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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2)


2009.12.28.월요일

죽지않는돌고래

 

 


 


4.

1950.09.27 전주. 학살된 자의 기록만이 남아있고 가해자의 기록은 없다.

출처 : 미국 국립 문서 기록보관청

 

보도연맹사건이라는 국가에 의한 무차별 학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수의 탈을 쓴 자들은 전쟁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그들이 살해한 사람들은 국가를 위협한 빨갱이였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점점 드러나는 피해자의 수와 관계자의 증언은 그 변명을 우습게 만들었다. 

 

최소 20만에서 많게는 100만. 희생자의 대부분이 순박한 국민. 그야말로 대량학살이었다. 여기 저기 남아있는 기록과 증언은 일제 강점기의 그것보다 더 악랄할 정도였다.

 

폐광에 사람을 꾸역꾸역 집어 넣어 묻어 버렸고 사람들을 철사로 엮어 돌만 매단 채 수장했다. 부산 거제 방면에서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산채로 사람을 엮어 수장시켰다. 심지어 남녀를 강제로 정교 맺게 한 다음 바다에 버리고 빨갱이라고 위협하며 강간을 하고 죽인 일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있었다. 지금 다시 '위대한 국부'로 되살아나려 하고 있는, 국민들이 목숨을 버려가면서 끌어내린 그 대통령 말이다.











 
 


<사진 설명 : 2004년 5월 11일 방영된 'PD수첩 - 55년간의 침묵, 민간인 학살' 의 캡쳐 분. 위 장면은 희생자 유가족이나 생존자들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부분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나찌의 유태인 학살이나 킬링필드에 대한 역사를 배우며 인간의 잔인함에 경악한다. 그리고 한국은 그 같은 끔찍한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유태인 학살이나 킬링필드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이 땅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의 학살보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 더 소름 돋는 이유는 첫번째, 우리가 아직도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점. 두번째, 그들의 후손은 나라 곳곳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거꾸로 학살의 장본인을 영웅으로 만들려 한다는 점이다. 가장 무서운 세번째 이유는 그들을 추종하고 떠받드는 사람들에게 많은 국민들이 오늘도 한표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는 일본의 정치인과 우익단체를 비판한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적어도 너희들의 선조가 한 짓은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고. 후손들이라도 아픈 역사를 배우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오늘 똑같이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은 얼마나 많은 진실을 담고 있을까.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걸까. 2009년 12월인 지금도 우리의 역사교과서는 권력자들의 불편한 사실들을 숨기고 있는지 모른다.>

 

 

5.

대한민국이 원래 이런 나라였을까. 우리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이렇게 악랄했던가. 지도층이 한심한 적은 많았지만 생명 하나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귀히 여기던 민족이었다. 

 

벌레를 밟아도 죽지 않게끔 신발(짚신)을 헐겁게 만들던 민족, 세끼 밥을 못 챙겨 먹을 만큼 가난했지만 벌레도 먹고 살아야 한다며 고수레를 외치던 민족, 까치와 함께 살자고 감을 다 따지 않았던 민족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국민의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는 대통령은 그렇다 치자. 그에 따르던 군인들은 어떻게 그리 잔악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을까.

  

당시 이 나라의 지도자 층, 특히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의 간부들에게 조국과 국민이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 한번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그들 대부분이 그곳 출신이었던 것이다.   

 


<틈새 이야기 :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 중 단 한명의 연결고리만 끊어졌어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이 이 정도까지 덮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은 4.19 혁명이 일어나고서야 그 원통함을 호소했지만 하필이면 그 다음 등장한 이가 박정희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눈물과 한으로 지새우다 겨우 용기를 낸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국가의 사죄가 아니라 반복된 고문과 빨갱이 누명씌우기였다. 박정희가 죽자 그들은 18년만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지만 하늘이 무심한지 그 다음 등장한 이가 바로 전두환이다. 

 

그들은 고문과 누명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갔고 학살을 증언해 줄 많은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다. 당시 어머니를 관통한 총알을 맞은 탓에 겨우 목숨을 건진 갓난아기마저도 이제는 환갑을 넘은 나이다.  

 

희생자의 유족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 심지어 이름도 짓지못한 젖먹이마저 살해 되었음에도 인터뷰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야 말로..."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간 다음 정권에 또 누가 들어서서 그들을 잡아가 고문을 할지 모를 공포가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인간은 두려움으로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고 한다.>

 

 

6.

 


광복 후, 누구보다 기뻐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모든 가산을 탕진했고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진 자신의 현실을 말이다.

 

친일파의 자식들은 좋은 옷에 좋은 가방을 메고 학교를 다녔지만 독립운동가의 자식은 누더기 옷에 제대로 된 신발 하나 없는 현실이었다. 본인의 고통은 참을 수 있어도 가족의 고통은 참기 힘든 법. 비록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그 상실감과 허탈감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후손 중에는 또 다시 이 나라가 침략당한다면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그냥 말이 아니라, 한이 담긴 말이다. 친일을 하고 독재정권에 기생했던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었다. 바로 스스로 '애국자'임을 자처한 것이다. 그것은 독립운동가들 최후의 보루인 명예마저 빼앗아 가는 일이었다.

 

광복 후에 더 큰 금력과 권력을 가지게 된 친일파들은 자신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바로 ‘보수’. 진짜 보수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오늘까지도 그 가면 아래서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 "진실과 정의", "국익과 반공", 그리고 그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애국과 자유"를 지껄이며. 

 

독립운동가들은 마지막 남은 자부심의 일부마저 쪼개어 간 그들에게 끝없는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그들과는 나눌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 딴지스들이 알았으면 하는 틈새이야기

 

 

친일파 후예들의 대표적 논리중 하나. 태어날 때부터 일제강점기였던 사람들, 특히 1910년, 20년대에 태어나 친일활동을 한 사람들은 태어나서 학교를 다니고 청년이 될 때까지 경험했던 세계가 모두 일제 치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조선인에게 이 말은 지나가는 개도 웃지 않을 헛소리였다. 특별히 독립운동가처럼 활발한 활동은 하지 않더라도 민중들 대부분은 너무나 당연히도 조국의 광복을 염원했고 한일병탄의 아픔을 자손들에게 가르쳤다.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손기정과 남승룡. 그들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나란히 1위와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해냈지만 2위인 영국선수가 당당히 가슴을 펴고 있는데 비해 시종일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제치하인 1912년에 태어나 그 시대의 교육을 고스란히 받았지만 일장기를 달고 기미가요를 듣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남승룡 선수는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보다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것이 더욱 부러웠다고 말했다. 손기정은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에서, 그것도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탓에 수많은 인터뷰를 받았는데 국적을 묻는 질문에 언제나 "Korea" 라고 답했다. 싸인을 할 때는 한반도를 그려넣기도 했다.

 


또한 본선 출전을 제외하고 각종 공식, 비공식 행사에서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단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단 한장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그가 항상 이리 저리 둘러대며(본선 때 깨끗한 운동복을 입고 싶다, 가정집에 초대 받았을 때는 운동복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등)일장기를 단 운동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일장기를 단 그의 사진은, 반드시 국적마크가 있어야 하는 본선 진출 때 뿐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일본 선수단이 축하 파티를 열어 줬지만 그들은 불참했다. 다른 조선 선수들과 함께 베를린 교포이자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봉근의 집에 가, 난생 처음 태극기를 구경하며 그 날을 보낸 것이다.
 

마침내 해방이 된 1945년의 10월 27일, 그는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 경기대회"에서 이번에는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 아래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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