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 유시민 지음/푸른나무 |
1.
나의 경우, 정치인 유시민보다 작가 유시민을 먼저 만났다.
그의 책들을 읽다 어느 순간, '아니,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정치인이란 말이야?'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가 내놓은 책들이 정치인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말하는 정치인들이 내는 책이란 '자기자랑 95%+자기자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자기 반성 3%+자기자랑을 죽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따스하게 비춰지는 인간적 결점을 강조하지만, 결국 자기자랑 2%'로 이루어진 책을 말합니다).
2.
한국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문제는 뚜렷한 역사관 없음, 이다(스스로 생각한 흔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데, 없다. 이 상황에서 선거 테크닉만 좋으니 온갖 해악이 탄생한다.
진지한 자기성찰 한번 없이, 어릴 때 암기실력으로 딴 학벌 하나로 지식인 행세하는 정치인은 누구나 꼴보기 싫다. 이런 류의 책을 쓰는 정치인이 있어 다행이다.
36.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서경전역은 양측 병력이 수만 명에 불과하고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 역사(단재의 이 말은 조선 왕조 시대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사 전체를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반적으로 조선, 조선 민족, 조선 역사 등을 우리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 저자 주) 에 끼친 영향은 발해의 멸망이나 몽고의 침략보다 훨씬 더 크다. 과거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사건으로 알았으나 실상은 그와 다르다. 서경전역은 낭불(郎佛)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역사 교과서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가장 충실하게 표현한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예에서 보듯 널리 보급되어 읽히고 후세에까지 없어지지 않고 전해진다. 『삼국사기』는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사대주의를 근거로 지은 책이라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아주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일제는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므로 일본이 도와주어야 근대화를 할 수 있다는 식민주의 역사관을 보급하기 위해 ‘조선사 편수회’ 라는 역사 편찬 기관을 운영했다. 조선사 편수회가 『삼국사기』를 우리나라 고대사의 기본 사료로 못박은 것은
일곱 나라 말을 하고 열아홉 가지 언어를 읽었다는 이 박식한 학자는 『영국 문명사』라는 책으로 높은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버클은 역사상의 모든 변화를 자연과 인간 지성이라는 두 요소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했다. 여기서 자연은 특히 지형과 기후와 토양을 가리키며 지성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뜻한다. 버클은 자연이 험준하고 웅장한 곳일수록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왜소하게 느끼기 때문에 현세를 부정하는 운명론이나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지게 된다고 하면서 인도를 그 사례로 들었다. 같은 이치에 따라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친근하고 부드러운 곳에서는 현세를 긍정하는 낙천적인 철학과 인생관이 발전하게 되는데 유럽이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지역에서는 자연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데 반해 유럽에서만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어 자연을 이용하고 길들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버클에게 역사의 진보란 바로 환경의 작용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의미하며 정신의 힘을 키우는 것은 과학 지식의 보급이었다.
버클의 이론은 실증주의 역사학의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법칙을 밝히겠다는 그들의 포부와 노력은 훌륭했지만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것은 보잘것이 없었다. 버클이 찾아낸 법칙은 유럽인의 편견으로 얼룩진 또 하나의 운명론에 불과하다. 요행이 유럽의 온대 지방에 태어난 사람들은 문명과 진보의 주역이 되고 자연환경이 웅장한 곳에 태어난 사람들은 유럽인들이 구제해 주기 전에는 자연의 지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개 족속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버클의 견해는 유럽인의 인종적 우월감을 반영할 뿐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도 명백히 어긋난다.
마르크스 이전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무엇인가 고상하고 신비한 것으로 여겼다. 신의 의지가 역사를 통해 실현된다든가,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이 역사의 진보를 이룬다든가 하는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인간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문학과 예술을 즐기고 위대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먹고 마셔야 하고 옷을 입고 잠잘 집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합리적 존재이기 이전에 육체적·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유물 사관의 출발점이다.
철학자들은 먼 옛날부터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벌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은 세계의 근원이 물이라든가 원자라는 의견을 가졌다. 이것이 유물론의 시초이다. 유물론은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물질세계 그 자체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유물론은 어떠한 종류의 천지창조도 인정하지 않으며 물질세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추상적인 것, 예컨대 신의 계시라든가 인간의 이성 등이 물질세계를 지배한다는 관념적 사고방식을 배척한다. 이 때문에 유물론은 기독교 신학이 사회를 지배한 중세 유럽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베이컨 등 근대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된다.
