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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2009년 2월이었다. 천여 군데에 달하는 외국계 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정중히 거절한 나는(방글라데시아 노가다, 미국 슬램가 시체 처리등)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평소의 꿈이었던 자유기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틈틈이 글을 적어 왔고 무엇보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즐거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창시절의 용돈벌이가 생업을 책임져야 할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좀 더 많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사이의 괴리를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우선 조그마한 문예지로 데뷔한 햇병아리에게 원고를 맡기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창시절에 받았던 상들과 경력은 프로의 세계로 건너오면서 완전히 빛을 잃는 다는 걸 깨달았다. 이 쪽 세계에서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눈부심 때문에 보이지 않는 '진짜' 거의 모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2007년에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신춘문예 등단작가 100명을 조사한 결과, 소설가는 연평균 수입이 100만 원,시인은 30만 원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월평균이 아니라 연평균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이 이럴진데 굳이 나에 대해선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주무기가 녹슬면 안된다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만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렇게 큰 실망은 하지 않았다. 우선, 글쟁이로 당장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경우, 내 밥벌이를 책임져 줄 게 무엇일까 생각했고 그게 일본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 전공은 일본문학이다. 대부분 대학생이 그렇듯 졸업할 때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고 내 전공과 관련해서 누군가 전문지식을 질문할 경우에는 그와 서먹한 사이가 되곤 한다.)어쨌든 이 무기를 녹슬게 놔두면 나중에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도 일본어 과외를 하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운칠기삼으로 타낸 수상경력들을 내세워 학원의 주말 회화 선생으로 나서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히라가나도 몰랐다가(2학년 때까지 선동열 방어율보다 우수한 학점을 유지했다.)제대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단기간에 회화가 터진 노하우의 소유자였기에 그 방면의 교육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어 한국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일본어 학원에서 간단하게 실력을 검증 받고는 회화실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문제는 한자였다.(대부분의 유학생들이 한국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회화실력이 급속도로 퇴화한다. 의외로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한자시험 답안지.]



나는 회화에 비해 처참할 정도로 한자실력이 부족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 실력으로 대학을 졸업했나 싶을 정도다. 암기공부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탓에 한자실력은 엉망이고 사람들과 대화하길 좋아하는 탓에 회화실력은 괜찮은, 뭐 그런 차이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부족한 한자를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 이곳 저곳을 둘러 보고 청강을 해보았지만 역시 한자강의란 게 대부분 지겹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유명하다는 학원조차도 단순히 한자를 눈으로 훑거나 몇 번 써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전공자이다 보니 관련 분야에 한해선 남들보다는 기준이 조금 엄격한 탓도 있을 듯하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국식 한자를 재미있게 가르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본식 한자를 원리까지 따져가며 가르치는 선생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선배로부터 시사일본어학원에 정말 기가 막힌 전설의 일본어한자 선생님이 있었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벌써 오래 전 이야기인 듯했다. 

 



사실, 일본어에는 진짜 고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언어도 깊이 들어가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일본어는 한자가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아마도 일본어를 잘한다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 자기가 하는 말의 대부분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듯싶다. 그러니까 한자로 적을 수 있는 부분을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이름있는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유명강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의 한자 정도만 알 뿐, 범위 외의 한자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 보거나 헷갈려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절대 그 분들이 실력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평소에 한자를 쓰지 않기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잊어 먹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에서는 일상적으로 글을 적을 때 히라가나, 가타가나, 한자를 같이 사용한다. 한자로 적어야 하는 부분을 히라가나나 가타나나로 적으면 아직 어린이거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다 큰 어른이 직장생활에서 쓰는 서류에 학교를 '学校'라고 적지 않고 'がっこう'라고 적으면 교육수준을 의심받는다는 뜻이다.

 


내가 대한민국 최고수다?

 

[한자 본좌, 공자님. 참고로 세계에서 제일 큰 공자 동상은 일본에 있다. 직접 보면 그렇게 크진 않지만.]



그러던 중 우연히 한 학원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굉장히 자신만만한 글을 보았다. 한국어 한자 1급은 물론, 일본어 한자 1급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로컬 가이드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한국에서 한자 1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꽤 보았지만 일본어 한자 1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어 한자 1급은 우리나라 한자 1급의 곱절은 되는 양을 요구한다.

 

물론 한국에서 실시하는 한자 1급도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지만 평소에 한자를 쓰고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의 한자 1급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보니 일본 내에서의 합격률도 8%가 될까 말까한 수준 아닌가. 그런데 1급이라고? 그것도 한국인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선생이 직접 만든 한자 교재. B4용지에 깨알같이 한자를 적어 놓았다. 이런 종이가 수백장에 달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로컬가이드 자격증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을 안내하기 위한 관광가이드 시험이 있듯 일본에서도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가이드 시험이 있다. 그게 바로 로컬가이드 시험이다. 지금은 난이도도 많이 낮아지고 한국사람들이 워낙 공부를 열심히 하는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가 나오고 있다.(일본의 주요 관광객 타깃이 한국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자격증을 딴 것은 94년도였다.

 

대학시절에 까마득히 윗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90년대 초반의 로컬가이드 시험은 거의 고시와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야후재팬을 통해 검색해 보니 당시 일본인의 합격률은 일본어 한자 1급보다 더 낮은 7% 수준. 그런데 이 사람은 그때 자격증을 땄다고 주장한다. 일본인도 어렵다는 그 시험을 한국인이? 교포인가? 아니 교포라고 해 봤자 이 시험은 별 메리트가 없는데.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가 적어 놓은 글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일본어 한자에 대해서는 국내에 자신을 당할 자가 없다고 자신하는 것 아닌가.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스스로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정말 최고가 과연 몇 명이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고수를 자처하는 그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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