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눈 이야기 1 - 8점
닐 도날드 월쉬 지음, 조경숙 옮김/아름드리미디어


1.
오늘 책은 좀 굉장하다. 왜냐하면 신의 음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까. 책의 제목인 '신과 나눈 이야기'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저자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2.
저자인 닐 도날드 월쉬는 5번 이혼에 매달 양육비를 보조해야 하는 자식만 9명이다. 게다가 건강까지 좋지 않은데다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를 하다 해고 되었다.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신에게 항의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신이 정말 그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3년을 받아쓴 내용이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된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으나 두께도 상당한데다 시리즈도 3권이나 된다.(최근 까지 나온걸 합하면 4권이다)

이런 황당무계한 스토리가 어디있으며 이런 책이 팔리기는 할까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전설의 베스트셀러'이자 '초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이 책이 한국에 소개 된 게 1997년, 지금이 2009년인데 아직까지 교보문고의 스테디셀러 에세이 코너에 이 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지방의 작은 출판사에서 찍어 내기 시작한 이 책은 입소문만으로 무서운 기세로 팔려나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뉴욕타임스에 무려 2년 동안이나 베스트셀러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수십개국으로 번역 되었으며 많은 연구모임까지 만들어졌고 급기야 2년 전에는 영화로 만들어진다. 

3.
이 책을 접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이다. 내가 이 곳에 책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은 2008년까지 모아 두었던 문장들이 송두리째 날아갔기 때문이다. 해서, 이제는 백업 차, 블로그에 나름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내용을 옮겨 놓고 있는데 그것만 덩그러니 옮겨 놓자니 심심할 것 같아 이런 뻘글을 적고 있다(웃음).

신과 나눈 이야기, 특히 언젠가 소개하게 될 똘스또이가 쓴 '인생이란 무엇인가'의 경우, 책이 꽤 두껍고 글씨도 작아 내용을 옮기는데 힘이 든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책의 접어 놓은 부분을 다시 읽으며(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는 페이지는 접어 놓고 다시 봅니다)엄청 느린 독수리 타법으로 컴퓨터에 옮겨 놓아야 하는데 굉장한 노가다가 아닐 수 없다(요즘은 다른 사람이 제법 쳐주고 있지만). 자연히 접어 놓은 부분이 많은 책은 힘들어서 작업을 미루다 보니 이제서야 소개하게 된다. 

어쨌든 10년 전에도, 지금도,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의 쓰여진 과정이 거짓이라 해도 영감을 주는 몇 안되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기독교 단체 등에서 많은 논란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종교적 관점에서 읽지 않아도 상당히 흥미롭다. 동 서양의 다양한 종교, 철학적 관점들이 녹아 들어가 있는 느낌인데 만약 저자 혼자 이 모든 걸 해냈다면 그게 더 대단한 일 아닐까.  




25. 신과 나눈 이야기 1 / 닐 도날드 월쉬 / 아름드리

 

 

 내 영적 자식들인 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너희는 키가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자신이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없다.

 궁극의 논리에 따르면,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이 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앎에서, 곧 너희 자신을 '창조주' 로 인식하는 경우에, 너희는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 uncreate 때까지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기 위해서 너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내 말을 잘 따라오고 있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 상태에 계속 머무르라.

 물론 너희가 너희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너희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바로 그것(순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영혼)일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벌였다. 즉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를 스스로 잊게 만든 것이다.

 너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덕분에 너희는, 말하자면 성(城) 안에서 그냥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 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너희가 완전한 선택권을 가진 존재, 즉 규정상 신(神) 인 존재로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너희가 신의 일부라는 얘기를 듣는 데서가 아니라 신의 일부가 되고자 선택하는 행동 속에서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문제라면 너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너희가 내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너희는 잊을 수는 있다.

 너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부분 member 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 remembrance 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를 재구성하는re-member 쪽을, 너희의 전체인 내(神)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너희의 직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알고 있으니) '자신'을 재구성하는 (기억하는 -- 옮긴이)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는 remind 것 (즉 그 사람들에게 다시 마음쓰는 re-mind 것) 이 너희의 직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영혼의 스승들이 하나같이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유일한 sole 목적이다. 다시 말해 너희 영혼 soul 의 목적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해 이렇게 물으면서 생각해보라.

"지금 이런 재난을 당하면서 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체험하고자 하는가? 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불러내고자 하는가?"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창조 도구일 뿐이며, 삶의 모든 사건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자신' 이 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네가 하는 걸 바꾸는 게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바꾸기보다 훨씬 더 쉽다.

 

 

 세상에는 내가 너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리라 주장한다. 무슨 그런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우리 사이의 진짜 관계가 아닐 뿐 아니라, 신을 조롱하는 짓이기도 하다.

