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눈으로 보는 일본 - 8점
황영식 지음/모티브




전공이 전공인지라 이런 책만 보면 무조건 사게 된다. 일본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을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다루고 있다. 간만에 보는 깔끔한 일본 입문서다.    



34. 맨눈으로 보는 일본 / 황영식 지음 / 모티브

 

 1995년 고베 지진 당시 아나운서가 사망자 명단을 읽으며 군데군데 ‘~일까요라며 어물거리던 모습은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본어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도 한때 한자 무용론이 무성했다. 패전 직후인 1946년 연합군총사령부는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미국 교육전문가 27명으로 이뤄진 교육 사절단을 불러 들였다. 당시 이들의 보고서는 초중등 6·3·3 학년제나 남녀 공학, 학부모회(PTA) 등 일본 교육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보고서는 1한자를 줄이거나 2한자를 폐지하고 가나로만 쓰거나 3한자와 가나를 모두 없애고 로마자로 대신하는 방안 등 당시 일본 내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어쨌든 한자는 전폐해야 한다고 제안해 논란을 불렀다.

 이런 논의는 메이지 유신 직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이는 구미가 알파벳 26자만으로 문자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데 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한자 등 3종류의 많은 글자를 익혀야 하는가라는 당연한 의문에서 비롯했다. 나중에 문부성 장관을 지낸 모리 아리노리는 1872년 글자뿐만 아니라 일본어 자체를 포기하고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까지 주장했으니 한자에 대해서야 말할 것도 없다.

 

 

 중국산에 비해 은은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자랑한 한국 도자기에 대한 열기도 와비차 전통과 뗄 수 없다. 무로마치(1338~1573) 시대 후기 들어 가장 각광을 받았던 찬그릇은 고라이차완으로 불린 한반도산 도자기였다. 일본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조선 상류층이 쓰던 고급 백자가 아니라 서민들이 생활용기로 쓰던 잡기였다. 현재 일본 최고의 찻잔으로 꼽히는 이도차완은 누가 봐도 당시 조선 서민들의 막사발이었다. 우리는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던 이런 막사발을 찻그릇으로 확보하려는 일본 상류층의 경쟁은 임진왜란의 중요한 동기로 꼽힐 정도로 치열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도’, 즉 전속 차전문가는 일본 다도의 완성자로 유명한 센노 리큐 였다. 어느날 그는 오사카 항에서 조선에서 수입된 막사발을 대하고 커다란 감동을 받고 이를 도요토미에게 바쳤다. 그것이 조선 막사발이 당시 일본의 상류층에서 최고의 찻그릇으로 여겨지는 계기가 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최고의 다도 권위자와 정치 실력자의 평가였기 때문이다.

 

 

 이때 상당한 힘을 써야 하며 서로 힘을 복돋우기 위해, 또 축제의 기본 장치인 감흥의 고조를 위해 왓쇼이, 왓쇼이라고 함께 외친다. ‘왓쇼이가 한국어의 왔소에서 왔다는 것은 통설이 된 지 오래다.

 

 

 본고장인 파리나 뉴욕보다 도쿄(東京)가 세계적 명품을 접할 기회가 많다는 얘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거품 경제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말 국제 경매시장을 싹쓸이하듯 사들인 미술품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어 웬만한 전시회는 언제든 기획할 수 있다. 또 세계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이 수시로 일본 초대전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파칭코는 일본 전자산업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0년대 이후 마이크로칩과 액정 표시장치의 본격적 보급은 거의 파칭코의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하루가 멀게 새로운 기종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그때마다 첨단 부품을 대량으로 소비하고 있다.

 또 파칭코는 재일동포 사회 성장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파칭코점은 물론 기계 생산과 유통, 수리 등을 합친 전체 시장의 80퍼센트를 우리 동포들이 장악하고 있다. 재일동포들은 패전 직후 잿더미를 뒤져 고철과 유리, 판자 등 폐품을 찾아 수동식 파칭코 기계를 만들었다. 밤을 새워 가며 두드리고, 펴고, 붙이고, 못을 박는 힘들고도 시끄러운 작업이었다. 파칭코점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고 사업의 성격상 늘 폭력단에 시달려야 했다.

 요즘으로 치면 3D 업종이니 일본인들은 외면했다. 반면 심한 차별 속에서 정상적인 사회 진출의 기회를 박탈당한 재일동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탈출구였다. 일본 경제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파칭코 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에 따라 재일동포의 경제력이 커졌고 일본 사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호루몬이란 묘한 이름은 곱창을 구울 때 나오는 백색의 기름기가 내분비물질인 호르몬과 닮았다거나, 영양이 풍부해 호르몬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 도 있다. 그러나 간사이 지역의 사투리인 호루몬’, 즉 쓸모가 없어 버리는 물건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보다 그럴 듯하다. ‘호루몬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패전 직후였다. 일본인조차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던 때였으니 재일동포의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이 고향의 풍습대로 도살장에서 버려지는 내장을 수습해 먹기도 하고 암시장의 식량을 사기 위해 팔기도 했던 것이 보급의 계기였다.

