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눈 이야기 2 - 8점
닐 도날드 월쉬 지음, 조경숙 옮김/아름드리미디어



책 소개와 관련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 1



26. 신과 나눈 이야기 2 / 닐 도날드 월쉬 / 아름드리

 

 영혼은 느낌 feelings 으로 말한다. 네 느낌에 귀를 기울이고, 네 느낌대로 따르며, 네 느낌을 존중하라.

 

 

 기시감(期視感)요!

 

 그렇다. 또는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평생 알고 지냈던 것 같은, 그 사람을 영겁의 시간 동안 알고 지냈던 것 같은 멋진 감정!

 그것은 장엄한 느낌이고, 경이로운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된 느낌이다. 너는 그 영혼을 항상 알고 지냈다!

 항상은 바로 지금의 일이다!

 그렇게 너희는 물레가락 위에 놓인 네 "종잇장" 에서 자주 올려다도 보고 때로는 내려다도 본다. 또 다른 종잇장들도 보곤 한다! 너희는 그곳에서 자신을 보곤 한다. 종잇장마다 네 일부가 있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삶의 목적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너희는 신을 기쁘게 하며, 또한 그녀를 영광스럽게 한다.

 

 왜 자꾸 "그녀"라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은 여자입니까?

 

 나는 "그" 도 "그녀" 도 아니다. 내가 종종 여성대명사를 사용하는 건 편협한 너희 사고방식에서 너희를

뒤흔들어 떼어내고자 함이다.

 신을 한 가지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너희는 다른 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그건 크나큰 잘못이 되리니.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천국에 갔다.

 지옥은 없다. 따라서 천국말고 그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다.

 그의 행동들은 너희가 잘못mistake 이라고 할 만한 것들, 즉 진화되지 않은 존재의 행동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유죄판결로 벌줄 수는 없다. 그것은 교정할 기회, 진화할 기회를 제시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히틀러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이 어떤 해악이나 손상을 입힌 건 아니다. 그 영혼들은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처럼 지상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단지 그 영혼들이 들어선 기쁨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시기상조였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잘못되었다" 는 너희 주장에는, 예정되지 않은 때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일이 완벽하다. 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너희가 모든 것에서, 너희가 동의하는 것들만이 아니라,(아마도 특히나)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에서 까지 완전한 완벽성을 볼 때, 너희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너는 히틀러에 대해서 물었다. 너희가 '히틀러 체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집단의식 덕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한 집단 -- 이 경우에는 그의 국민들 -- 을 조종했던 건, 그 교활하면서도 능수능란한 수사(修辭) 덕분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이것은 편리하게도 그 모든 비난을 히틀러의 발 밑에만 던지는 격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 위치에.

 하지만 몇백만명의 협력과 지지와 자발적인 복종이 없덨더라면, 히틀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게르만인 이라고 부르는 그 2차 집단은 당연히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위 인류라는 더 큰 집단 역시 어느 정도 그렇게 해야 한다. 설령 그들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쳐도, 그들은 가장 차가운 마음을 가진 고립주의자들조차 더 이상 무시해버릴 수 없을 만큼 독일에서의 고통이 광범하게 확산될 때까지도, 그것을 무심하고 냉담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찌운동 성장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던건 패거리 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 이다.

히틀러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지, 그가 그 순간을 창조한 건 아니다.

 이것의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해서 분리와 우월성에 대해 떠들어대는 집단의식은 대중이 동정을 잃게 만드니, 동정을 잃게 되면 그 다음엔 당연히 양심을 잃기 마련이다.

 완고한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패거리 개념은 남들의 곤경은 무시하면서도, 자기네 곤경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책임지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복수와 "교정" 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찌식 해결책, 즉 그것을 "교정하려는" 시도였다.

 '히틀러 체험' 의 끔찍함은 그가 인류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류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용납했다는 사실에 있고, 그 체험의 경악스러움은 히틀러가 나섰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섰다는 사실에도 있으며, 그 체험의 부끄러움은 히틀러가 몇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히틀러가 제지당하기

전에 몇백만의 유태인들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에도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 체험'의 목적은 인류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너희는 주목할 만한 선생들을 모셔왔으니, 그들 모두는 '참된 자신'을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기회들을 너희에게 제공했다. 이 선생들은 너희에게 인간 잠재력의 최고치와 최저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생생하고 숨막히는 예들을 통해, 인간이 된다는게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그런 체험을 겪으면서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기존의식 상태대로라면 너희 중 다수가 갈 수 있고 가게 될 곳이 어디인지 보여주었다.

