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 8점
권태훈 외 지음/시대의창


발췌한 양이 좀 어마어마해서 저자들이 기분 나쁠 수 있겠다. 그만큼 많은 광고가 될 거라 본다. 신선함에 점수를 둔다.  



66.
미국과 맞짱뜬 VS 나쁜 나라들 / 권태훈, 문경환, 민경우, 오세혁, 임승수, 정이나, 정호연 지음 / 시대의 창

초판 1쇄 인쇄 2008.05.16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온 까닭은

 

 만약 천국에 스페인 사람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으로 가겠다.

- 타이노 족 추장 아투웨이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원래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유럽인들에게 정복당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아메리카 땅일 뿐이였다(아메리카라는 이름도 유럽인들이 붙인 것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다양한 부족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의 특성에 따라 평화롭게 살아갔다. 자신들의 생활방식에 만족했으며 결코 다른 부족의 생활방식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카프리 해 인근의 아름다운 섬에서 살아가던 부족들 가운데 타이노족이 있었다. 그들의 땅은 풍요로웠고, 아름다웠고, 기후도 좋았다. 이들은 땅에서 자라는 작물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수확하고, 마음이 내키면 바다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나무에 열려 있는 열매를 따먹었다.


 
어느 날, 희한한 옷을 입은 이상한 사람이 섬에 들어왔다. 그는 커다란 십자가를 땅에 꽂고 이 땅을 발견하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제멋대로 이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자기가 발견한 모든 땅을 스페인 여왕에게 바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반항하는 원주민은 사지를 절단해 죽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대발견을 증명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배에 싣고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타이노족이 살고 있던 땅은 졸지에 스페인의 땅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스페인의 백성이 되었다.


 
그 이상한 사람은 최초로 이 땅을 발견해서 유럽 문명에 대부흥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지 3년도 채 안되어 아름다운 쿠바섬에는 원주민이 사라졌다. 대신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이 데려온 노예들이 있을 뿐이었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얼마 있지 않아 똑 같은 운명에 처한다. 땅에서 쫓겨나고 학살당하고 노예가 되거나 보호구역에 갇혔다. 크레이지 호스, 앉은 황소, 제로니모 같은 전설적인 추장들이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리하여 그 땅은 쿠바섬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의 소유가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땅을 차지한 유럽인이 스페인인이 아닌 영국인이라는 것뿐이었다.


 
식민지 백성의 설움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똑같다. 쿠바섬의 민중들 역시 그들의 모든 것이 철저하게 스페인 제국을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유럽인들은 이런 것에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가신들이 이 땅을 발견한 것은 하느님이 미개한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이 땅의 모든 것을 차지하라는 계시를 내렸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사실은 믿는 척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황금을 비롯한 각종 보물들을 채취했고, 황금이 바닥을 드러내자 담배와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다. 쿠바의 자연조건은 사탕수수를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제 쿠바는 황금을 찾기 위한 땅에서 사탕수수를 키우는 설탕의 섬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그 역할이 바뀐다. 쿠바땅을 차지한 유럽인들은 자연스레 농장의 대지주가 되었다.

 

 







 피델은 조국 쿠바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러나 젊은 피델의 눈에 비친 쿠바는 미국 기업의 돈주머니를 불려주고, 미국이 원하는 땅은 어디든 내주고, 미국 마피아들이 전세계 암흑가 회의를 마음대로 열고, 친미 매국노들이 고층빌딩 옥상에서 수영을 즐기는 반면, 하루 종일 사탕수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누더기 움막에서 웅크려 잠들고, 가난한 아가씨들은 외국인들에게 몸을 팔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쿠바 영토의 4분의 3은 미국인들 소유였다. 쿠바 대통령의 4분의 3은 독재자 또는 친미인사들이거나 아예 미국인이었다. 이들은 착실하게 미국의 금고에 돈을 채워주고 나머지는 자신들과 금고에 채워 넣었다. 이런 쿠바의 상황은 피델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자 사상가이며 쿠바 독립의 아버지였던 호세마르티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그의 사상과 자신의 생각을 일치시켜나갔다. 그렇게 피델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행동하며 쿠바 해방을 위하여 치열한 활동을 시작한다.


 
피델은 1945년 아바나 대학 법대에 입학하여 뛰어난 연설과 행동력으로 학생운동의 핵심이 된다. 1947년엔 도미니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혁명군에 참전했다가 해상에서 쿠바 해군에 발각되어 실패한다. 이 때 그는 한손에 소총을 들고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를 헤엄쳐 쿠바로 다시 되돌아왔다. 1948년 콜롬비아 학생회의에 참가해 그 나라의 민중 지도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을 목격하고, 분노한 콜롬비아 민중들의 봉기에 동참한다. 195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개업하며 정치에 뜻을 둔다.

 젊은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남미대륙 전체를 자신의 가슴에 받아 들였다. 1947년 에르네스토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자신의 천식을 스스로 고치겠다는 의지와 가난한 민중들을 치료해주겠다는 신념에서 선택한 공부였다. 1950년에는 자전거를 타고 아르헨티나를 여행한다. 이 여행에서 어느 떠돌이 노동자가 탄식하듯 내뱉은 한마디에 그는 부끄러움과 충격을 느낀다.

 

 그는 몇몇 지방을 돌아보겠다는 나의 여행계획을 듣고 나서, 그리고 나의 목적이 단지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머리를 절망스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이럴 수가! 자네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이 고생을 하나?”

                     - <체 게바라 자서전> 중에서 (도서출판 황매)

 

1951년 평생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남미 전역을 여행한다. 이 여행을 통해 남미 전체가 미국에서 착취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아르헨티나가 아닌 남미 민중 전체의 현실에 눈을 뜬다.

 

 냉혹한 효율과 무기력한 분노가,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 거대한 광산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 편은 생존 때문에, 다른 한쪽 편은 이윤을 위해……. 언젠가 우리는 광부들이 노동의 대가를 즐겁게 받아가고 먼지 낀 폐를 웃음으로 씻어낼 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것이 세상 저쪽, 붉은빛이 퍼져나오는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체 게바라 자서전> 중에서, 칠레 구리광산에서

 

 1953 7 26일 피델과 150명의 동지들이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무기를 탈취하고 통신사를 접수하여 대규모 무장투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 당시 쿠바는 미국이 비호하는 군부 출신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통치하고 있었다. 바티스타는 쿠바에 혁명의 바람이 불 때마다 탱크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쿠바를 미국의 품에 되돌려준 인물이었다. 비록 작전 미숙과 판단 실수로 이 계획은 실패했지만 피델의 과감하고 대담한 행동력은 쿠바 전역을 흔들어 놓았다. 피델은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에서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그의 최후 진술은 소책자로 제작되어 쿠바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어떠한 판결도 진실을 잠재울 수는 없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최후의 심판은 역사가 내릴 것이다. 역사라는 법정에서면 오늘의 재판관은 내일의 피고가 될 것이며, 오늘의 피고가 내일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15년형을 받고 피노스 섬에 유배된 피델은 그곳에 아예 자신의 도서관을 만들어 철학, 사회과학, 문학을 넘나들며 엄청한 양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혁명의 기회에 대비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낸다.


 
피델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던 그때, 에르네스토는 두 번째 남미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1953 12월에 과테말라에서 그의 첫 번째 부인이 될 일다 가데아를 만난다. 그녀는 지적이고 신념에 가득 찬 운동가였다. 그녀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본격적으로 철학과 사회과학 공부를 하며 좀더 과학적인 혁명 사상에 눈뜨게 된다. 1954 6월 그는 미국이 계획한 쿠데타로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펼치던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도심 이곳저곳에 떨어지는 폭격 속에는 그는 미국이 저지르는 야만적인 모습에 분노한다.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잠시 피신했던 그는 얼마 후 멕시코로 건너간다.

