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8. 24. 금요일

취재팀장 죽지 않는 돌고래

 

 

 

 

2007년 7월 9일, 안양환전소에서 여직원을 살해하고 필리핀으로 도피, 현지에서 수 년 째 한국인 관광객을 납치해 금품을 강탈한 최세용 일당. 지금도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라 정확한 납치 피해자의 수는 집계가 불가능하다.

 

납치단은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마약, 탈옥, 납치 등의 혐의를 받고 있으며 인터폴 적색 수배령(수배 중 가장 높은 단계)이 내려진 상태다.

 

일당 중 몇몇이 필리핀 세부 교도소, 수원 구치소, 부산 교도소 등에 수감되어 있지만 납치단 서열 1, 2위로 알려진 최세용과 김종석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

 

 

2010년 8월 30일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윤철완 씨, 2011년 9월 19일에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석동 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검거된 이들은 납치 실종자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딴지일보는 지난 7개월 간 납치 미신고자를 포함, 피해자들과의 인터뷰와 현지 교민들의 제보를 기초로 이들을 추적했고 납치단이 딴지일보의 기사를 읽고 있는 것을 확신했다.

 

2012년 6월 21일 아침, 납치단 내 서열 2위인 살인 용의자 김종석은 주요정보를 가진 제보자로 위장, 사건 담당기자인 본인과 연결을 시도한 후 곧 정체를 드러낸다.

 

이틀에 걸친 통화 중, 김종석은 납치 실종자와 리더 최세용의 정보를 대가로 천만원을 요구한다. 경찰 측 사건 담당 팀장은 본인이 직접 필리핀으로 건너가 돈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유도하라고 했으나 이 방법은 김종석에게 통하지 않았다.

 

 

 

김종석이 정부기관을 끼지 말고 1:1로 협상을 하자고 한다. 정보를 주는 대가로 요구한 액수는 1000만원에서 70만원까지 내려갔다.

 

그가 자신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딴지일보에 접촉을 시도한 것은 경제적- 심리적 압박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시간 통화해도 경찰이 추적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내포하고 있다. 본지로 직접 전화를 걸지 않고 본지 기자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 본인을 바꿔 달라고 한 것은 협박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김종석이 치밀하게 판을 짜거나 잔머리를 굴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김종석은 머리를 굴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리고 머리를 굴려도 금방 표가 나는 사람이다.

 

납치단 리더인 최세용이 대부분의 사건에서 설계 역할을 맡았다면 김종석은 몸으로 밀어 부치는 스타일, 내키는 대로 하는 인물. 그 때문에 최세용이 걱정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 납치단 내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 동시에 가장 조심성 없는 인물이다. 술에 진탕 취해 자신이 납치한 사람의 부친에게 돈을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자 욕지거리를 하며 싸우는 납치범이 몇명이나 될까.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납치범은 또 몇명이나 될까.

 

내게 남은 시간은 40분, 정부기관의 입장은 은행을 통해 돈을 전달하는 방식은 협상불가다. 하지만 이대로 전화를 끊으면 두 사람의 생사를 확인할 연결고리가 영원히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편집장님과 논의 후, 홍석동 씨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게는 정부기관의 의견보다 피해자 가족의 의견이 중요하다.

 

‘김종석이 석동씨의 소재지를 가르쳐 주는 대가로 70만원을 요구합니다.
다만 99% 이 돈을 받은 뒤엔 연락을 끊을 겁니다.’

 

<납치실종자 홍석동 씨의 어머니>

 

‘그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여기서 연락을 끊어버리면
김종석과 다시는 연락이 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70만원을 주면 다음에 또 돈을 얻기 위해서라도 다시 연락을 할 겁니다.
제가 기자님 계좌로 돈을 부치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이 전해진다. 약속한 PM 12:40분. 3분을 기다리다 수화기를 들었다.

 

 

 

<살인용의자 김종석>

 

돌이 본인, 김이 김종석이다. 일단 김종석에게 돈을 부친다는 의사를 전했다.

 

돌: 70만원이 사실 저한테는 큰 돈입니다.