 잊지 마라, 의식만이 전부이고, 너희의 체험을 창조하는 건 의식이다. 집단의식은 워낙 강력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결과를 빚을 수도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추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선택은 언제나 너희 것이다.

 만일 네가 너희 집단의 의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라.

 남들의 의식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 자신이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만일 네 보기로 충분하지 않다면 너 자신의 집단을 형성하라. 너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험하기를 원하는 의식이 발단이 되어라. 네가 그렇게 할 때 그들은 그런 의식을 체험하리니.

 그것은 너와 더불어 시작된다. '모든 것' 이, '모든 일' 이.

너는 세상을 바꾸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 너 자신의 세계 속에 있는 것들을 바꾸어라.

 히틀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금쪽 같은 기회를 너희에게 주었다. '히틀러 체험' 은 '그리스도 체험' 처럼, 그것이 너희 자신에 대해 어떤 의미와 진리를 너희에게 드러내는가라는 면에서 심오하다. 하지만 히틀러든, 징기스칸이든, 하레 크리슈나든, 아틸라 훈(5세기경 훈족의 왕 -- 옮긴이) 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든, 이같은 사회적 자각은 그들에 대한 너희의 기억이 살아 있을 때만 살아 있을 것이다.

 유태인들이 대학살 기념비를 세우고 너희에게 그것을 절대 잊지 말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희들 누구에게나 히틀러가 약간씩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오직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든 운디드 니(미국 인디언 대학살이 자행된 곳 -- 옮긴이) 에서든, 한 민족을 지워버리는 것은 한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Wiping out a people is wiping out a people.

 

 그래서 히틀러를 우리에게 보내신 겁니까? 우리에게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함,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최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교훈을 주시려고요?

 

 내가 히틀러를 너희에게 보낸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너희가 창조했다. 그는 너희의 '패거리 의식' 속에서 나타났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 체험의 교훈이다.

 '히틀러 체험'을 창조한 것은 "우리" 대 "그들", "우리 " 와 "그들" 이라는 분리와 차별과 우월의식이다.

 '그리스도 체험'을 창조한 것은 "네 것" / "내 것" 이 아니라 "우리 것" 이라는 '신성한 형제애' 와 통일과 '하나됨' 의 의식이다.

 고통이 "너희 것" 일 뿐 아니라 "우리 것" 이기도 할 때, 기쁨이 "내 것" 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것" 이기도 할 때, 그리하여 삶의 체험 전체가 '우리 것' 이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삶의 체험 전체 the whole 는 진실로 말 그대로 온전한 a whole '삶의 체험' 이 된다.

 

 왜 히틀러는 천국에 갔습니까?

 

 히틀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그냥 그가 했던 일을 했을 뿐이다. 꽤 여러 해 동안 몇 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는 걸 다시 상기해보라. 그러할 때 어찌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네가 미친 사상을 퍼뜨렸는데,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네게 동조했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자신이 그렇게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마침내 히틀러가 "잘못했다" 고 결정했다. 말핳자면 세상 사람들은 '히틀러 체험' 과 관련해서 '자신들이 누구이고' , '자신들이 어떤 존재가 되려는지' 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내린 것이다.

 기준자를 치켜든 건 그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자아상을 재고 한정할 수 있도록 매개변수, 경계선을 설정했다. 그리스도 역시 같은 일을 했다. 그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 있었고, 또 다른 히틀러들이 있었으며, 앞으로도 또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경계하라. 네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다닐 때조차도 높은 의식을 가진 사람과 낮은 의식을 가진 사람, 양쪽 다가 너희 사이를 걷고 있으니. 자, 너는 어떤 의식과 사귀려느냐?

 

 저는 아직도 어떻게 히틀러가 천국에 갈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한 일로 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첫째,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이해하고, 공포가 아니라 기쁨임을 이해하라. 그것은 막 내림이 아니라 막 올림이다.

 너희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삶이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것이 삶이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장대하고, 평화와 지혜와 기쁨이 너무나 가득하여, 설명하기 어렵고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그러므로 너희가 이해해야 할 첫번째 것은, 내가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히틀러는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는 고통을 입힌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끝냈다.

 "인생은 고해다" 고 말한 사람은 부처였다. 부처는 옳았다.

 

 하지만 제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히틀러는 자신이 실제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고 여겼다구요!

 

 아니다. 그는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기 국민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각자의 세상형에서 보면,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네가 히틀러는 미친 행동을 했고, 자신이 미쳤다는 걸 줄곧 알고 있었던 걸로 여긴다면, 너는 인간 체험이 얼마나 복잡한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히틀러는 자기 국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건의 광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그에게 동조했다는데!