 

 외국인들(그들이 양키라는 것을 기억하시죠)이 남미를 다루는 방식이 저를 점점 분노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동시에 저는 그들이 취하는 방식을 연구했고, 그 행동이 과학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과테말라의 일이 벌어졌어요. 어떻게 사람들의 열정이 그놈들의 의도 때문에 옅어져버릴 수 있는지, 어떻게 빨갱이들의 범죄라는 이야기가 날조되고 있는지, 어떻게 과테말라의 배반자들이 새로운 질서의 식탁 밑에서 빵 부스러기라도 얻어보겠다고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는지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 <체 게바라 자서전>중에서, 과테말라로 간 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체 게바라가 이끌어낸 산타클라라 전투(바티스타 군의 병력과 무기가 실려 있는 기차를 탈선시켰다)의 쾌거를 기점으로 하여 혁명군은 승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미국은 바티스타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무기 공급을 중단한다. 승리가 확실한 피델 쪽에 붙어야 했기 때문이다. 1959 1 1일 바티스타는 새해가 되자마자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줄행랑을 친다. 마침내 피델의 쿠바 혁명군이 미국과 바티스타를 이겨내고 쿠바를 해방시킨 것이다. 이때 피델의 나이 31, 체 게바라의 나이 29세였다.

 

 










 
피델이 사회주의로 향한 까닭은

 

 피델이 설탕섬(미국의 표현에 따르자면)의 정권을 장악했을 때, 미국은 의외로 느긋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쿠바의 지도자가 누구건 그가 사회주의자만 아니면 됐기 때문이다. ‘자본과 자본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지도자라면 누구와도 사업을 벌일 용의가 있었다. 더군다나 서른 살 먹은 수염난 애송이를 다루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피델도 처음부터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애당초 무슨 주의를 앞세울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쿠바 민중의 가난을 끝장내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초반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피델이 직접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대통령은 못 만나고 부통령 닉슨을 만났다). 쿠바 혁명군의 수염과 올리브색 군복은 낭만적인 미국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어디를 가더라도 크게 환영받았다. 이들의 패션과 수염, 머리 스타일은 훗날 반전과 자유의 대명사인 미국 히피문화의 패션 코드가 된다.


 
비록 부통령 닉슨과의 회담에서 큰 성과는 없었지만 아마도 미국은 시간을 두고 차차 길들이면 되겠지하고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자신들과 같은 자유민주주의편이라고 확신했다.

 그 말은 맞았다. 쿠바로 돌아온 피델은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혁명공약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너무나 훌륭한 정책들이었다.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땅을 제공하고 집 없는 이들에게 집을 제공했다. 매춘굴과 카지노가 사라지고 학교와 병원이 들어섰다. 쿠바 국민이라면 누구나 무상으로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쿠바 전역이 민주주의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양쪽에서 난리가 났다. 한쪽은 80퍼센트를 차지하는 가난한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난생 처음 자신들이 경작할 땅을 갖게 되었고 난생 처음 두 발을 뻗을 수 있는 집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너무 기뻐서 난리가 났다.


 
미국에서는 더 큰 난리가 났다. 좋아서? 아니 아주아주 싫어서였다. 쿠바땅의 70퍼센트가 자기들 소유였는데 이걸 농부들에게 나눠준다니 경악할 노릇이었다. 또 집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현하려는 피델의 계획은 자본주의 시장의 자유에 따라 주택, 의료, 교육시장을 좌지우지하던 미국의 재벌기업들에게 치명타였다. 밤의 세계를 지배하던 미국 마피아들에게도 매춘과 카지노 금지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쿠바에서 한몫을 보던 미국의 재벌과 정치인, 마피아들은 하루아침에 보따리를 싸야 하는 상황이었다.


 
피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미국은 손해를 보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은 더 이상 손해를 보기 전에 이 수염난 애송이를 길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국은 경제를 압박해 쿠바의 목을 서서히 조르기 시작했다.


 
먼저 쿠바에서 생산한 설탕의 수입량을 줄였다. 설탕이 최대 수출품인 쿠바에서 설탕을 수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재앙이었다. 그리고 석유를 비롯하여 쿠바로 수출하던 물품의 양도 제한했다. 동시에 미국 언론들은 피델이 공산주의자이며 쿠바를 공산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때 피델이 미국 정부에게 무릎을 꿇었더라면 미국과 피델은 아주 좋은 사업 파트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미국을 비난하면서 혁명 실천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때 어려움에 처한 쿠바를 도와준 나라들이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소련과 중국이었고, 북한도 쿠바를 도왔다. 특히 소련은 미국이 수입하지 않는 설탕의 전량을 자기네가 수입하겠다고 했다. 또 지속적으로 쿠바에 저렴한 석유를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쿠바의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이 내치면 내칠수록 쿠바는 사회주의 나라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더더욱 분통이 터졌다.


 
미국과 쿠바의 신경전은 극에 달했다. 피델이 소련에서 들여온 석유를 미국계 정유회사들에게 정제할 것을 요구하자 약이 오른 정유 회사들은 이를 거부했다(쿠바에 있는 정유회사들은 대부분이 미국계 회사였고 쿠바는 자체의 정제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화가 난 피델은 아예 그 정유회사들을 국유화해서 쿠바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마음 놓고 석유를 정제하기 시작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미국은 쿠바에 남아 있는 정유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켜버렸다. 그러자 이웃나라 멕시코의 기술자들이 쿠바로 넘어와 정유공장 가동을 도와주었다.


 
미국은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쿠바의 설탕 수입을 점점 줄여나가다가 1960년에 이르러서는 쿠바의 설탕을 단 1그램도 수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피델은 아예 쿠바 내에 있는 모든 미국인들의 재산을 국유화해버린다. 그러자 미국은 모든 미국 상품의 쿠바 수출 금지령을 내려버린다.

 서로가 카운터 펀치를 주고받으며 공방전을 벌이는 속에서, 경제 봉쇄만으로는 쿠바를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은 미국 정부는 아예 무력으로 쿠바를 뒤집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된지 얼마 되지 않은 1961 4, 미국으로 망명했던 1500명의 쿠바인들이 피그만에 상륙하여 쿠바 본토를 공격한 사건이 터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그만 사건이다.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쿠바의 애국자(?)들이었는데 대부분이 바티스타 편에 붙어 쿠바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겐 쿠바 혁명으로 잃어버린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야망이 있었다. 쿠바를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식민지로 되돌리려는 미국의 야망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미국의 지원 아래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리고는 미국산 무기로 무장하고 미국산 군함을 타고 보무도 당당히 쿠바를 향해 진격한 것이다.

 미국도 그렇고 이들도 그렇고 자신들이 쿠바를 공격하면 피델 카스트로의 독재에 신음하는 쿠바 민중들이 무기를 들고 호응해줄 거라고 믿었다. 민중들이 실제로 무기를 들고 호응을 하긴 했다. 그러나 민중들의 총구는 피델이 아닌 자신들을 향해서였다. 이들은 너무나 당황했다. 이들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피델과 혁명군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작전을 펼쳐 얼마 되지도 않아 이들은 모두 진압되었다.


 
피델은 이 사건을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렸다. 그리고 야만적인 미국의 행위를 비난했다. 미국은 처음에는 발뺌을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 후, 미국은 울며겨자먹기로 5300만 달러 상당의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하고 이들을 다시 미국으로 데려갔다. 어찌 보면 이들이 쿠바에 상당한 애국 활동을 해준 셈이다.


 
그 이후로도 쿠바를 향한 미국의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전투기를 보내 쿠바에 폭격을 퍼붓기도 하고 CIA가 주동하여 쿠바 내의 테러 활동을 사주하기도 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쿠바와의 무역을 중지하도록 압박했다. 나중에는 아예 CIA와 마피아들이 주동하여 피델의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쿠바 혁명가들에게는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더 나가가 세계 곳곳에,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혁명의 불길을 퍼뜨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 호세 마르티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자만이 참다운 인간일 수 있다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마디 명제로 요약했듯이 세계 도처에 만연한 궁핍과 착취와 불의에 대해 촉수를 세워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에 세계 온 민중에 대한 혁명적 태도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 1963 9 29, 체 게바라의 연설

 

1964년 여름,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났다. 그가 떠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나라에 혁명을 수출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체는 쿠바에서와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그는 콩고와 볼리비아 등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가 1967 CIA와 볼리비아 군의 합동수색에서 사로잡혀 총살당하고 만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남미 민중에 대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사르트르가 칭송했듯이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 누구보다 남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다. 장관이 된 후에도 주말이면 사탕수수 농장에 가서 자발적으로 노동했다. 그 누가 자신에게 호의나 혜택을 베풀려고 하면 화를 냈다. 게릴라 활동 중에는 식사 당번이 자신에게만 빵을 한 개 더 주었다는 이유로 그를 쫓아낸 적도 있었다. 단 한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의 평등을 모독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어느 자전거포 주인이 체의 딸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려 하자 불같이 화를 내며 꾸짖은 적도 있었다.


