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 8점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돌베개




상해임시정부를 방문하기 전,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책이 백범일지다. 임시정부를 방문하고 하니,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아닌, 제대로 된 백범일지를 완독하고 싶었다.(여러 출판사에서 백범일지가 나왔지만, 돌베개 출판사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냥 집어 들었다.) 

뜬금 없지만, 이 글을 쓰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인 '여보, 나 좀 도와줘'가 생각난다. 두 사람 책에는 재밌는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어... 이런 걸 기대한게 아닌데...' 하는 부분이 많다는 게다.  

보통 정치가의 책은 95%가 자기자랑이다. 나머지 3%는 '자기자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반성, 그리고 2%는 자기자랑을 죽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적인 결함을 강조하며 매력을 높이는 수작이다. 다른 나라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정치가가 낸 책은 신기하게도 이 공식에 맞아 떨어진다.  

두 사람의 책은 좀 이상하다.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진짜' 자기고백이나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내용이 많다. 후세 사람이 봤을 때, '뭐야. 위대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생각도 하고 이런 짓도 하고... 에이...'하는 느낌이 들게 할 글이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 정적들이 봤으면 '옳다쿠나!'하고 공격대상으로 쓸만한 내용을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들을 더 인정하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한다. 김구 같은 경우, 생애 마지막에 가서야 '진정한 민족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꽃피운 사람이다. 물론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라는 말은 아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정치가로서의 평가는 그에 비해 좀 박하게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살 많은 이승만에게 꼬박 꼬박 형님이라 부를만큼 전통적인 신의를 중요시했던 김구. 남한 단독 선거가 영원한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거라고 말했지만 이승만의 단정론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데올로기 정체성이 약했던 김구. 

하지만 마지막 1년, 정치가로서 약점이라고 생각 될 수 있는 이 모든 걸 뒤엎어 버렸다. 생애의 끝자락에서 정말로 이념을 뛰어 넘었고, 부분이 아닌 전체를 생각하는 민족 지도자가 된 것이다. 목숨을 건 독립운동,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뜨거운 진정성, 거기에 마지막 1년이 더해져 대한민국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탄생했다.

 





33. 백범일지 / 진순 주해 / 돌베개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으로서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의미한다. 내가 만일 민족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貴格)·부격(富格)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賤格)·빈격(貧格)·흉격(凶格)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沁人)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대강 지난 일을 말해 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유해각(柳海珏)·유해순 형제는 크게 놀라면서, 과연 쾌남아다운 행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내게 강권하기를, 본가로는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하여야 하오. 그래야 사나 죽으나 값이 있지,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오.”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모월 모일에 일본인을 살해한 일이 있느냐?”

 본인이 그날 그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이 있고.”

 나의 대답을 들은 경무관(警務官)·총순(總巡)·권임(權任) 등은 일제히 얼굴을 들고서 묵묵히 서로를 쳐다보았고, 법정 안은 비상히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내 옆 의자에는 와타나베라고 하는 왜놈 순사(巡査)가 걸터앉아서 나의 신문 과정을 방청인지 감시인지 하고 있다가, 신문 시작부터 법정 안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며 통역으로 그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서,

이놈!”

하고 큰 소리로 사력을 다해 호령하였다.

 지금 소위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니, 국제공법(國際公法) 어디에 국가간의 통상·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살면 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없이 다 죽여 우리 국가의 치욕을 씻으리라!”

 통렬히 꾸짖은 서슬에 겁이 났던지 와타나베는 칙쇼우! 칙쇼우!” 하고 욕을 하며, 대청 뒤쪽으로 도망하여 숨고 말았다.

 

 

 나는 감옥에 들어가 옥중에서도 한 번 큰 소동을 일으켰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다시 도적죄수간에다가 두고 차꼬를 채워두는 데 대해 크게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관리를 보고 호통쳤다.