 

홍석동 씨 부모님이 돈을 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을 추적하는 기자를 물 먹이는 게 주 목적이라면 김종석에겐 그게 나의 돈이여야 하겠지만 지금 그에겐 눈 앞의 돈이 더 급해 보인다. 표면상으로는 1:1의 교섭이기도 하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송금 건이 진행된다.

 

돌: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부칠 겁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김: 받는 거는 가까운 국민은행에 가서 전화를 주시죠.

 

돌: 잠깐 적겠습니다. 국민은행으로 가서요?

 

김: 네. MA. 이름, 받는 사람 이름입니다.

 

돌: 받는 사람 이름. 예.

 

김: MA.

 

돌: MA.

 

김: MA 한 칸 띄우고.

 

돌: 한 칸 띄우고.

 

김: M, 아, A.

 

돌: 예? MA 한 칸 띄우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김: ANG.

 

돌: ANG.

 

김: E.

 

돌: T.

 

김: E, E.

 

돌: 아, E.

 

김: D가 아니고 E입니다.

 

돌: 네. ANGE.

 

김: ANGE.

 

돌: 예.

 

김: 그 다음에 LTPA.

 

돌: LTPA.

 

김: 한 칸 띄우고.

 

돌: 한 칸 띄우고.

 

김: 아, 스펠링이 하나 잘못됐다네. A N G E L I P A.

 

여자 이름이다. 김종석은 여자가 적어준 이름의 I를 T로 잘못 본 듯하다. 중간 중간 주위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김종석이 계속해서 스펠링을 부르면 내가 그걸 확인하는 작업이 계속된다. 그리고 그가 불러 준 이름을 모두 받아 적는다.

 

김: 예. 일단 함 불러 보실랍니까.

 

돌: M A 한 칸 띄우고 A N G E L I P A 한 칸 띄우고 M 한 칸 띄우고 P A N I L A G

 

김: 맞습니다. 국민은행 가서 필리핀으로 송금한다고 하면 될 건데 송금하고 나면은 부치는 성함을 알려주셔야 됩니다. 영어로.

 

돌: 성함을 뭐, 이거를 말씀드리면 됩니까? 방금 말씀해 주신 거를.

 

김: 아니, 그니까 받는 사람 이름이고.

 

돌: 예.

 

김: 보내는 사람 이름이 있어야 됩니다.

 

돌: 제 이름을 말씀드리면 되네요?

 

김: 예, 그리고 거기 보면 PIN 넘버 열 자리 숫자가 있습니다. 비밀번호.

 

돌: PIN 넘버라는 걸 말해야 되는군요?

 

김: 예. 제가 알아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거를 송금하시고 저한테 알려주시면, 제가 사람을 시켜서 찾고, 제가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돌: 알겠습니다.

 

김: 그래 하면 되겠습니다.

 

돌: 제가 친구한테 돈을 빌릴 시간 정도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김: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 안에 국민은행에 갈 수 있습니까?

 

돌: 두 시간 반 안에 해보겠습니다.

 

김: 두 시간으로 하죠.

 

돌: 알겠습니다. 두 시간으로 하죠.

 

김: 네네. 앞으로 두 시간 정도 후에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돌: 그러면 두 시간 후니까, 지금이 12시 50분, 2시 50분 안쪽으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김: 알겠습니다.

 

돌: 남자 대 남자로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 네. 사기꾼 아니랬습니다.

 

돌: 저도 사기꾼 아닙니다.

 

김: 예. 알겠습니다.

 

돌: 연락드리겠습니다.

 

김: 예.

 

 

 

편집장님과 함께 근처의 국민은행으로 향했다. 몇 가지 절차를 거친 후, 돈이 송금된다.

 

<교섭에 사용된 국민-웨스턴 유니언 특급송금 신청서>

 

보낸 돈은 미화로 600달러, 수수료는 32달러다. 수취인 M A _A N G E L I P A_M_P A N I L A G, 그녀는 누굴까. 김종석의 현지처인 마델의 지인? 아니면 김종석이 따로 섭외한 제 3의 인물?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2011년 11월, 김종석이 홍석동 씨 모친에게 전화했을 때 불러 준 이름은 CAROL_L_PINEDA다. 분명 이름이 다르다.

 

PM 2:46분. 김종석이 가르쳐 준 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받지 않는다. 몇 분 간격으로 계속 전화를 했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다. 있을 지도 모를 추적에 대비하는 것일까.