 
그는 항상 혁명을 생각했고 노동을 했으며 여유가 생기면 시를 쓰고 책을 읽었다. 전세계 민중들이 행복하게 사는 그날까지 조금도 쉴 생각이 없었던 체 게바라.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도 그는 평생을 게릴라로 살았을 것이다.


 
총살당한 체의 시신은 양 손목이 잘린 채로 볼리비아의 비밀스런 곳에 암매장되었다가 최근에야 쿠바 탐사단에 의해 유골이 발굴되어 산타클라라에 잠들었다. 쿠바 혁명의 승리를 가져다준 산타클라라에서 그는 영원히 쿠바 민중과 함께 살아 있다.

 

 피델에게 전해주시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이 아니라고.

- <체 게바라 자서전> 중에서, 총살당하기 전 남긴 유언

 










 

 맨발의 의사들 vs 맨발의 환자들

 

 그들이 의사로서만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천사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게 그들은 천사에요. 내가 평생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바로 쿠바 의사입니다.

                                   - SBS 스페셜다큐 <맨발의 의사들> 중에서,

                                    쿠바 의사들의 의료 행위를 목격한 파키스탄 병사

 

 얼마 전 ‘SBS 스페셜에서 방영한 <맨발의 의사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다큐멘터리는 쿠바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보여주었다. 쿠바는 전세계가 인정하는 의료 강국이다. 혁명 이후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상의료 제도를 실시하면서 의학 연구와 의료인에 대한 교육을 강화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미국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더 절실했다.


 
배출된 의사들은 쿠바 전역으로 퍼져 환자들을 치료했다. 또 예방의학을 발전시켜 병이 커지기 전에 치료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고 주치의 제도를 만들어 동네마다 의사를 두었다. 피델은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서도 무상의료 정책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의 전쟁 위협이 본격적으로 닥치는 순간에도 오히려 국방예산을 절반으로 줄이고 의료예산을 늘렸다. 아마 피델에게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결단이었을 것이다.


 
1990
년 이후 미국의 봉쇄가 본격화하면서 의약품의 공급도 끊긴다. 치료하고 싶어도 치료할 약이 없어서 의사와 환자 둘 다 좌절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쿠바의 의료인들은 이 또한 기회로 삼았다. 의약품이 없으니 자연히 예방의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요가나 태극권 같은 건강체조를 장려했다. 마취약이 없어서 중국에서 침술을 배워와 침으로 마취시키고 수술했다. 침술, 경락마사지, 기공 같은 동양의학이 접목되었다. 허브로 대표되는 약초들이 의약품 대신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쿠바는 무상의료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었다. 쿠바의 평균수명은 높고 영아 사망률은 낮다.


 
쿠바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라 사회에 의미 있는 봉사를 하는 직업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티모르에도 가고 대지진이 발생한 파키스탄에도 간다. 태풍이 휩쓴 곳에도 가고 생전 밟아보지 못한 눈으로 뒤덮인 히말라야의 고산지대에서도 텐트를 치고 의료 활동을 한다.

 최근에는 남미 전체를 대상으로 실명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기적의 작전을 실시하여 수천 명의 실명자들이 눈을 떴다. 이들은 처음으로 신문을 읽고 자기 손녀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40여 년 전 체 게바라를 처형했던 볼리비아 병사의 백내장 수술도 해주어서 그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상 최악의 지진이 일어났던 파키스탄에서는 다른 나라의 의사들이 모두 철수해도 쿠바 의사들만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거기서 그들은 170만 명의 파키스탄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 나라 민중들이 감동에 젖어 외치는 말이 피델과 하느님에게 축복을!”이었다. 이들은 맨발의 의사들이라고 불리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 체 게바라의 딸인 알레이다 게바라도 소아과 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이 아픈 사람들을 무조건 찾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쿠바에는 남미 의과대학이라는 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의료인이 되고 싶다면 누구든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다짐 받는 것은 단 하나다. 의사가 된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배운 학생들이 어떤 의사가 될 것인지는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최근에 나온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라는 다큐멘터리에서 9.11 테러의 영웅들인 미국 소방관들이 유독물질에 따른 후유증으로 온갖 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미국의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료보험의 폐해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 미국의 의료는 국가가 아닌 기업에서 모든 것을 통제해 값 비싼 의료보험에 들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치료받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쿠바였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들을 직접 쿠바로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해준 것이다(쿠바는 외국인도 무료로 치료한다). 병원에 입원하여 쿠바 의료인들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으면서 소방관들은 눈물을 흘린다. 미국이 외면한 자신들의 병을 미국의 적국인 쿠바 의사들이 치료해준 것이다.


 
아무리 의료 시스템이 발전한 미국이라도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가 없다. 손가락이 두개 잘려도 돈이 모자라면 둘 중 한 손가락만 붙일 수 있는 곳이 미국이다. 응급실에 온 환자도 돈이 없으면 맨발로 내쫓기는 곳이 미국이다. 초강대국 미국에 맨발의 환자들이 존재할 때, 미국보다 훨씬 못사는 쿠바에서는 맨발의 의사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과거를 묻지 말라는 말은 본질을 이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테러만큼 잔인한 신자유주의 폭풍

 

 1990년 이후 미국과 IMF 그리고 세계은행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수백 개의 공기업들을 사유화시켰고, 외국 투자자본의 천국을 만들었다. 민중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 전기, 통신 또한 사유화 바람을 피해가지 못했다. 가장 기본적인 민중들의 삶의 권리마저 소수 자본가들의 이윤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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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2004)에는 한 달에 28달러를 버는 니카라과의 한 서민은 작은 텔레비전과 방 두 개를 밝히는 전기세로 3~4달러를 내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화 바람 속에 이젠 한 달에 200달러가 넘는 전기세를 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4년 전 니카라과 국민의 약 60퍼센트가 하루에 1달러가 조금 넘게 벌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득 수준은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 이러한 민중들은 10달러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 니카라과의 어린아이들 가운데 40퍼센트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아이들 가운데서도 65펴센트 이상이 중학교를 끝내지 못한다. 이것이 니카라과 민중들이 총소리 대신 얻은 유일한 성과물이었다. 지독한 가난, 질병과 무지 말이다.


 
그런데 이제 FSLN이 돌아왔다. 2007 1월 또 다시 산디니스타의 다니엘 오르테가가 니카라과 대통령에 당선됐다. 다시 한 번 민중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당시 28세였던 호치민은 분주히 세계 열강의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베트남 문제를 안건으로 다뤄줄 것을 호소하려 했으나 결국 그 누구도 만나주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호치민은 베트남의 해방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온건한 조항 몇 가지(식민지와 피식민지 인민 간 평등, 기본적인 권리, 더 많은 학교의 건립, 명령이 아닌 법률로 통치해줄 것, 베트남인 대표 선출 등)만 내밀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마저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미국이 공언하던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제국주의자들이 세계 질서를 재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측이 패전국들에게 지나치게 전쟁배상을 물리고, 패전국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면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국제정치 역관계가 상당히 뒤흔들린다고 생각했다. 강대국들 사이에의 힘의 균형이 급속히 변하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결코 이롭지 않았고 이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고, 패전국의 식민지를 적절하고, 결코 지나치지 않게재배분하기 위한 용도였다. 실제로도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덕분에 해방된 식민지는 한 곳도 없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를 구걸하지는 않겠다

 

 미국이 괴롭힌 나라가 한둘이 아니지만 조선처럼 오랫동안 끈질기게, 그리고 악랄하게 공격 받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는 미국의 세계제패 전략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사실 동북아시아 지배에서 한반도가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조선은 오래 전부터 강대국의 침략을 수없이 받아왔다.