마르크스는 본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다음 <라인신문>에 입사했다. 편집장이 된 마르크스가 여러 가지 사회·정치적 쟁점에 대해 날카로운 논설을 발표하자 프로이센 경찰은 즉각 그를 위험 인물로 지목했다. 러시아 황제를 비판함으로써 은근히 프로이센 황제를 비난하는가 하면, 사사건건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부자와 정부를 비판하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까지 무신론적 비판을 일삼는 언론인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페간당할 처지에 빠졌고 마르크스는 재빨리 파리로 줄행랑을 놓았다. 이것이 평생 동안 계속된 고달픈 망명생활의 시작이었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가난해서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공산주의를 창시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제법 유복한 변호사의 아들이었고 또 남달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저 남들처럼 돈벌이에만 열중했다면 얼마든지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을 인물이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직후부터 고향에서 유산을 받은 1856년 사이의 약 7년 동안 마르크스 가족은 런던의 이름난 빈민가에서 정말 가난하게 살았다. 마르크스 부부는 여기서 여섯 자녀 가운데 셋을 잃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마르크스는 1867년에 『자본론』제1권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쓰는 데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을 쏟아 부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예언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그토록 갈망했던 “새 시대의 도래”를 보지 못하였으며, 그가 사망한 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본주의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어쨌든 붕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눈여겨 보지 않았던 러시아와 중국 등 후진국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출현하였으며 그마저 대부분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았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쓸모없는 제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본가들 사이의 혹심한 경쟁 때문에 반드시 극소수의 손에 거대한 부가 집중되는 독점체제로 갈 것이라고 하였는데 역사는 이를 사실로 입증하였다. 새로운 기술과 기계의 도입으로 인한 광범위한 실업,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파멸적인 공황 등도 자본주의의 고질병으로 드러났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마르크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혁명과 전쟁뿐 아니라 문화예술 면에서의 변화를 연구할 때조차도 한 번쯤은 그 경제적 배경이나 원인을 짚어 보곤 하는데 이는 많든 적든 마르크스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피지배 계급의 일원으로서 생산에 참여하고 불합리한 사회질서에 맞서 투쟁한 수많은 대중을 역사의 창조자이자 진보의 주역으로 올려세웠다. 마르크스의 관점에 동의하는 역사가들은 과거 사회의 지배층보다는 다수의 피지배 대중이 어떻게 살고 투쟁하였으며 당시의 경제생활과 사회제도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려고 애썼다. 그 결과 다수 대중의 생활상태를 알려주는 사료가 예전과는 달리 역사가들에게서 좋은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을 삼가는 경향이 있다. 문명화된 현대의 독자들은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큰 권력을 휘두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쓴 역사에 대해 은근한 반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 대중이 역사의 주역이라는 견해를 원칙적으로 반대할 입장에 있는 사람은 원래 많지 않은 법이다.
잘된 일은 모두 남자들의 공이고 잘못된 일은 대개 여자 탓으로 돌리는 식의 역사에서 가장 이름난 여성은 양귀비일 것이다.
미국 정부는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이 자진해서 권력을 내놓는 일은 없으며, 민중의 힘이 독재자의 폭력을 능가할 때라야 마지못해 부분적인 양보나마 하게 된다. 만일 그러한 양보마저 거부할 경우 독재권력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동반한 민중의 힘에 의해 무너진다.”
“역사의 창조자는 민중”이라는 견해를 과격하게 밀고 나가면 “역사상의 모든 영웅은 시대 상황과 민중이 만드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위인들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민중은 다른 누군가를 그 자리에 대신 세웠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주장은 실제 역사에 비추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다른 인간의 소유물로서 짐승 같은 대접을 받은 로마 시대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리가 없다. 제정 러시아 시절 농민에 대한 잔혹한 수탈과 압제가 없었다면 푸가초프라는 전설적인 농민 반란의 지도자가 나왔을 리 만무하다.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가 그토록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을 몰고 오지 않았더라면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개석 정부가 무능 부패하지 않고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모택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모택동과는 다른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이나 위인이란 역사의 창조자이기 이전에 그 시대 상황의 산물로서 대중의 열망을 대표하여 사회와 사상을 변화시키는 데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한 개인을 말한다. 『법철학』이라는 저서에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내린 다음과 같은 훌륭한 정의도 바로 이런 관점에 서 있다.