 

 

 너희 이외에 어느 누구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왜, 어떻게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고 나쁘다고 규정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완벽하길 바라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랐더라면, 나는 너희를 너희의 고향인 절대 완벽상태에 그대로 남겨뒀을 것이다. 이 과정의 전체 핵심은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요, 참된 자신으로서, 그리고 너희가 참으로 되고자 하는 바대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선택권까지 갖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 스스로 너희 앞에 놓아준 선택권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너희를 벌주어야 하는가? 너희가 두번째 것을 선택하길 원치 않았다면, 왜 나는 첫번째가 아닌 것을 창조했는가?

 이것이 너희가 비난하는 신의 역할을 내게 배당하기에 앞서, 너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네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그렇다이다. 너희는 응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그러나 그 귀결을 깨닫는 것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리라.

 

 

내가

내면으로 가지 않는다면

나는 바깥으로

가게 되리라

 

 너희는 평생 동안 바깥으로만 가왔다. 하지만 너희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 봤자 뭔가 이루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가 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할 수 없는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가 가질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

 

 

 타인들의 영혼과 깊이 교감하라. 그러면 너는 그 영혼들의 목적,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이 치료해준 사람들과, 자신이 그 삶에 접촉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자기에게 온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내 치료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 모두를 치료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마구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했다면 그건 우주의 성스러운 법칙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즉 모든 영혼이 제 갈 길을 가게 하라는 법칙을.

 

그렇다면 그건 우리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돕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분명히 그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인도의 굶주리는 아이들이나 아프리카의 고통당하는 민중들, 혹은 그 외 다른 곳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학대 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 겁니다. 모든 인도적인 노력은 없어질 것이고, 모든 자선이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명백히 옮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개인이 절망에 빠져 우리에게 절규하거나 어떤 나라의 국민들이 도움을 간청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까?

 

 보다시피 그 질문은 스스로 답하고 있다. 만일 어떤 일이 명백히 옳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네가 "옳다" 와 "그르다" 에서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모든 건 오로지 너희가 그렇다고 보기 때문에 옳거나 그를 뿐이다. 어떤 것이 그 본질에서부터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아니라고요?

 

 "옳음" 이나 "그름" 은 본래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가치체계 속에만 있는 주관적인 판단이다. 너희의 주관적인 판단들로 너희는 자신의 자아를 창조한다. 너희는 너희 개인의 가치들로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증명한다.

 세계는 너희가 이런 주관적인 판단들을 내릴 수 있도록 하려고 지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만일 세계가 완벽한 상태로 존재한다면 자기창조라는 너희 삶의 과정은 종막을 고할 것이다. 그것은 끝날 것이다. 더 이상 소송이 없다면 변호사가 할 일은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더 이상 병이 없다면 의사가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더 이상 의문이 없다면 철학자가 할 일도 내일이면 끝날 것이다.

 

 

 당신도 이 책 전체를 불경(不敬)스럽다고 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특히 당신이 이렇게 지혜로운 이 정도로만 나타날 때는요.

 

 내가 설명해주지. 너희는 신이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만 삶에 나타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 그건 대단히 위험한 관념이다.

 그런 관념이 너희가 어디서나 신을 보는 걸 막는다. 만일 신이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보거나,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만 소리 내거나, 오직 한가지 방식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밤낮으로 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평생을 신을 찾는 데 보내겠지만, 그녀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는 그녀가 아니라 그를 찾고 있으니까. 이것(신을 남자로만 생각하는 것 -- 옮긴이) 은 한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가 범속함과 심오함 모두에서 신을 보지 못한다면 이야기의 반은 놓치고 있다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신은 슬픔과 웃음 둘 다에, 괴로움과 즐거움 둘 다에 존재한다. 모든 것 뒤에는 신성한 목적이 있고, 따라서 신성한 존재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한다.

 

 저는 한때 <신은 살라미(이탈리아 소시지 -- 옮긴이) 샌드위치다> 라는 책을 쓰기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아주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네게 그런 영감을 주었다. 왜 너는 그 책을 쓰지 않았느냐?

 

 신을 모독하는 것 같아서요. 아니면 기껏해야 끔찍할 만큼 불손한짓이 되거나요.

 

 경탄할 만큼 불손한 짓이겠지! 신은 "경건" 하기만 하다는 관념을 어디서 얻었는가? 신은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며,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며, 왼쪽이기도 하고 오른쪽이기도 하며, 불손하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한 존재다!

 신은 웃을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멋진 농담을 즐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신은 유머가 없다고 알고 있느냐? 분명히 말하지만 유머를 발명한 것은 신이다.