 

하지만 받아야 한다. 받을 수 밖에 없다. 김종석은 내 이름의 영문 스펠링을 알고 있지만 그 이름으로는 돈을 받을 수 없다.

 

송금인을 편집장님으로 했기 때문이다. PM 3:01분이 되서야 김종석이 전화를 받는다.

 

돌: 제가 형한테 돈을 빌려서 돈을 넣었거든요.

 

김용석 편집장님은 이 순간 나의 형이 된다.

 

돌: 돈 넣고 왔어요. 그냥 뭐, 거기서 찾으시면 되는 건가요? 그러면?

 

김: 아니 그쪽에서, 그거 뭡니까, 부친 사람 성함을 영문으로 불러주시고.

 

돌: 아, 예. 그럼 제가 지금 불러드리면 되나요?

 

김: 예예. 불러주십시오.

 

편집장님의 영문 이름을 불러 준다.

 

김: 예예. 그라면 그쪽에 그거 몇 불입니까? 달러로?

 

돌: 70만원 하니까 590불 나오길래, 그냥 맞춰서 600불 보냈습니다.

 

김: 그라면 그쪽에 그거 남바가 있죠, 열 자리.

 

돌: 예?

 

김: 비밀번호가 있을텐데 열 자리 숫자, 아라비아 숫자 같은 거.

 

돌: 제가 잘 안 들리는데 크게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 거기에 PIN 넘버 열 자리 숫자가 있거든요.

 

돌: 은행에서는 뭐 그런 거 안 가르쳐 주던데요.

 

PIN 번호가 아니라 MTCN번호다.

 

김: 그 쪽지에 보면 있습니다.

 

돌: 아, 잠깐만요.

 

김: 구석에 보면은 넘버가.

 

돌: PIN 번호라고 적혀있습니까?

 

김: 예예예.

 

다급해진 김종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단돈 10만원이 급한 처지라는 확신이 든다.

 

돌: 아, 혹시 MTCN 번호 이겁니까?

 

김: 그래 갖고, 그 아라비아 숫자가 조금 두껍죠?

 

돌: 아, 뭐, MTCN 번호라고 길게 있네요. 이거 불러드리면 됩니까?

 

김: 네. 함 불러보세요. 열 자리 숫자일 겁니다. 아마.

 

나는 김종석에게 숫자를 확인시켜 준 후, 굳이 확인할 필요 없는 사실들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무언가 본능적으로 시간을 끌게 된다. 한 통, 한 통의 전화가 끊어지면 언제 다시 대화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궁금하다. 김종석은 돈을 찾는 사람을 지켜보며 통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전화기를 이용해 연락을 주고 받으며 나랑 통화하는 것일까.

 

김: 확인하고 20분 후에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돌: 제가 연락을 드릴까요, 아니면 이 번호로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김: 아, 뭐, 연락을 주시면 좋죠.

 

돌: 그러면 20분 후에 정확하게 연락 드리겠습니다.

 

김: 예. 알겠습니다.

 

끝났다. 아니, 끝났다고 생각한다. 김종석이 20분 후에 전화를 받을 리 없다. 첫 번째 통화와 달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다급해진 목소리는 그가 말한대로 ‘남자 대 남자’로 약속을 지킬 사람도, ‘총대를 메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돈이 필요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이왕 부친 돈, 또 카지노 가서 돈 쓰지 말고
당신 애들 과자나 사줘라.
애들이 무슨 죄냐.’

 

 

 

편집부 전원 대기. 사무실 문 봉쇄. 소음을 줄이기 위해 에어컨 오프. PM 3:28분, 만에 하나라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김종석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편집장님이 헛웃음을 짓는다.

 

<전화 통화를 한 장소, 딴지일보 편집부>

 

그런데 이상하다. 전화가 꺼진 상태가 아니라 통화 중이다. 1분 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탁’

어, 받는다.

 

돌: 약속 지킨 거 확인하셨습니까?

 

김: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거든요. 갔으니까, 죄송하지만, 그 뭡니까.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린다. 돈을 뽑지 못한 것일까.

 

김: 어... 한 20분만 더 기다려 주실래요?