 
미국은 조선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기 전인 1866년에 이미 제너럴셔먼 호를 대동강에 침투시켜 행패를 부렸고 이를 빌미로 신미양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05년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해주고 훗날을 도모하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38선으로 남북을 갈라놓은 다음 이남에 친미정권을 세우고 1950년 전쟁을 기회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려 했다.


 
그런데 미국의 구상은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타격을 입게 되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패한 것이다. 1957 7 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미국은 한국전쟁에 자국 육군의 3분의 1과 공군의 5분의 1,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과 한국군, 그리고 15개 국가의 군대를 포함하여 57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1650억 달러가 넘는 막대한 돈과 태평양전쟁 때 소모한 것의 11배에 달하는 7300여만 톤의 군수물자를 쏟아 부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미국은 3 6574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9 6000여 명의 사상자와 1 2200여 대의 전투기, 250여 척의 각종 함선을 비롯해 수많은 병기와 군수물자를 잃었다.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손실은 2차 세계대전 시기 4년 동안의 태평양전쟁 때 입은 손실의 거의 두세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런 손실을 입고도 미국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조선 땅을 차지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미국 얼굴에 먹칠을 한 셈이다.

 1953 7 27일 정전협정 조인식장에 나온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나의 군 경력을 통틀어 이처럼 수치스럽고 하기 싫은 서명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미국에서 맨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조인한 사령관이라고 하였다. 전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도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패하고 정전협정에 조인함으로써 개국 이래 미국의 위신이 이처럼 땅에 떨어진 적은 없었다고 개탄했다. 지금도 미국은 전쟁이 중단된 7 27일이 아닌 전쟁이 개시된 6 25일을 기념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중단되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미국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전쟁이 빌미를 만들려고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우선 미국은 이남지역에 무력을 증강했다. 1955 7월 미국은 일본 도쿄에 있던 미8군 사령부를 서울로 옮겼고 1957 7월에는 유엔군 사령부마저 서울로 옮겨왔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F-4전투폭격기에 적재하는 핵폭탄 192, 155밀리미터 대포용 핵포탄 152, 나이키 허큘레스 핵탄두 144, 어네스트 존 핵탄두 88, 서전트 핵탄두 12발을 이남에 배치했고, 70여 개의 개량형 호크 유도미사일 등 기타 723기의 로켓을 반입했다.


 
1983년과 1984년에는 48대의 F-16 전투폭격기와 각종 핵폭탄을 끌어들였다. 심지어는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반입을 거절당한 중성자탄까지 무려 56개나 실전배치했으며 야전휴대용 핵배낭도 다량 반입했다. 1975 5 30일 미국 하원의 1976년도 국방예산 심의회의에서는 이남에 1000여 개의 핵무기와 54대의 핵무기 운반용 비행기가 배치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처럼 전쟁준비를 다그치던 미국은 몇 차례 실제 전쟁을 개시할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 첫 번째 기회는 1968년에 왔다. 1968 1 23, 미 해군의 최신예 전자첩보함 푸에블로 호USS Pueblo가 조선 영해인 원산 앞바다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조선인민군 해군 함정에 나포되었다.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를 동원한 나포작전에서 미국 병사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82명이 전원 체포되었다.


 
푸에블로 호 승무원들이 두 손을 들고 조선 경비원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되면서 미국 시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고 미 의회는 푸에블로 호 나포를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규탄하였다. 이때까지 미국의 첩보함이나 정찰기가 타국 영해나 영토를 넘어간 일은 부지기수였지만 그 어떤 나라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중국, 구 소련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세계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조선이란 작은 나라가 미군 첩보함을 납치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기회를 잡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즉각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는 제7함대 주력 기동부대를 한반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또 구축함, 핵잠수함, 보급함을 거느린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를 비롯하여 항공모함 레인저, 대잠수함 항공모함 요크타운, F-105 전투 폭격기, B-52 폭격기 등 항공기 수백 기가 한반도로 집결하였다. 전세계가 숨을 죽이고 한반도를 주목하였다. 이제 존슨 대통령이 명령만 내리면 전쟁이 시작되고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이 조선이란 작은 나라를 짓뭉개리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선전포고는 미국이 아닌 조선에서 먼저 나왔다. 1968 2 8, 조선의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 그러나 전쟁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평화를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에는 보복, 전면전에는 전면전으로라고 조선인민군과 각급 준군사조직, 전 인민에게 전시동원체제를 명령했다.


 
다급해진 미 해군 작전장교들은 어떤 식으로 조선을 공격할 것인가 연구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론은 방법이 없다였다. 조선은 한국전쟁 후 미국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 여겨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이라 부르는 전민 무장화, 전국 요새화,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를 통해 철저하게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핵공격에 대비해 주요 군사시설을 지하 깊숙이 마련하였고 전국 곳곳에 지하 방공호를 건설하여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지하 100~150미터의 평양 지하철이 핵공격에 대비한 대피소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완벽한 방공망을 구축하였다. 주요 건물과 부대, 심지어 열차까지 엄청난 수의 대공포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웬만한 폭격기는 목표물 근처에도 갈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해안선을 따라 바위지대 속에 포와 미사일 기지들을 가득 배치해 군함의 접근도 차단하였다.


 
미군이 전쟁을 하는 순서는 거의 똑같다. 먼저 항공모함에서 폭격기가 이륙하여 군사시설을 초토화한다. 또 해안도시에 군함들이 접근해 함포 사격을 한다. 이렇게 폭격, 포격을 최대한 진행한 다음 육군이 진격한다. 그런데 미군은 이런 방식이 조선에는 결코 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미국이 자랑하는 정찰위성과 전자정찰기, 정찰선을 통해 이런 상황을 똑똑히 확인했고, 슈퍼컴퓨터를 동원해 수차례 전쟁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국 미 제7함대는 조용히 퇴각했다. 미군 포로들은 본국이 사과문을 발표할 때까지 236일 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있어야 했다.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A, 과오를 인정하라Acknowledge’ ‘사과하라Apologize’ ‘재발방지를 보장하라Assure고 요구하였다.

 28차에 걸친 협상에서 미군이 좀처럼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려 하지 않자 급기야 9 12일 세계 30여 개국 기자들을 초청하여 증거자료를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푸에블로 호 함장이 의자위에 올라가 자신들이 하루빨리 부모처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미행정부에 항의해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그래도 미국이 영해 침입을 인정하지 않자 조선은 미군 포로들을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내렸다.


 
결국 12 23일 미국은 푸에블로 호의 영해침범 사실을 시인하고 사죄문을 발표하였다. 푸에블로 호 승무원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배는 조선의 전리품으로 돌려받지 못했다. 이렇게 첫 번째 기회는 미국에서 수치만을 안긴 채 끝나버렸다.


 
이 뒤로도 1969 4 15일 미군 전자정찰기 EC-121 격추사건, 1976 8 18일 판문점 도끼사건 등 전쟁의 기회가 종종 찾아왔다. 그러나 미국은 언제나 전쟁을 개시할 것처럼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집결시켰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전쟁을 포기했다. 그 이유는 조선의 막강한 방어력을 뚫지도,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이기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건국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조선에게 패배한 역사가 있다. 그런데 이제 조선은 어떠한 공격도 막아낼 준비까지 되어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미국은 조선이 다른 나라처럼 쉽게 무릎 꿇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미국에게 있어 조선은 한마디로 금강불괴(불교에서 말하는, 금강처럼 굳어 파괴되지 않는 존재)’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미국은 그저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시간끌기작전에 들어갔다. 이는 옛날 전쟁에서 성을 함락하기 어려우면 겹겹이 포위해 식량과 물이 끊겨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전법과 유사하다. 그러자 이번엔 조선이 행동에 들어갔다. 미국의 의도를 눈치 채고 뼈다귀를 던진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개는 뼈다귀가 날아가면 일단 뛰어가서 물게 되어 있다. 미국은 훈련이 덜 된 개와 다를 바 없었다.