 

 

 히노키는 최고의 건축재이자 내장재다. 변재는 연한 노란빛을 띠고 심재는 연한 갈색이나 붉은 색을 띤다. 스기보다 재질이 단단하고 은은한 광택과 향기가 있어 고급 목재에 걸맞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궁전이나 절, 신사 등의 건축재로 쓰여 왔다. 특히 가공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고 내구성이 뛰어나 불상 등 각종 조각이나 목기에 이용됐다.

 지금도 일본인은 히노키로만 지은 집을 최고급 주택으로 치며 최소한 천장이나 문창살이라도 히노키로 하려고 애쓴다. 특히 은은한 향기를 높이 치기 때문에 히노키로 만든 목욕탕인 히노키부로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한편 초선 정치인의 국회 본회의 첫 질의나 연예인의 본격적 데뷔 무대를 흔히 히노키부타이라고 한다. 히노키로 만든 무대는 아무나 설 수 없는 최고급 무대이기 때문이다.

 

 

 인간 진화사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니혼자루의 뛰어난 환경 적응 능력은 일찌감치 영장류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6년 일본 인류학회 정례 심포지엄에서 이마니시 긴지(1902~1992) 교수가 이끈 교토대학 영장류연구소 연구팀은 미야자키현 고지마의 원숭이 무리의 이모아리이’, 즉 감자씻기 행동을 보고해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고지마의 니혼자루 무리는 바닷가 바위에 붙은 해초류를 뜯어 먹거나 물고기를 잡아 먹는 등의 독특한 형태로 연구자들의 눈길을 끌어왔다.

 어느날 이들 무리에 암컷의 천재 원숭이가 태어났다. 무리의 다른 구성원들이 흙이 묻은 감자나 고구마를 그냥 먹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천재는 우연히 물에 씻어 먹는 법을 발견한 이후 흙이 묻은 먹이는 반드시 씻어 먹었다. 형제와 부모가 이를 흉내 내면서 감자씻기 행동은 이내 무리 전체로 번졌다.

 

 

 일본인의 잠재의식에는 지진에 대한 공포가 늘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우리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일본의 만숀’(mansion)은 성냥갑처럼 앞뒤 폭이 좁고 옆으로 긴 우리 아파트와 달리 사방이 대체로 비슷한 정방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최근 대도시 도심에 잇달아 세워지고 있는 초고층 아파트도 예외가 아니다. 지진이 어느쪽으로 치고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한쪽 폭을 좁게 짓는 것은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날렵한 고층 건물에 익숙한 우리 눈에 일본의 대형 건물은 둔한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도쿄의 집값에도 무의식중에 지진 불안이 반영돼 있다. 도심과의 거리나 주거 환경 등 일반적인 집값의 결정 요인으로 치자면 상위권에 들어야 할 고토·에도가와구의 집값은 신주쿠·시부야구의 절반 정도이다. 해안에 가까운 지역이 대부분 매립지여서 지반이 무른 반면 도쿄 서쪽으로 갈수록 암반층이 두터워 안전하다는 고려가 바닥에 깔려 있다. 약간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아카사카나 미타, 아자부 등지의 집값이 비싼 데도 비슷한 이유가 작용했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쇼쿠닌이 완전히 독립 계층으로 정착, ‘쇼쿠닌의 시대라고도 불린 에도시대 들어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전란 후에 찾아온 장기간의 평화는 상공업과 화폐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불렀다. 그러나 평화는 통제와 동전의 양면이었다.  우선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도가 강요됐고 화폐 경제와 무역도 바쿠한체제에 의해 통제됐다. ‘는 직능조합인 나카마로 바뀌어 일반 쇼쿠닌들의 자율성은 커졌지만 오야카타의 배정에 따라 작업을 하청받아야 했다. 물가 앙등에도 불구하고 공임의 인상은 강한 규제하에 있었다. 일정 범위 안에서의 자유경쟁과 영리 추구만이 허용된 결과 쇼쿠닌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평균 3평의 좁은 셋방에서 일가족이 지냈다는 통계처럼 최소한의 생계 유지는 가능했지만 여유는 확보할 수 없었다. 기술만 있으면 언제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쇼쿠닌들의 자신감은 하루 벌이의 절반 이상을 술값으로 탕진하는 엉뚱한 풍조로 흐르기 일쑤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장인정신은 결국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마주한 체념이자, 한계 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살 수는 있다는 자기 위안이다. 가업을 잇는 전통도 다를 바 없다. 바쿠한 체제는 모든 신분과 직업의 고정을 강제했으며 특히 쇼쿠닌에 대해서는 도가 더했다. 1711년 바쿠후가 내린 가업에 전념해 게을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분수를 알아 넘어섬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이 좋은 예이다.

 흔히 거론되는 한일 양국의 장인정신의 차이는 조선 후기 이후 양국의 사회적 통제의 정도가 크게 달랐던 것이 진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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