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선 끝나니 항의 전화도 줄어들고 회사와 관련한 고소, 고발도 줄었다. 요즘은 조금 마음이 안정적이라고 할까. 요즘은 모 부서의 1급 공무원 하나가 시비를 자주 거는데 화가 나긴 하지만 그럭저럭 다 잘 넘어간 듯하다. 

천 만원짜리 벌금이 가장 걸리나 문재인 대통령 후보시절, 선거기간 실명제도 타당하지 않았다고 했기에 한 번 다투어 볼만 해졌다.

2.
어쨌든 간만의 평온한 주말이다. 아내와 외식도 하고 산책도 하고 머리도 잘랐다. 나로서는 방금 자른 머리와 이발소에서 자른 머리가 별 구분 가지 않는데 연애시절, 이발소에서 자른 내 머리를 몇 번 본 아내가 안된다고 했다. 으음.

집 앞에서 산책하며 곱창집을 지나는데 얼마 전 생각이 난다. 아내와 저녁을 먹었더랬다.

당시, 점원이 말했다.

"정.말. 집에서 나오셨나봐요."

임팩트가 있다. 정말이란 부사엔 그만한 힘이 있다고 할까. 스스로 이런 말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타인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의외로 으잇샤, 하고 섬세하게 잡아내는 남자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해서 그날, 한 생각에 도달했다.

어쩌면 나는, 패션이라는 거대한 산의 정점을 이미 일찍 점령해 버린 게 아닌가 하고. 문득 떠올라 오늘 다시 생각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3.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은 대개 몇 년의 노력으로 완성된다. 타고난 기질도 있겠지만 그 정도 센스는 노력으로 가능한 범위다.

집에서 나오셨나봐요, 는 다르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범위는 아니다. 그야말로 미증유의 재능, 하늘이 선사한 타고남, 다른 차원의 서사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십 수년 같은 말을 듣는다면 확신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내가 집에서 뭘하는지, 집이 어딘지, 과연 집은 있는지,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의 생면부지 사람조차 반드시 내가 집에서 방금 나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능력, 그 압도적 타고남을, 동아시아 구석탱이의 나란 남자가 이루어버린 건 아닐까, 라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4.
사람이 자신의 특별한 재능에 눈 떠버리면 이는 하나의 권력이 된다. 권력은 쓰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만약 내가 범죄를 일으키고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한다면... 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무섭다, 라는 기분이다.

언제든 집에서 방금 나온 남자니까. 돌이켜보면 방비엔에서도, 대만에서도, 세부에서도, 홍콩에서도, 우에노에서도, 특히 연변에서조차 나는 집에서 방금 나온 남자였다.

막강한 재능에는 막강한 책임이 따른다. 아무도 모르게 패션이라는 거대한 산의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많은 고민이 된다.

... ...

주말이라 역시나 한가한 잡담이다. 언제나처럼 크게 의미는 없다. 

201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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