 

 










1992
5 4일부터 5차에 걸쳐 진행된 비정기사찰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미국이 주장하던 핵시설에 대한 근거는 잡을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국은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조선은 자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1993 2 25일 원자력기구관리이사회를 통해 특별 사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고 조선이 끝까지 거부할 경우 유엔안보리에 상정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를 보였다.


 
미국이 갑자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갖게 된 것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새로 당선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베트남전 당시 징병 기피를 한 경력 때문에 열등의식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공화당 지지자들과 미국 국민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전쟁에 문외한인 그는 레이건과 부시 등 공화당 정권 시절에 왜 조선을 공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집권하자마자 대조선 전쟁을 준비하였다.


 
1993
년 클린턴은 부시 대통령이 중단한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였다. 미군과 한국군 20여 만 대군을 동원한 이 훈련에는 핵 항공모함과 핵 잠수함, F-117, F-15E,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공중조기경보관제가 AWACS,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 최신 무기들이 총동원되었으며 평양에 대한 핵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훈련, 군사분계선 지역에 대한 총공격 훈련 등 북침을 위한 대규모 군사연습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한 달 안에 특별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변을 폭격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전세계는 곧 전쟁이 시작될 한반도를 주목하였다. 이때였다.


 
미군과 총을 맞대고 있는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이자 김일성 주석과 함께 북미대결의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3 3 8일 최고사령관 명렬 제0034 <전당, 전민,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이 명령서를 통해 피로써 쟁취한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위하여 끝까지 싸워 침략자들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주고 영웅조선의 존엄과 영예를 다시 한 번 떨칠 것이며 원수들은 우리 공화국의 한 치의 땅, 한 포기의 풀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최고사령관 명령 후 10일 만에 150여만명의 청년학생들이 인민군대에 입대, 복대를 탄원하였고, 심지어 재외대표부 성원들까지 전선 탄원을 하였다. 미국의 군사위성은 휴전선 일대에서 수천 문의 포가 포신을 올리는 사진을 클린턴에게 보냈다.

 미국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3 12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한다는 조선 정부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는 한 달 내 특별사찰을 받으라는 미국의 협박에 대한 답변이며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당시 한국의 한양대학교 리영희 교수는 조선의 외교술은 예술의 경지라고 극찬하였다. 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가 외교 예술인가.


 
핵확산금지조약은 미국의 핵 독점을 보장해주는 불평등조약으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핵심장치다. 미국은 반미 국가들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을 들이대며 군사시설을 사찰하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런데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조선이 이 조약을 탈퇴해버렸으니 이를 막지 않는다면 다른 반미국가들의 연쇄 탈퇴도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조약 탈퇴를 막을 아무런 법적 방법이 없어 미국으로서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핵확산금지조약은 탈퇴 선언을 한 후 3개월 후에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하게 되어있다. 이 기간 안에 미국은 전쟁과 굴복사이에서 판단을 해야 했다.

 이에 따라 미 군부는 시급히 컴퓨터를 가동하여 전쟁 시물레이션을 하였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 개시 초기에 주한미군의 80퍼센트와 주일미군 46퍼센트가 전멸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수개월간 계속되는 전쟁에 6척의 항공모함, 50만 병력을 동원해야 하며 희생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깨달았다. 더 이상 전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김영삼 대통령은 3 19, 34년간 감옥에서 싸우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를 북송하였다.


 
팀스피리트 훈련을 위해 한반도에 온 미군의 대병력이 그대로 있었지만 미국이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리라고 확신한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3 24일 준전지상태 해제를 선포했다. 4월에는 전통적으로 진행해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도 예년 그대로 진행했다. 미국의 대규모 병력이 포위하고 있는 평양은 세계 곳곳에서 날아온 예술인들의 축전으로 연일 흥성거렸다.


 
결국 미국은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배짱에 기가 눌려 회담장에 나가야 했다. 1993 5 5일 중국 베이징에서 조미 참사급 접촉이 이루어졌고 여기서 미국은 조미회담을 뉴욕에서 개최하자고 정식 제기하였다. 국교 관계가 없는 나라와 회담하는 것은 굴욕이라며 반대하는 미국의 강경파들을 무시하고 5월 말 조선 정부 대표단을 태운 비행기가 뉴욕에 도착했다. 조미 양자 핵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1998
8월 초, 미국 언론들은 조선 금창리에 지하 핵시설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강경파들은 제네바 합의 위반이라며 제재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이 시끄럽게 반응하고 나서자 조선은 8 31일 인공위성 광명성 1를 다단계로켓 백두산 1’(당시 미국과 한국은 이름조차 파악하지 못해 발사지의 지명을 따서 대포동 1라고 불렀다)에 실어 발사하였다. 미국이 도발적인 미사일 발사 훈련이라며 목소리를 높일 때 러시아가 처음으로 이것이 인공위성임을 확인하였다. 조선은 단 한 번에 인공위성 발사를 성공시켜 자신의 과학기술 수준을 과시하였고 동시에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러시아보다 우주과학 기술이 뒤떨어진다는 점만 들통 나고 말았다.

 미국은 지금껏 대륙 본토를 공격당해본 적이 없다. 만약 본토를 공격당한다면 엄청난 국가적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1977년 일어났던 뉴욕 정전사태 때 어둠을 틈타 대규모 약탈과 파괴가 자행되어 4500명이나 체포되는 사건을 돌이켜본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본토를 공격할 배짱과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조선의 위력을 본 미국은 더 이상 억지주장을 할 수 없었다. 조선은 협상 과정에서 군사시설을  참관하는 만큼 참관료로 3억 달러를 요구했고 이에 미국은 60만 톤의 식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당시 시세로 60만 톤의 쌀이 대략 5억 달러에 해당하니 현금을 주지 않으려다 더 큰 손해를 본 셈이다.

 이렇게 미국의 참관단은 값비싼 참관료를 지불하고 문제의 금창리 지하시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참관단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금창리 지하시설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땅굴이었다. 조선에게 속은 것이다. 결국 미국은 텅 빈 땅굴을 구경한 대가로 땅굴에 군량미만 가득 채워줘야 했다.

 좌절한 클린턴은 마지막 수단으로 조선 침략의 방대한 작전이 수록된 작전게획 5027’을 과장해서 공개했다. 엄청난 규모의 공격계획이 담겨 있기에 조선이 겁을 먹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헛된 망상이었다. 미국의 의도에 맞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2 2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 여기서 조선은 선제공격은 미국만의 독점물이 아니인민군대의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타격을 피할 자리가 이 행성 위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어 그 다음날 국방성 부상 전창렬은 미제가 끝끝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다면 우리 인민군대는 미국 본토를 통째로 날려 보내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클린턴은 모래알을 던졌다가 바위에 맞은 격이 되었다. 더 이상 조선을 상대할 자신을 잃어버린 클린턴은 1999 5 25일 전 국방장관이던 윌리엄 페리를 특사로 임명하고 방북시켰다. 그 후 페리는 조선이 결코 붕괴하지 않으며 미국은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페리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에 따라 2000 10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명록 제1부위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클린턴과 만나 12일에 조미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여기서 북미관계 정상화와 클린턴의 방북을 약속하였다. 기나긴 조미 대결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조선은 1950년대 미국의 집중폭격으로 산업 기반이 초토화된 속에서도 천리마대진군을 통해 단기간에 전후 복구는 물론 사회주의 공업국으로 발전한 경험이 있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쏟아 부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평양에는 멀쩡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미 공군사령관은 조선을 석기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장담했었다. 미국은 전쟁 후에도 조선을 붕괴시키기 위해 군사, 경제적으로 조선을 포위하고 핵공격 위협을 가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조선은 자체 힘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것이다. 심지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무상의료를 시행한다고 공표하였으며 1958년 자동차 자체 생산, 1961년 전기기관차 자체 생산 등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 공업국가가 되었다.