 너희가 나한테 말할 때는 꼭 숨죽인 어조로 말해야 하는가? 상스런 말이나 거친 언어는 내 영역 밖에 있는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내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말,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광경,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 중 일부는 내가 경멸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랑하리란게 너희 생각이냐? 분명히 말하노니, 나는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는다. 나한테는 그 어떤 것도 불쾌하지 않다. 그것이 삶이며, 삶은 선물이자, 형언할 수 없는 보물이요, 신성한 것들 중의 신성함이다.

 나는 삶이다. 왜냐하면 내가 곧 삶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측면은 신성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 까닭이 있는 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인간이 창조해낸 악의 경우에는요?

 

 너희는 신의 계획 밖에 있는 것을 창조할 수 없다. 단 한가지 생각도, 단 하나의 물체도, 단 한가지 사건도, 즉 어떤 종류의 체험도. 너희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창조하게 해주는 것이 신의 계획이니까. 신이 스스로를 신으로서 체험하는 것은 이런 자유 속에서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삶 자체를 창조한 이유가 이런 체험을 위해서였다.

 악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악도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선을 인식하는 것은 너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너희가 신의 일을 인식하고 행하는 것은 너희가 악마의 짓이라 부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추위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더위를 사랑하지는 않으며, 낮음보다 높음을, 오른쪽보다 왼쪽을 더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그것들은 모두 존재 전체의 부분들이다.

 나는 "악" 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선" 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히틀러는 천국으로 갔다. 이 점을 이해할 때 너희는 신을 이해할 것이다.

 

 

 완벽한 사랑이란 완벽한 흰빛이 일반 빛깔에 대해 어떤 관계인지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흰빛을 아무 빛깔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흰빛은 모든 다른 빛깔을 다 포함한다. 흰빛은 존재하는 모든 다른 빛깔이 섞인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증오, 분노, 정욕, 질투, 탐욕) 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감정의 합(合)이다. 그것은 그 모든 감정의 총화이며, 모든 것 everything 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봐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무슨 수로 연민을 느낄 수 있겠는가? 내가 한번도 체험하지 못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품고 있을 때 무슨 수로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밟아나가는 여행의 단순함과 그 외경스런 위대함을 함께 보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지 이해한다.

 인간 영혼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인간의 영혼이 한번도 아래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번도 오른쪽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왼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차가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며, 악을 거부하고서 어떻게 선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영혼은 뭔가가 될 수도 없다. 영혼이 자신의 숭고함을 체험하려면,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숭고함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숭고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은 공간에서만 숭고함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음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을 축복한다. 자신의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우선 나는 너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민감한 감성을 건드릴 진술에서 시작하겠다.

십계명 따위는 없다.

 

 오, 맙소사, 없다고요?

 

 그렇다, 없다. 내가 누구에게 명령한단 말인가? 나 자신에게? 게다가 왜 그런 계명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내가 계명들을 선포했다면 그것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겠는가? 어떻게 내가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명령까지 내리고, 또 그러고 나서는 지키고 앉아서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을 까봐 조바심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왕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어떤 통치자가?

 그러나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왕도 통치자도 아니다. 나는 단지 창조주일 따름이며, 경외스럽게도 창조주일 따름이다. 하지만 창조주는 지배하지 않는다. 그저 창조하고 또 창조한다. 계속해서 창조하기만 한다.

 

 

 "천국에 가는" 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가 이미 그곳에 있음을 아는 것만이 있을 뿐이며, 수고나 애씀이 아니라 받아들임과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이미 서 있는 곳으로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너희가 있는 곳에서 떠나야 하는데 그것은 그 여행 전체의 목적을 좌절시킨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네가 있고 싶은 곳에 가려면, 자기네가 지금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역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국에 가려고 천국을 떠난다. 그래서 지옥을 지나가고.

깨달음이란 어디도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너희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말하는 식의 천국이란 어디에도 nowhere 없다. 이 단어에서 w 와 h 사이를 약간 벌려보라. 그러면 너희는 천국이 지금 now...... 여기 here 라는 걸 알 것이다.

 

 

 고통의 문제로 돌아가기로 하죠. 우리는 고통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성자(聖者)들은 "말없이 고통을 겪는다" 는 생각은요?

 

 성자들은 "말없이 고통을 겪기"는 하나, 그렇다고 고통이 좋은 것이란 뜻은 아니다. 깨달은 사람이 되려는 이들은 고통이 신의 길이어서가 아니라, 고통이 신의 길에 관해 배우고 기억할 만한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확실한 표식임을 알기에 말없이 고통을 겪는다.