 너희는 히틀러가 "잘못했다" 고 선언했다. 좋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자신을 규정하게 되었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으니, 좋다. 하지만 너희에게 이런 걸 보여주었다고 해서 히틀러를 비난하지는 마라.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다.

 너희는 뜨거움 없이 차가움을 알 수 없고, 아래 없이 위를 알 수 없으며, 오른쪽 없이 왼쪽을 알 수 없다.

이 사람은 비난하고 저 사람은 축복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십세기 동안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를 비난해왔다. 그들은 '원죄' Original Sin 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하지만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것은 '원축복' Original Blessing 이었다. 선악에 대한 지식을 함께 한 이 사건이 없었다면, 너희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았겠는가!

실제로 소위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악" 도 없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영원한 완벽의 상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낙원이었다. 하지만 너희는 그것이 낙원임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완벽으로 체험할 수 없었다. 그것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 이래도 너희는 아담과 이브를 비난하겠느냐? 아니면 그들에게 감사하겠느냐?

 그리고 말해 봐라. 히틀러를 내가 어찌 대해야 하겠느냐?

 내가 이르노니, 신의 사랑과 신의 자비와 신의 지혜와 신의 용서와 신의 의도와 신의 목적은 가장 극악한 범죄와 가장 극악한 범죄자들까지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다.

 네가 이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너는 이제 막 자신이 무엇을 찾으러 이곳에 왔는지 배웠다.

 

 

 네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자신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것은 "네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그것이 "체험될" 때만 "일어나고", 모든 일은 그것을 "알" 때만 "체험된다".

 이제 네 "미래"를 흘낏 일별하는, 한 찰라 "알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때 일어나는 일은 네 영혼, 즉 너의 비(非) 물질 부분이 그냥 '시공간 연속체' 위의 다른 지점으로 급히 달려가서 그 순간이나 그 사건의 일부 잉여 에너지, 일부 이미지나 인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너는 이것들을 "느낄" 수 있다. 아니면 때로는 형이상학적 재능을 발달시킨 다른 사람이 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이런 이미지와 에너지들을 "느끼거나"  "보기도" 한다.

 자신의 "미래" 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에서 떨어져라! 그냥 그것에서 멀어져라! 그 순간 너는 자신의 체험을 바꾸게 되며, 네가 내쉬는 모든 숨은 구원의 한숨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전에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배신하는 것

 역시

 배신이긴

 마찬가지다

 그것은

 '최고의 배신' 이다.

 너희의 세익스피어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너 자신에게 진실되려면,

 밤이 낮을 따르듯, 자신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그러면 너는 누구에게도

 거짓되지 않으리니.

 

 

 네 내면에 존재하는 가장 고귀한 진실의 살아 숨쉬는 본보기가 되라.

 잔신에 대해 겸손하게 말하라. 남들이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을 허풍으로 잘못 받아들이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하라. 남들이 네가 단지 주의를 기울여주기만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온화하게 말하라. 모두가 사랑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터놓고 말하라. 누구도 네가 뭔가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솔직히 말하라. 누구도 너를 오해하지 않도록.

 자주 말하라. 네 말이 참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존중하면서 말하라. 누구도 굴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사랑으로 말하라. 모든 음절이 치유하는 힘을 갖도록.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나에 대해 말하라.

 네 삶이 은혜가 되게 하라. 그리고 항상 기억하라, 너희는 은혜임을!

 네 삶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네가 그 삶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도록 하라. 네가 은혜가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언제나 은혜일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언제나 은혜이기에 -- 하지만 때때로 너희 자신을 모를 수는 있다.)

 누군가 예기치 않게 네 삶 속으로 들어올 때, 그 사람이 네게서 받았던 은혜를 찾아보라.

 

 

 국가들 사이의 불화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불화란 건 단순히 개성을 드러내는 표식, 바람직한 표식일 뿐이니. 하지만 불화를 폭력으로 해결하는 건 엄청난 미숙성을 드러내는 표식에 지나지 않는다.

 폭력적인 해결을 피하려는 국가들의 의지만 있다면, 폭력적인 해결을 피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 엄청난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의지가 생기리라고 생각할 테니만, 너희 같은 미개 분화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자신이 논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너희는 논쟁을 벌일 것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너희는 전쟁을 벌일 것이다.

 

 

 왜 사람들은 당신을 믿지 못할까요?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

 

 왜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죠?

 

 그렇게 들었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누구한테서요.

 

 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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