 
이제는 미국이 전쟁 위협을 할 수도 없는 조건이다. 경제봉쇄도 풀렸고 세계 각국이 평양으로 모이고 있다. 조선은 2007년 한 해에만 미얀마, 몬테네그로공화국, 아랍에미리트연합, 스와질란드, 도미니카공화국, 과테말라 등 여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거나 복원하였다. 또 러시아, 중국, 이집트, 시리아, 태국, 베트남, 나미비아 등 여러 나라와 새롭게 경제관계를 맺었다. 조선이 제2천리마를 탈 수 있을까? 지난 20여 년 동안 전개된 조미 핵공방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2 1월 부시 행정부는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2 1 29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북, 이란, 이라크를 한 덩어리로 묶고 악의 축으로 명명했다. 논리적인 설득력을 위해 북, 이란을 끼워 넣고 악의 축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이 연설은 명확히 이라크에 대한 선전포고에 가까웠다. 부시 대통령은 종교적 교리에 익숙한 감정형 인간이다.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는 확신과 신념이 넘쳐 있었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을 번쩍이며 이라크야말로 미국을 위협하는 악당이며 이라크를 격멸해야만 자유와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고 진정한 세계 평화가 이룩될 것이라며 확신에 넘쳐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동 역사에 조금만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사마 빈라덴과 사담 후세인이 결탁하여 9.11 테러를 자행했다는 미국의 강변을 믿기 어려웠다. 오사마 빈 라덴이 대미 적개심에 불타는 이슬람 원리주의 계열의 인물이라면 사담 후세인은 나세르의 통일아랍에 심취했던 바트당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입에서 사실상 이라크에 대한 공격 선언이 발표되자 전세계는 경악하고 말았다. 9.11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할 때 그것이 국제법을 유린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논리적으로 9.11의 연장선 아래 있었다는 이유로 침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어거지로 9.11과 이라크를 연관시켜 이라크에 대한 공격 의사를 명확히 하자 대대적인 저항이 시작되었다.


 
일차적인 공방은 유엔 안보리에서 벌어졌다. 중국과 러시아, 독일과 프랑스가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침공계획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계획을 날카롭게 규탄하며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궁극에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한 미국은 유엔 안보리의 모자를 쓸 수 없었다. 미국은 점차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이에 더해 2003 2월 베트남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반전운동이 유럽 대륙을 휩쓸었다. 근대 문명을 주도해온 미국과 유럽은 이라크 침략이라는 역사적인 기로에서 극적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진짜 테러는 누가 저지를까

 

 미국과 서구 유럽에는 리비아와 카다피 개인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강하다. 그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리비아는 이 시대의 악의 제국이라 불린다. 서구 언론들은 리비아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한다.

 서방에서 다루는 테러리즘은 공포정치, 무정부주의, 군사적 폭력과 결합하여 악의 색깔을 띤다. 1934 12 9일 국제연맹에 제출된 테러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에서 테러는 어떠한 정치적 이상을 갖고 있더라도 문명을 위협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또 서방을 우대하는 여론 매체들은 테러리즘을 다른 모든 정치적 폭력에 우선하여 가장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1986년 레바논 베카평원과 튀니지에 대한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73명 사망)과 미 공군의 트리폴리와 뱅가지 공습(230명 사상) 15년 동안 유럽 여기저기서 터진, 그다지 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던 폭탄 테러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다. 서방 사람들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수십 만 명의 죽음보다 호화 여객선 납치로 희생된 미국인 여자의 죽음에 더 흥분한다. 서방 사람들의 상상력은 자기 나라에서 발간되는 신문을 뛰어넘지 못한다.


 
테러 확산의 주범이며 악의 제국으로 몰려 1986년부터 18년 동안 이어진 경제제재와 군사적 보복을 견뎌야 했던 리비아는 그 같은 서방 국가와 언론들의 왜곡된 정보조작에 정면으로 대응한다. 카다피는 언론과 접촉할 때마다 여러 번 되풀이해 테러리즘에 대해 설명했다.

 테러가 일어나는 것은 위기에 처한 정세 때문이다. 테러가 확산된 것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책임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투쟁을 테러 행위로 매도하는 것을 거부한다. 진짜 테러는 소수민족을 억압하는 식민주의 국가들이 자행하고 있다.”

 테러리즘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의 영토에 대한 폭력이고 원자폭탄과 로켓, 함대 그리고 고의적으로 지속시키는 기아다. 테러리즘은 강제적인 조약을 강요하고 싶어 하는 강대국들의 난폭한 힘이다.”


 
카다피의 적수들은 교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리비아에 대해 테러를 자행하였다. 프랑스의 SDEC(국외정보 방첩부) 및 미국의 CIA가 지원하는 리비아의 반대파들은 테러와 폭동을 계획하였다. 1980 2월에 타임 매거진은 미국안보회의에서 논의된 프랑스, 미국합작의 카다피 암살 계획을 언급했다. 같은 해 7월 뉴스위크는 CIA가 카다피 반대파들과 협력해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1986 2 170대의 미군 비행기가 트리폴리, 특히 카다피가 기거하는 병영과 벵가지를 공격했고, 이때 230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지만 카다피 암살의 당초 목표는 실패하였다.

 

 









 제가 최근에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미디어 문제입니다. 베네수엘라를 연구하다 보니 외신에서는 차베스를 히틀러다 악마다 막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자국의 입맛에 맞게 보도하는 내용이 전세계적으로 주요한 국제소식으로 보도되죠. 각 나라 주요 매체들의 국제면 탑으로 실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차베스는 나쁜 놈이구나,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하니 진짜 폭정을 하겠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든요. 미국은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 같아요. 이런 왜곡보도가 외신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우리가 길들여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걱정됩니다.

 

오세혁_ 저는 2007 12월 대통령 선거 때 선거운동 하면서 무상의료, 무상교육, 공공주택에 관해 많이 얘기했었어요. 실제로 이런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는 것도 알렸고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거짓말하지 마라예요.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인식이 당연하게 돼버렸어요. 실제로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라들은 뭐든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이게 미국식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거든요,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미국식이 항상 좋다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아무리 무상의료, 무상교육 얘기를 해도 그건 남의 나라 얘기 아니냐?’라고만 하세요. 미디어도 그렇고 교육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임승수_ 예전엔 식민지라고 하면 지배방식이 눈에 확연히 드러났잖아요. 직접 총독 세우고, 말 안 들으면 폭력을 휘둘렀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지배방식이 제국주의 입장에서도 비용 많이 들고, 관리도 잘 안되니깐 진화하거든요. 눈에 안 보이게 교묘한 방식으로 지배하는 거죠.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기죠. 자신이 지배당한다는 것도 잘 못 느끼고요.

 한미 FTA 세부내용 봐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미국 놈들한테 나라 팔아먹는 거라구요. 이걸 밀어붙이는 우리나라의 경제 관료나 엘리트들은 미국물 먹고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FTA는 좋은 거라고 선전한다고요.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 많이 가잖아요. 자발적으로 가는 경우도 많지만 미국이 친미파 만들겠다 작정하고 장학금 대주고 하면서 공부시킨 사람들도 정말 많거든요. 이 사람들 미국에서 배운 거라고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뿐이잖아요. 미국식 경제에 물든 사람들이 와서 국가를 운영하니까 알아서 미국에게 넙죽 넙죽 갖다 바치는 거죠. 아주 교묘한 식민지 지배방식이에요.

 

 









정호연
_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가 적대국가들에 대한 경제봉쇄입니다. 자기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도 경제봉쇄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죠. 사실 경제봉쇄는 그 어떤 침략보다도 그 나라의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군사적으로 침략당하면 침략자가 눈에 보이잖아요. 경제봉쇄는 다르죠.

 리비아도 석유 매장량이 세계 5위 안에 들었고 석유 수출도 활발하게 하고 있었는데, 경제봉쇄를 20년이나 겪다보니 경제가 어려워지고 가난 속에서 국민들의 결속력도 떨어지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는 결국 미국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리비아 같은 독재국가는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선전하는 거죠. 북한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경제적 어려움이 미국의 경제봉쇄와 침략적 정책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독재정권의 결과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거죠.