 전에는 내가 아무 의사를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나에 대한 대우를 강도로 하나 무엇으로 하나 잠잠히 입 다물고 있었다. 허나 오늘은 정당하게 내 뜻을 발표하였음에도 아직도 나를 이다지 홀대하느냐? 땅에 금만 그어놓고 그것을 감옥이라 하여도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초에 도망하여 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왜놈을 죽였던 그 자리에 내 주소와 성명을 갖추어서 포고(布告)하고, 또 내 집에 와서 석 달여나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너희 관리의 무리들이 왜놈을 기쁘게 하기 위해 내게 이런 나쁜 대우를 하느냐?”

 이런 말을 하면서 어찌나 요동을 쳤던지, 한 차꼬 구멍에 같이 발목을 넣고 있던 자들이 좌우로 네 사람씩 도합 아홉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말을 더 보태서 과장하여 소리지르기를, 내가 한 다리로 좌우 여덟 사람의 차꼬 전부를 들고 일어서는 바람에 저희들의 발목이 다 부러졌다고 고함고함 야단이었다.

 김윤정이 즉시 감옥 안에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애꿎은 간수를 책하였다.

 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다른데 왜 도둑 죄수들과 섞여 있게 하느냐? 하물며 그는 중병에 들어 있지 않느냐? 즉각 좋은 방으로 옮겨 몸을 풀어주고 너희들이 잘 보호하여 드려라.”

 그때부터 나는 감옥 안의 왕이 되었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달은 것은, 고선생이 전에 조상께 제사지내면서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쓴 축문을 읽던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洋學)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일이 그리 잘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양화진 나루에 당도하였다. 날도 저물었고 배도 고프고 뱃삯 줄 돈도 없었다. 동네 서당에 들어가 선생과 만나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내 나이가 어린 것과 의관을 못 갖추어 입은 것을 보고는 초면에 경어를 사용치 않고 낮춤말을 사용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을 나무랐다.

 남의 사표가 되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그처럼 교만하니, 어찌 아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겠소? 내가 일시 운수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이 모양으로 선생을 대하게는 되었으나, 결코 선생에게 하대를 받을 사람은 아니오.”

 그 선생은 사과하고 내력을 물었다.

 나는 경성 사는 누구인데 인천에 볼일이 있어 가던 차, 돌아오는 길에 벼리고개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장을 다 빼앗겼소. 집으로 가는 길에 날도 저물고 주리기도 하여 예절을 아실 만한 선생을 찾아왔소.”

 선생은 함께 있는 것을 승낙하고 토론으로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선생이 학동 한 명에게 편지를 주어 나루 주인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무료로 양화진을 건너 경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의아해 했다.

 너 같은 난봉꾼을 누가 도와주어서 그렇게 사느냐?”

 작은아버지 보시기에 저의 난봉은 위험하지만, 난봉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게지요.”

 

 

 나는 신체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달아매고 때릴 때는, 박태보(朴泰輔)가 보습 단근질 당할 때에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한 구절을 암송하였다. 겨울철이라 그리하는지 겉옷만 벗기고 양직(洋織) 속옷은 입힌 채로 결박하고 때릴 때,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다 벗고 맞겠다.”

며 매번 알몸으로 매를 받아서, 살이 벗겨질 뿐 아니라 온전한 살가죽이라곤 없었다.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 냄새가 코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받아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하여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어느날 간수가 와서 나를 면회소로 데려갔다. 누가 왔는가 하고 기다리노라니, 판자 벽에서 딸깍 하고 주먹이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렸다. 그리로 내다보니 어머님이 서 계셨고, 곁에 왜놈 간수가 지키고 섰다.

 근 일고여덟 달 만에 면회하는 어머님은 태연하신 안색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네 처와 화경이까지 데리고 와서 면회를 청했는데, 한번에 한 사람밖에 허락하지 않는대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있다. 우리 세 식구는 평안히 잘 있다. 옥중에서 몸이나 잘 있느냐? 우리 근심 말고 네 몸이나 잘 보중하기 바란다. 만일 식사가 부족하거든 하루에 사식 두 번씩을 들여주랴?”

