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나가노현, 산 속 깊은 곳. 나는 마운틴 고릴라와 싸우고 있었다.

...는 거짓말이고(나가노현에 있었던 사실) 제법 눈이 쌓인 새벽이었다(그러고보니 마운틴 고릴라는 마운틴에 살아야 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지리산에 안 살지. 뭐 여튼)

인간의 감각으로는 완전에 가까운 무음의 세계가 온다. 눈은 소리를 지운다.

이따금 파삭, 파삭,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나무 가지만 존재한다.

이 감각은 묘하다. 즐겁다.

이 때의 경험으로 무음의 세계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2.
소리가 최소화된 상태를 좋아한다. 내 주위에는 의미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짝에도(정말 아무짝에도)의미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TV도 라디오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나 또한 한방향의 인간인 지라 텍스트 외의 자극은 피곤하다. 다만 이번엔 반대편 극단의 문턱을 희미하게 보았다. 

3.
집에 오디오 기사를, 아, 아니, 강헌 선생이 결혼선물로 집에 오디오를 설치해 주었다. 선생은 한 때 오디오에 미친 사람으로 알고 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극한을 찍은 사람의 이야기는 과연 흥미로운데 그중 전기의 질에 따라 달라지는 음을 잡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일화가 재밌다.

최상의 소리를 찾기 위해 이사할 때 전압 체크는 물론, 나중에는 독립적으로 발전기를 돌리고 화력 발전소의 전기, 원자력 발전소의 전기를 따지는 레벨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한다.

내 보기에 선생도 그쯤 간 것 같다. 강헌 선생은 한참 이것저것 체크한다. 접지를 위해 전선을 자르고 전압을 체크한다. 클래식 음악을 틀어 바이올린, 피아노 등의 소리도 확인한다. 굉장한 덕후, 아니, 전문가의 포스다. 

전문가 포스의 강헌 선생님. 오디오 설치하는데 자꾸 옆에서 뭘 시켜서 귀찮았지만 싸우면 지니까 시킨대로 조수 노릇을 했다 


음악 하나 듣는데 이렇게 많은 기계가 필요한가, 생각했는데 잘 모르니까 나대지 않았다. 이럴 땐 나대지 않아야 한다. 이럴 때 나대어 버리면 분명 맞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4.
선생이 주신 오디오는 1970년대 그룬딕이라는 회사의 제품으로 그 당시 장인의 작품이다(물론 저는 전혀 모릅니다. 알아도 별 수 없지만).

뭔지 모르지만 왠지 있으니까 집이 멋있어지는 기분이 드는 기계들


나로선 오디오 자체보다 선생의 이야기 쪽이 재밌는데 당시 엘리트 공대생들은 모두 오디오 쪽으로 가서 굉장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한다.

기계는 집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도 재밌다. 전압이 다르고 접지가 다르고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기계를 끄지 말라 하시는데 기기가 전기를 먹으며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라 한다.

과연 깊고도 오묘한 세계다.

5.
가끔 아내가 컴퓨터로 뮤지컬을 보면, 나는 뭐가 좋아 저리 볼까, 했다. 같은 장면을 이 환경에서 들으니 그 기분이 온다.

아내는 직업이 직업이었던 지라 컴퓨터의 후진 소리로도 그 맛을 상상해 낼 기반이 있다. 목욕할 때만 노래를 부르는 정상인인 나와 달리 아내는 아무때고 흥이나면 노래를 부르는 이상한 사람이라 기반이 더 단단한지도 모르겠다.

음의 상상을 가능케 하는 씨앗이라고 표현해야하나, 그건 내게 없는 종류의 무엇이었기에 지금까지는 들리는 소리 자체만이 내 세계의 전부로 끝났다.

헌데 이를 반강제적으로 고막에 때려박는 환경에 오니 이제사 그 맛을 알겠다.

그 맛을 알게해준 스피커


클래식도 팝도 재즈도 라디오도 생생하면 다들 굉장하다.

6.
나의 경우, 딱히 음악을 많이 듣진 않지만 호라이즌 던(PS4게임입니다)에서 썬더죠를 잡을 때 내는 호쾌한 소리로, 과연 이 오디오는 대단하구나, 라고 느꼈다. 

강헌 선생이 오디오를 설치해준 김에 아내말고는 잘 보여주지 않는 "썬더죠 로프캐스터 5연발로 묶고 냉동으로 얼린 다음에 하드포인트 화살 연사로 잡는 비기"를 보여드렸다.

선생 표정을 보니 감동하신 듯하다. 오디오의 가치를 아는 나란 남자가 물건을 받았다는 느낌이랄까.

이 정도면 강헌 선생도 보람차지 않을까 한다.

물건에는 주인이 있다.

추신: 앞에 썬더죠 어쩌고는 인류와 인공지능의 미래를 탁월한 안목으로 풀어낸, 호라이즌 던 정도의 게임을 플레이 해보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세익스피어나 도스토옙스키가 환생하면 요즘 세상에선 게임을 만들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20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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