 

임승수_ 브레진스키가 쓴 <거대한 체스판>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브레진스키는 문화적 지배의 중요성을 굉장히 자주 언급하더군요. 문화적 지배라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알아서 기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당연하게 미국식 삶, 미국이 얘기하는 신자유주의식 경제 논리들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삶으로 체화하는 것이죠. 미국화한 나라들을 보면 미국이 전하고 있는 가치를 있는 대로 받아들여요.

 군사적으로는 미국과 NATO 등의 방위조약으로 묶여서 미국식 가치를 거부하는 나라들을 압박하는 데 참여하고, 경제적으로는 주주자본주의 도입하고 CEO란 것도 생기고 뭐든지 공짜는 없다 식이고, 문화나 식생활도 미국식을 따라야 세련된 거고, 학교에서도 미국식 가치들이 옳다고 가르치는 거죠. 사회가 완전히 미국식으로 재편돼요.

 우리나라 서점에 가보면 가관이잖아요. 어떻게 하면 재태크해서 10억 버나, 어떻게 하면 처세를 잘하나, 어떻게 하면 미국식 사회, 미국이 얘기하는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 걸맞는 인간형이 될 것인가 알려준다는 책이 쫙 깔려 있어요. 알게 모르게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엄청난 매트릭스 같은 지배구조가 숨어 있는 거죠.

 

오세혁_ 임승수 씨 얘기에 동의해요. 예전에 일본 놈들은 대놓고 쌀 공출해가고, 채찍을 부려 철도를 만들게 했죠. 일본은 자원을 약탈해 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 이 사람들 왜 이러는 거야!’ 하고 바로 반발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요즘엔 주주자본주의가 널리 퍼져 있고, 자본의 흐름도 굉장히 자유로워서 예를 들어, 인터넷으로 돈만 잠깐 넣었다가 빼면 회사는 그대로인데 사장이 바껴버리는 구조가 만들어 졌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입니다.

 전 미국이라는 나라를 거대한 기업들의 집합체라고 봅니다. 석유회사, 무기회사, 과일회사, 수자원회사 이런 회사들의 집합체 말이죠. 제가 놀랐던 게, 예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기 전에 신문에서 미국 무기회사들이 총알 같은 재고가 많이 쌓여 있어서 지금 처리하기 힘들어 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그리고 그 다음해에 이라크 전쟁이 나더라고요. 한 번에 끝냈대요. 재고를. 그 다음에 어떻게 됐냐면, 총 쏘고 재고 처리하고, 다음에 석유회사 들어가서 석유 캐고, 다음에 건설회사 들어가서 부셔놓은 건물을 다시 건설해줬어요. 그런 회사들 대표이사, 사장들이 다 미국의 장관들, 뭐 그런 사람들이더라고요. 부통령 딕 체니도 있고, 콘돌리자 라이스도 있고.


 
참 무서운 게 얘네는 장사를 그렇게 하잖아요. 얘네도 보통 사람들처럼, 슈퍼마켓 사장님처럼 고민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팔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재고 처리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석유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고요.


 
이런 생각도 들어요. 21세기는 수자원이 중요해지는 시기라고 하는데, 석유도 바닥나버리면 아마존 강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이라크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정말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기업들의 이 욕심과 장사방식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해줘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이나
_ 스페인이 남미를 침략해서 금과 은을 약탈해 갈 때, 원주민들은 아니, 이걸 가져가서 뭘 하려고 하나라는 반응이었죠. 원주민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물건이 아닌데, 스페인 사람들이 금과 은 때문에 가서는 온갖 나쁜 짓을 일삼잖아요. 당시 남미에서는 근대화나 산업화가 없었으니까 광물이라는 것이 그다지 필요하지가 않았죠. 미국도 산업화에 자원이 필요하니까 예전의 스페인처럼 침략해서 다 빼앗아 간거죠. 원주민들이 산업화를 이루려고 해도 침략자들에게 그 기반을 너무 일찍부터 너무 많이 빼앗겨버렸어요. 원주민들에게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보통 근대화나 산업화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뒤쳐졌다느니, 후진국이라느니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공장이 들어서고 산업화가 이루어진다고 반드시 더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남미의 원주민들은 산업화나 근대화를 더 빨리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저렇게 비참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원주민들이 지금 가난하고 못 사는 이유에도 결국에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식 논리가 들어가 있어요. ‘자유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곳에서 너희들이 그렇게 못사는 것은 결국 너희들 잘못이라는 식이죠.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모든 잘못을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으로 돌려버리는 무책임함의 전형적인 희생양이 남미 원주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세혁_ 저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이런 것에 대해서 심도 깊은 어떤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제도든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휴머니즘이어야 해요. 이 휴머니즘이라는 건 우리나라 속담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거든요. 그런데 미국식 자본주의 삶이란 건 돈이 먼저 나고 그 다음 사람이죠. 돈이 없으면. 영화 <식코>에서 나오듯이 손가락이 두 개 잘려도 보험에 해당 안 되면 둘 중에 하나만 붙여야 되는 거고, 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실려 가도 보험이 안 되면 다시 길바닥에 놓고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죠.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국가로 나가게 된 계기는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목격한 상황들 때문이죠. 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있는데, 맨발로 돌아다니면서 기생충에 감염돼 죽는 사람이 있고, 이빨이 다 빠졌는데 치료도 못 받는 사람이 있을까? 왜 세상에는 같이 일을 해도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탕수수 껍질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혁명 이후에 카스트로는 자본주의로 가든 사회주의로 가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흔히 말하는 인간의 가치, 누구나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누구나 같이 일해서 나눠먹을 수 있는 그 기준에 의거해서 정책을 유지했던 거죠. 베네수엘라에 아무 조건 없이 의사를 파견해준다든가 콩을 보내준다든가 그런 모든 것들이 계산기 두들겨서 한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너네도 같은 인간이니까 그냥 주겠다, 이런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 모든 것이 휴머니즘에서 시작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승수_ 저는 탈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랑 만나서 얘기해본 적이 있어요. 제가 남쪽에 왔을 때 가장 놀란 게 뭐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러니까 병원 가서 돈 내는 거 보고 경악했다, 쇼크 먹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럼 돈 없으면 죽으란 얘기냐고 묻길래 자본주의에서는 돈 없으면 죽어야 한다고 대답해줬죠. 또 남쪽에 와서 놀랐던 게 니 땅 내 땅 있는 거였다고 하더라고요. 땅을 누가 만들었냐? 그걸 어떻게 갈라서 니 땅 내 땅 나누고 그러냐? 땅은 공공의 이익에 맞게 사회공동체[가 계획적으로 써야 되는 거 아니냐? 하더라구요. 사실 그 말이 맞잖아요.


 
그걸 보면서 정말 같은 사람이지만 어떤 사회에 사느냐에 따라서 사고방식과 인간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미국이 추구하고 퍼트리고 싶어 하는 가치는 결국에는 돈 중심의 가치죠. 이른바 시장 경제라고 부르잖아요. 그것이 인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니깐 거기에 반기를 들게 되는 거죠. 이젠 꼭 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복지나 사람 중심의 새로운 경제를 대안으로 내세우게 되는 거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생태적 가치거든요. 모든 국가가 미국식으로 살려면 뭐, 지구가 7개 필요하다고 하던가? 좀더 환경중심적인 핀란드식으로 살아도 4개가 필요하대요. 그렇게까지 살순 없잖아요, 진짜. 지금처럼 자본주의 과소비 방식으로는 인류가 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덧 미국식 삶을 거부하는 게 인류의 생존에도 직결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쿠바 같은 곳의 실험이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소중한 실험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맥락에서 문경환 씨는 북이 그동안 유지해왔던 체제 같은 걸 남쪽과 비교하면 어떤 생각이 들지요?

 

문경환_ 지구가 4개가 필요하다 7개가 필요하다 이런 얘기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북에 지하자원이 아주 많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마그네사이트 같은 것은 매장량이 세계 최대라는 얘기도 있고, 우라늄 매장량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최근에는 석유도 많이 주목 받고 있어요. 어떤 언론에서는 석유를 2005년도부터 수출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개발을 많이 안 하고 있어요.