 오랜만에 모자 상봉하니 나는 반가운 마음과 더불어, 저같이 씩씩한 기절(氣節)을 가지신 어머님께서 개 같은 원수 왜놈에게 자식 보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고 생각하니 황송한 마음이 그지없다. 다른 동지들의 면회 정황을 들어보면, 부모 처자가 와서 서로 대면하면 울기만 하다가 간수의 제지로 말 한마디도 못하였다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 어머님은 참 놀랍다고 생각된다. 나는 17년 징역 선고를 받고 돌아와서 잠은 전과 같이 잤어도 밥은 한 끼를 먹지 못한 적이 있는데, 어머님은 어찌 저렇게 강인하신가 탄복하였다.

 나는 실로 말 한마디를 못하였다. 그러다 면회구가 닫히고, 어머님께서 머리를 돌리시는 것만 보고, 나도 끌려 감방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이 나를 대하여서는 태연하셨으나, 돌아서 나가실 때는 반드시 눈물에 발부리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님이 면회 오실 때 아내와는 물론 많은 상의가 있었을 것이요, 내 친구들도 주의를 해드렸을 듯하지만, 일단 만나면 울음을 참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인데, 어머님은 참 놀라운 어른이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산 것이 아니고 살아져서 산 것이며, 죽으려도 죽지 못한 이 몸이 끝내는 죽어져서 죽게 되었도다.

 

 

 나의 신조는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로 인하여 종종 해를 당하면서도 천성이라 평생 고치지 못하였다.

 

 

 그는 경성 용산 출생으로 성명은 이봉창(李奉昌)이라 하였다. 나는 그에게 상해에 독립정부가 있으나 아직 운동자들을 입히고 먹일 역량이 없으니, 가지고 있는 돈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이봉창이 대답하기를.

 지금 소지하고 있는 돈은 여비하고 남은 것이 불과 10여 원입니다.”

 그러면 생활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소?”

 그런 것은 근심이 없습니다. 저는 철공장에서 작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을 하면서는 독립운동을 못합니까?”

 이 말에 답변하지 않고 나는 그에게 오늘은 해가 저물었으니 근처 여관에 가서 자고, 다음날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곧장 민단 사무원 김동우(金東宇)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여관을 잡아주라 하였다.

 그는 말에 절반은 일어이고, 동작 또한 일본인과 흡사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며칠 후 그는 민단 주방에서 민단 직원들과 술과 국수를 사서 같이 먹다가, 술이 얼큰하여 반쯤 취기가 돌자 민단 직원들과 주담(酒談)을 하기 시작하였다. 주고받는 말소리가 문 밖까지 흘러나왔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황을 왜 못 죽입니까?”

 

 

 1931 12월 중순경 나는 이봉창을 비밀리에 불란서 조계 중흥여관으로 초청하여 하룻밤 같이 자면서 일본행에 대한 제반 문제를 상의하였다. 나는 돈을 준비하는 이외에 폭탄 두 개를 구입하였다. 하나는 왕웅(王雄)을 시켜 병공창(兵工廠)에서 구입하였고, 다른 하나는 김현(金鉉)을 시켜 하남성의 유치(劉峙)에게서 구입하여 몰래 감추어 두게 하였다. 하나는 일본천황을 폭살하는 데,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자살이 실패하여 체포될 때를 대비하여, 신문에 응할 문구까지 지시하였다.

 다음날, 나는 품속에서 지폐 한 뭉치를 꺼내주며 이 돈으로 일본행 준비를 다 해놓고 다시 오라고 작별하였다. 이틀 후 중흥여관에 다시 와서 마지막 밤을 같이 잘 때, 이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그저께 선생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 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그 길로 함께 안공근 집에 가서 선서식을 거행하고 난 뒤, 나는 폭탄 두 개와 돈 300원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은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 이 돈은 동경 가시기까지 다 쓰시고, 동경 도착 즉시로 전보하시면 다시 송금하오리다.”

 그리고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이에 나 역시 억지로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그후 남경으로 모셔다가 1년을 경과한 후 남경 함락이 가까워져 장사(長沙)로 모시고 갔다. 남경에서 어머님 생신 때 청년단과 우리 동지들이 돈을 모아 헌수(獻壽) 하려는 눈치를 알아챈 어머님은,

 그 돈을 나에게 주면 내 입맛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

하셔서 돈으로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드린 돈에 도리어 보태어 권총을 사서 일본놈 죽이라며 쳥년단에 하사하셨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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