게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런 위치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격도 그렇거니와, 그럴 자격도 없었을 것이다.

 이 기간(4월에서 10월까지)동안, 나는 혼란스럽고 짜증이 났으며,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와이에서 돌아와, 나는 그해 여름을 번역을 하며 보냈다. 내 글을 쓸 수 없을 때에도 번역은 항상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은 내게 일종의 치유가 되었다. 내가 번역을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다.

 




 

 체질적으로 글 쓸 기회를 놓치지 못하는 하루키는 이 겨험을 토대로 책을 한 권 냈다. 그것이 바로 <젊은 독자를 위한 단편소설 안내>(1997)로서,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이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가가 아님을 길게 역설해 두었다. 하루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가지는 자신을 권위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자신을 지칭할 필요가 있을 때는 이 책에서도 보쿠라는 말을 사용하며, ‘젊은 독자들에게 거의 코믹할 정도로 정중한 언어를 써서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강의를 하기보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이 작품들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손을 드십시오라고 말한다. 대상 작가들을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외에, 그는 독자들에게 문학을 사랑하라고 격려한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가진 누군가와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루키는 캠퍼스에서 여가를 활용하여 근대 일본사 지식을 더욱 쌓았다. 이언 부루머가 말하듯이, 하루키는 프린스턴대학교 도서관에서 노몬한 전투(1939)에 대해 조사했다. 그는 그것이 비이성적인 폭력 행위일 뿐만 아니라, 광적인 전체주의 사업에 개인을 희생시킨 완벽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양을 쫓는 모험>의 주제 가운데 하나와 같다. ‘현대 일본의 근본적인 멍청함은 다른 아시아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일본인들은 이제 평화를 사랑하지만 (혹은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사랑하지만, ‘밀폐된 체제는 전쟁의 쓰라린 체험 이후에도 사실상 변한 것이 없다.

 

 우리는 전쟁 전의 황제 체제를 폐지하고 평화 헌법을 수립했다. 그리고 그 결과, 분명 근대 시민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세계에서 살게 되었으며, 그 효율성은 우리 사회에 놀라운 번영을 가져왔다. 하지만 나(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는 지금까지도 사회 여러 부문에서 우리가 이름 없는 소비재로서 평화롭고 고요하게 말소되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는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일본이라는 소위 자유 시민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껍질을 한 겹 벗겨보면, 거기에서 숨쉬고 있는 옛날과 같은 폐쇄된 국수주의 체제 혹은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전도 유망한 사람들이 사회 내에서 보장된 지위를 쉽게 버리고 새로운 종교 집단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일본 교육 시스템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심각하게 보여주는 징후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그러나 이 옴진리교 교인들과 이전 교인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내가 분명하게 느낀 것은, 그들이 엘리트 일원임에도 불구하고그쪽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엘리트 일원이기 때문에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공허감이야말로 하루키가 가스 테러의 희생자로서 인터뷰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들의 삶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든 것이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나오는 하지메와 같이.) 사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인터뷰를 한, 서른여덟 살의 새우 수입상 이즈쓰 미쓰테루가 그 단편들을 착안하는 데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가스 테러가 난 다음 날, 저는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가스 중독을 겪은 다음 저는 사무실에서 집으로 전화해서, 있었던 일과 증세 등을 아내에게 전부 이야기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내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제가 겪은 상황 때문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상황을 직시하고, 이혼을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사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혼 얘기를 그렇게 빨리 꺼내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건은 체제에 대한 충격이자, 동시에 일종의 방아쇠였습니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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