 왜냐면 북은 건국 초창기부터 지하자원은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자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하자원은 많은데 경제가 개발되지 않은 국가들 같은 경우 보통 채굴권 같은 걸 자본주의 국가에 팔잖아요? 그러면 일단 당장은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들어오니깐 그렇게 많이 하는데, 북은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채굴권이나 이런 것들을 거의 내놓지 않고 있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참 미래를 소중히 여긴다는 지향을 느낄 수 있었어요.


 
보통 북은 다른 사회주의하고도 다르게 인식하잖아요. 주체사상이라는 독특한 기본 사상이 있고, 그런 주체사상에 따라서 사회 전반이 다 재편되어 있고, 그래서 많이 특이하게 생각하는데 기본은 사람중심의 사회를 지향하는 거죠.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기본 지향도 다 사람중심 사회거든요. 주체사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놓고 있기 때문에 뭘 하더라도 어떻게 사람을 중심으로 놓을 것이냐를 고민하죠.

 여러 가지 일화들이 있는데, 북에 아주 유명한 제철소에 일제시대부터 운영했던 아주 낡은 용광로가 있었대요. 해방 직후라 당장 경제 건설을 해야 하니깐 쇠가 많이 필요하잖아요? 근데 이 용광로가 너무 낡아서 유해물질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깐 노동자들의 건강이 심각하게 안 좋아졌대요. 그래서 당장 쇠가 필요해도 어쩔 수 없다면서 그 용광로를 폭파시키거든요? 이런 걸 보더라도 경제 건설보다 앞서서 강조하고 있는 게 사람이구나, 인간에 대한 애정, 이런 게 기본이 된 사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 북에서 강조하고 있는 게 강성대국 건설인데, 작년 말부터 ‘2012년에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자’, 뭐 이런 구호가 나오고 있거든요. 강성대국이란 게 정치사상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 이렇게 구성되어 있어요. 그리고 정치사상강국이나 군사강국은 이미 이루었으니깐 경제강국만 이루면 된다면서 몇 년 전부터 경제 건설에 주력하고 있죠.

 

 









오세혁
_ 저희 어머니는 암 때문에 몇 천만 원을 쏟아 붓고 고생하셨거든요. 엄마한테 쿠바나 베네수엘라, 영국, 프랑스 같은 데 가면 암이든 뭐든 공짜로 고쳐준다고 하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래요. 공짜가 어딨냐고. 이 자식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왔다, 빨리 보험이라고 들어놔야 네가 암 걸렸을 때 치료할 수 있지 않냐 그러면서 한 20년짜리 보험을 계속 붓고 계시거든요. 저는 반미를 얘기할 때 얼마든지 미국식 아닌 게 더 잘살 수 있고 무상의료, 무상교육 충분히 가능하다는 비전을 계속 제시해줌으로써 사람들이 이쪽으로 가는 게 더 좋겠구나 생각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깐 웰빙 웰빙 하지만 진정한 웰빙은 사실 미국식으로 가면 할 수 없다, 그런데 대안이 있다, 이렇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거죠. 이러면 자연스럽게 주한 미국 문제와 반미문제도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임승수
_ 제가 베네수엘라 쪽 연구하면서 들여다본서 놀란 게 뭐냐면 이 나라가 옛날에 꽤나 잘살았다는 거예요. 아르헨티나도 굉장히 잘살았잖아요. 세계 4대 부국 중 하나였다던데. 우리는 남미를 되게 무시하는데 옛날에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 많았어요. 그리고 민주주의 수준도 우리보다 훨씬 높았고요. 그런데 그런 나라들이 한 순간에 망하더라고요, 한 순가에. 그놈의 신자유주 때문에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가보면 산동네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사람이 300만 명이에요. 산동네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신자유주의 들어오면서 농촌 다 망하고 그 사람들이 일자리 구하러 도시로 몰려왔는데 살 데가 없으니까 그런 산에 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우려스러운 건 뭐냐면 남미가 옛날에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고, 민주주의 수준이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IMF, FTA 같은 거 통해서 신자유주의식, 미국식 사회경제 체제가 들어가면서 쫄딱 망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우리가 그 길을 가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IMF 때 그랬고, FTA 하고 있꼬.

 제가 재밌자고 한 얘기가 1980년대에 남미가 IMF한테 줄줄이 당하고 1990년대 NAFTA 하면서 FTA 들어왔는데 우리랑 딱 10년 차거든요. 우리나라는 1990년대 IMF, 2000년대 FTA니까요. 2000년대 남미에 좌파정권 들어서면서 뒤집어지고 있으니 우리는 2010년대 뒤집어지나? 하하. 뭐 그건, 우리가 열심히 운동해야 가능한 거죠.

 

정이나_ 전 스무 살이던 10년 전에 남미에 처음으로 갔었는데요, 그때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심하게 양극화되지는 않았어요. 제가 멕시코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자기 부모가 무엇을 하고 어떤 직업이고 자기가 속한 사회적 위치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자기 미래가 이미 결정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지금 대학에서 공부를 하든 공부를 하지 않든 그거와는 전혀 무관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자체가 없어요. 이미 견고하게 분리된 사회구조 내에서 그냥 살아가는 거더라고요. 그러니까 젊은 친구들이 패기가 없어요. 패기가 없다는 건 미래에 대한 희망, 비전이 없다는 거겠죠. 모든 미래는 다 정해져 있어요. 자기가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과를 나와도 자기 부모의 배경이 없거나 그 당시 자기가 속한 사회적 위치가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적 계급 이동이 전혀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를 보니 그렇더라구요. 사교육을 받지 못하면 대학 못 가는 현실이고, 부모님의 직업, 경제력에 따라서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이라든가 학업 성취도가 달라지고, 이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가 돼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고착화한게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10년 전에 멕시코에서 이상하게 느꼈던 그런 현실이 한국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요즘 더욱 더 느껴요. 더군다나 이명박이 영어 교육한다는 걸 보니까 더 화들짝 하겠더라고요.


 
정말 그렇게 되면 영어 사교육 열풍 부는 건 불 보듯 뻔한 건데 그럼 사정이 되는 사람만 하고 못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이렇게 교육 자체도 양극화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 걸 보면 교육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걸 새삼 느껴요. 10년 전 멕시코에서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걸 볼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임승수 씨 말한 것처럼 정말 급속하게 우리나라가 남미처럼 되는 것도 시간문제 아닐까, 우리는 지금 거꾸로 가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이른바 친미를 했다. 그랬더니 미국은 자기랑 친하게 지내려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데에 동참해야 한단다. 그래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국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전세계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외환위기가 와서 미국이 주도하는 IMF에 긴급하게 달러를 꾸었다. ‘친한나라 미국은 남한의 경제구조를 미국식 신자유주의로 바꾸어야 달러를 빌려준다고 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고 급하게 달러를 빌렸다. 시간이 흘러보니 대부분의 국내 은행이 미국을 포함한 해외자본에 넘어갔다. 투기자본 론스타는 거저먹은 외환은행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되팔려 하고 있다.


 
비정규직은 900만 명에 육박하고 실업자와 빈민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미국은 IMF로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완전한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가는 한미FTA를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경제는 친미한 죄로 무너지고 있다.


 
남과 북의 정상이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루자는 염원을 담아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남측과 친한사이인 미국은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 통일이 되면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명분이 없고 자국의 무기를 맘대로 팔아치울 큰 시장을 잃기 때문이다. 전쟁을 먹고 사는 나라 미국은 이렇게 우리 민족의 염원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친미한 죄로 아직도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도대체 왜 아직도 친미를 하는가? 계속 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친미하다가 나라 망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반미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 책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반미는 단순한 증오만 가득하고 대안 없는 반미가 아니다. 반미국가들이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가면서 지키려고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나가고, 그러한 가치가 지금 친미국가에 사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진지하게 토론해보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


 
이 책에 나온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베트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란, 리비아의 예, 그리고 좌담회를 통해 그러한 가치들의 면면을 보았기를 바란다.


   
!! 이제 대세는 반미.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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