한 시대의 위인이란 의지를 대표하고 전파하며 완성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의 행위는 시대의 원천이고 본질이다. 그는 곧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들이 없었다 할지라도 역사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거나 다른 누군가가 대신 그 일을 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스파르타쿠스나 푸가초프의 정의감과 용맹성을 모욕하고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천재성을 공공연히 깎아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공화국의 이념을 온 유럽에 전파하였을 것이라거나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상대성이론을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지나치다. 임진왜란 당시
영웅과 위인은 물론 시대의 산물이지만 그들을 외면하고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역사를 위인들의 전기로 보아서는 곤란하지만 역사에서 위인의 지위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도 현명한 일이 아니다. 민중을 역사의 주역으로 내세운 것은 지배자와 권력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낡은 관점에 대한 비판일 뿐 위인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미 군정과 친일세력의 복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소련과 합의한 미국은 1945년 9월 8일 미군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미군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 민족에게 해방군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해방군다운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일본의 영토를 빼앗은 점령군으로 생각했으며 철두철미 그렇게 처신했다.
인천 상륙 하루 전 맥아더 사령부는 비행기로 남한 지역에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뿌리게 했다. 미 군정의 기본정책을 담은 이 포고문에서 맥아더는 자신이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자”라고 못박고 “점령군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했다. 이는 곧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이 단결하여 만든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은 물론이요, 당시 중경에 머물러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의 모든 자주적인 정부를 부정한 것이었다. 미 군정의 이런 입장 때문에 후일 귀국한 백범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 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 사업, 공중 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산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하여야 한다.
여기서 정부와 공공단체란 물론 조선총독부와 그 부속기관을 비롯한 일제의 행정 조직을 의미한다. 서울을 점령한 미군 제24군단의 하지 중장은 조선총독부에서 아베 총독과 항복 조인식을 가진 후 총독부 건물 꼭대기에 그때까지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성조기를 대신 올렸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 제1차적 목표는 우리 민족의 해방이나 자주독립 국가 수립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종전과 동시에 소련과 경쟁관계에 돌입한 미국은 남한을 튼튼한 반공기지로 만드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격화되어 장개석이 수세에 몰리고 동유럽에 잇따라 소련식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이런 입장은 더 확고해졌다.
미 군정청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뒤섞인 독립운동 세력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적대시하고 민족주의자를 경계했으며 오직 반공주의자만을 원했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일제히 몸을 숨겼던 민족반역자들은 미 군정의 복귀명령에 따라 다시 현직으로 돌아와 너나없이 반공주의자를 자처하며 미 군정의 날개 아래 몸을 숨겼다. 미 군정은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와 경찰을 창설하면서 일제하에서 투옥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배제했다. 광복군 출신 등 수많은 애국인사들은 미 군정의 의도를 의심하여 참여를 거절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일본 군대와 경찰에게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들이 국방경비대와 경찰을 장악하였다. 국방경비대 초대 사령관
미 군정청은 소작제도의 폐지와 토지개혁을 원하는 농민들의 소망은 아랑곳하지 않고 친일 지주들의 재산을 보호해 주었으며, 일제가 남기고 간 산업시설을 친일 경력을 가진 정치적 지지자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주었다. 지방 행정조직과 교육기관에서도 식민통치와 황국 신민화 정책에 협력했던 자들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역사의 심판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 역시 처음에는 맥아더 사령부와 비슷한 포고령을 내리고 조선총독부의 권력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좌우 합작 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행정권을 넘겨주었으며 일본인의 재산을 국유화했다. 일제 강점기에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인물들이 인민위원회의 요직을 맡았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들을 신속하고 단호하게 숙청해 버렸다. 이어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법령을 만들어 농토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자기 나라를 복구하는 일과 동유럽 사회주의를 지원하는 데 몰두한 소련으로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북한의 국내정치에 미국만큼 노골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일당독재와 남한에 대한 무력통일 시도,