 참된 선각자는 결코 말없이 고통 받지 않는다. 그냥 불평 없이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참된 선각자가 불평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소위 참을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그냥 체험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을 고의로 학대하거나 파멸시키는 게 그리 고귀한 행동은 아니다. 또 자신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도록 네가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하는 것 역시 똑같이 온당치 못한 짓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네가 할 일은 그들을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너 없이 살아가는 법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너를 필요로 하는 한, 너는 결코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기에. 네가 그들을 진실로 축복하는 것은 오직 그들이 너를 불필요한 존재로 느낄 때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신에게 더없이 기쁜 순간은 너희가 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나도 안다, 나도 안다...... 내 말이 너희가 배워온 모든 가르침과 정반대라는 걸. 너희 선생들이 가르쳐준 신은 분노하는 신, 질투하는 신, 의존하길 요구하는 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신성(神性)을 향한 신경증적인 대용품이지. 절대로 신이 아니다.

 참된 선각자는 가장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선각자를 창조하는 create 사람이다.

 참된 지도자는 가장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참된 왕은 가장 많은 백성을 거느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백성을 왕위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참된 선생은 가장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갖도록 끌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참된 신은 가장 많은 머슴을 거느린 존재가 아니라, 가장 많은 이들에게 봉사하는 존재, 그리하여 그들 모두를 신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더 이상 자신의 신민(臣民)을 거느리지 않고, 신은 도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두가 깨닫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의 목적이요, 영광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행복한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는 점을 이해하길 바란다. 너희가 "구원"받지 않을 길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만 빼고는, 어디에도 지옥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연인으로서 너희는, 자신의 사랑을 꽉 붙들어매는 아교풀로 만들지 말고, 처음에는 끌어당겼다가 돌아서면 반발하는 자석이 되게 하라.

 너희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너희를 꽉 붙들어야 한다고 믿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 이보다 더 진리에서 먼 일은 없으며, 이보다 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관계, 즉 삶 전체의 목적은 딱 하나뿐이다. '참된 자신'이 되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 특별한 누군가가 함께 하기 전까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고 말하면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기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더 나쁜 건 그런 말은 상대방에게 자기 아닌 온갖 종류의 존재가 되라는 극심한 압박이 된다는 점이다.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상대방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까지 그런 존재가 되려 하고 그런 일들을 해낸다. 그러나 결국 상대방은 네가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완성할 수 없게 되며, 내가 부여해준 역할들을 더 이상 해낼 수 없게 된다. 원망이 쌓이고 분노가 따른다.

 마침내 이 특별한 누군가는 자신(과 관계)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자아를 내세우기 시작하고, 좀 더 '참된 자신' 의 모습에 따라 행동한다. 네가 상대방더러 "신짜 변했다" 고 말하는 게 대략 이 시점이다.

 특별한 누군가가 이제 자신의 삶에 들어오고 나니, 자신이 완전해진 것 같다는 말은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한다. 그러나 관계의 목적은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 데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서 특별한 타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타인이 없다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선각자는 재앙의 씨앗들(과 모든 체험들) 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걸 알기에 재난을 축복한다. 그리고 선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두번째 목표는 언제나 성장이다. 왜냐하면 충분한 자기실현을 경험하고 나면 그 이상이 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삶에서 보장을 원한다면, 너희는 삶을 원하는 게 아니다. 너희는 이미 쓰여진 각본대로 시연(試演)하고 싶을 뿐이다.

 삶은 그 본성에서 어떤 보장도 가질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삶의 목적 전체가 훼손당할 것이다.

 

 

 그런데 왜 제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가요?

 

 이미 말했듯이 네 말은 요정의 명령이다. 그런데 네 말은 "나는 성공을 원한다" 였다. 그럴 때 우주는, "알았다, 그렇게 하라" 고 말한다.

 

 그래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라. "나"라는 말은 창조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다. "나는"이라는 두 단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 말들은 우주에 보내는 진술이며, 명령이다.

 이제 "나" 라는 말(이 말은 '위대한 나 the Great I Am' 를 불러들인다) 뒤에 따라오는 건 뭐든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나" + "성공을 원한다 want" 는 성공이 모자라는 wanting 노를 만들어내며, "나" + "돈을 원한다" 는 돈이 모자라는 너를 만들어낸다. 생각과 말에는 창조력이 있기에 다른 결과는 나올 수 없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네가 성공과 돈을 원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서로 일치되고, 따라서 너는 확실히 이것들이 모자라는 체험을 갖게 된다.

 알겠느냐?

 

 맙소사! 정말로 그렇게 되나요?

 

 물론이다. 너희는 강력한 힘을 지닌 창조주다. 그런데 너희가 예컨데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서 딱 한번 한 생각이나 말이라면, 그것들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끔 그러하듯이 "뒈져라!" 거나 "지옥에나 가버려!" 라거나, 그밖에 별로 고상하지 못한 말들을 생각하거나 뱉었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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