민주주의를 향한 몸부림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에 비극의 씨앗을 뿌린 것은 해방 후 3년간 남한을 지배한 미 군정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이익과 반공주의에만 집착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억압하고 민족반역자와 모리배들이 신생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함으로써 적어도 한국의 현대사에 관한 한 역사의 심판을 입에 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반민 특위는 민족 반역자들이 이 기간 동안에 축적한 거대한 힘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미 군정의 상속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정부와 사회 각 분야에 이미 자리를 잡은 친일세력은 반민 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반민 특위가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친일세력은 마침내 반민 특위를 주도한 인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정치 공세를 폈다. 경찰은 반민 특위의 검거 선풍이 고조되고 있던 1949년 5월 18일 3명의 국회의원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나중에 더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친일세력은 이 사건을 빌미로 날마다 파고다 공원에 모여 국회 안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라는 데모를 벌였다. 반민 특위는 시위 군중 가운데 유난히 날뛴 반민법 혐의자 하나를 연행했다. 그러자 시위 군중은 반민 특위 본부로 몰려가 “반민 특위는 빨갱이 앞잡이다”, “공산당과 싸운 애국지사를 잡아간 조사위원들은 공산당이다”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반민 특위는 서울시경에 사무실 경비를 요청했지만 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할 수 없이 직접 시위 해산에 나선 반민 특위는 대책회의를 열어 사태를 검토한 끝에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와 종로경찰서 사찰 주임
경찰과 반민 특위는 타협하여 최운하와 조응선 등 경찰간부와 35명의 납치된 특위 직원을 포로 교환하듯 맞바꿈으로써 표면상 사태를 무마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반민 특위는 치명상을 입었다. 곧이어 김약수 국회 부의장과 특위위원을 포함한 8명의 국회의원이 공산당과 연계되었다는 혐의로 추가 구속당하고 특위 재판관 둘이 사퇴하자 반민 특위는 종말을 맞았다. 국회는 특위의 활동기간을 축소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특위위원도 대부분 교체해 버렸다. 반민 특위는 그간의 조사활동을 마무리짓고 9월 5일 공식활동을 마감하였다.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지 못함으로써 우리 겨레는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일본군과 경찰에서 잔뼈가 굵은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의 수뇌부는 보고 배운 대로 행동했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도 근원을 추적하면 이 문제에 닿는다. 잔혹한 고문은 일제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자유당 시대의 사찰경찰, 오늘날의 대공경찰로 이어져 온 전통적 관행이다. 장교가 병사들을 종부리듯 하고, 상급자가 하급자를 구타함으로써 ‘군기를 잡는’한국 군대의 뿌리 깊은 악습 역시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자들이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다. 국민을 주권자로 대접하지 않고 통제와 조작의 대상으로 취급한 이승만 정권 이래 역대 독재정권의 시대착오적행태도 조선총독부의 통치방식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은 입으로는 민족 자주를 말하면서 수십 년 동안이나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앙청으로 사용해 왔고 일본 총독이 살던 집을 관저로 삼았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20여 년 가까이 독재정치를 편 결과 일본 군대에서 유래한 ‘군사 문화’는 사회의 모든 분야로 퍼져 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필요하다면서 비상계엄령을 내려 야당과 학생과 시민들의 반대시위를 진압했다. 박정희 정권은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차관을 ‘독립 축하금’ 명목으로 받는 대신 일본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해 배상받을 권리를 포기했다. 그래서 오늘날 일본의 우익 군국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일본이 과거의 행위에 대한 모든 보상을 다했다는 주장을 편다. 일제에 항거하여 이역만리 타국 땅과 일제의 감옥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독립투사들은 가정을 돌보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의 후손은 해방된 조국에서 가난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친일파를 부모로 둔 사람은 부모가 겨레를 팔아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높은 교육을 받았다.
일그러진 역사는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 민족의 독립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나선 사람들은 오직 희생만을 치렀고 일제와 미 군정, 역대 독재정권에 아부한 자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의로운 자가 아니라 강한 자를 따르고 사회 정의보다는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의 좌우 대립, 그리고 역대 독재정권을 경험한 어른들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너무 나서지도 뒤처지지도 말고 그저 중간에만 서라”고 교육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의 심판은 단지 역사학자들의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현실적인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이 북한을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한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북한의 이익은 무조건 남한에 손해’라는 단세포적 사고방식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 ‘북한과 남한 모두에, 다시 말해 민족 전체에 이익이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국가보안법은 ‘북한에 이익을 안겨줄 가능성’만 있는 행위면 무조건 범죄행위로 규정한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 책장 > 900 역사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민국사 1-4 (0) | 2011.12.04 |
---|---|
홍콩(큐리어스 시리즈 22) (0) | 2011.08.20 |
일본온천 42℃ : 온천 마니아의 취재 노트 공개 (5) | 2011.08.16 |
라오스(큐리어스 시리즈 50) (0) | 2011.07.03 |
[만화]나는 공산주의자다 1, 2 (0) | 2011.05.29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특강 : 역사의 한복판에서 길을 묻다 (2) | 2011.05.29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지도 (0) | 2010.06.04 |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0) | 2010.06.03 |
중국을 이해하는 9가지 관점 (0) | 2009.07.23 |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1) | 2009.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