 

돌: 20분이요? 그러면 제가 20분 안에, 20분 뒤에 제가 전화를 드리면 되는 겁니까?

 

김: 예. 20분 안에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돌: 확인하시면, 제가 정말, 남자 대 남자로 약속 지킨 거,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제, 김종석과의 교섭에 대비해 지금까지 만난 피해자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김종석이 좋아할 만한 표현들을 캐취했다. 그가 좋아한다는 ‘남자 대 남자’. 이 표현, 전화 도중 20번도 넘게 쓴 거 같다. 효과는 없어 보인다.

 

김: 예. 알겠습니다.

 

돌: 예. 20분 뒤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김: 예.

 

 

 

PM 3:46분. 김종석이 바로 전화를 받는다.

김종석이 돈을 챙기고 충분히 달아났을 상황. 전화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계속 받으니, 오히려 이쪽이 이상하다.

 

김: 여보세요.

 

돌: 김종석 선생님 맞습니까?

 

김: 네네.

 

돌: 딴지일보 김창규 기자입니다.

 

김: 예. 지금 그쪽에 갔던 사람이 왔는데.

 

돌: 예.

 

김: 선생님이 지금 보낸 이름을 잘못 적어 가지고, 지금 이게 안 되고 있습니다.

 

돌: 제가 정확하게 불러드렸는데요.

 

실질적인 교섭을 시작하기 전, 김종석은 ‘외교통상부와 의논해 보라’고 말했고 나는 ‘경찰이 아닌 일반인이 교섭을 한 사례가 없기에 납치범과의 통화 메뉴얼은 없고 필리핀 전화는 추적이 불가능하다라’는 답변을 들은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장난을 칠 리 없다. 잡을 방법이 없다는데. 나는 김종석이 불러 준 대로 정확하게 돈을 부쳤다.

 

돌: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볼게요.

 

김: 네.

 

돌: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보낸 걸로 다시 정확하게 말씀을 드릴게요.

 

김: 아니, 여보세요. 다른, 거 뭡니까, 미들네임 말고는 다 맞는데.

 

돌: 네.

 

김: 미들네임이 지금 어떻게 됐냐면.

 

돌: 네.

 

김: MA GE가 아니고 ANGE.

 

돌: 예. 미들네임이 A N G E L I P A 아닙니까?

 

김: 예예, 함 보실랍니까?

 

돌: 은행에서 그대로 복사한 자료를 보면서 제가 확인하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린다. 어디에 있을까. 마닐라, 아니, 지금은 세부겠지. 

 

김: 그대로 보냈는데 저쪽에서는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왔냐면은.

 

돌: 예.

 

김: MA GELIAP 이 이름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나는 정확한 이름으로 보냈다. 김종석은 내가 경찰과 협조하여 자신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필리핀 현지 경찰력이 그 정도였으면 잡혀도 벌써 잡혔겠지. 게다가 김종석은 세부 교도소에 검거되어 있는 김성곤과 마찬가지로 현지 경찰을 매수하여 교도소 안에서 나온 전력이 있다. 오히려 답답한 건 이쪽이다.

 

돌: 제가 은행에서 정확하게 확인을 하려고 복사를 해왔습니다. 제가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받은 문서를 그대로 보고 있는데.

 

김종석과 나는 재차 수취인의 이름을 확인한다. 일치한다.

 

돌: 제가 정확하게 서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틀릴 리가 없습니다.

 

김: 그런데 저쪽에서는 어떻게 왔냐면 MA GELIAP라고 왔는데.

 

돌: 예.

 

김: 네.

 

돌: 그렇게 해서 그쪽에서는 돈이 안 뽑아진다고 합니까?

 

김: 네. 지금 사람이 갔다가 지금 나왔거든요. 안 된다고 하는데.

 

예상 밖의 상황.

나는 정확하게 돈을 보냈고 김종석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혹시 인터폴이 중간에서 송금을 끊고 불가능하다는 김종석의 휴대폰을 추적해 현지에서 체포하는 놀라운 수사력을 보이려는 전조일까. 내가 아는 인터폴은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데. 현지 경찰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다면 인터폴은 겁날 게 없는 존재다.

 

돌: 네.

 

김: 거 지금 영수증에 보면 이름 풀네임이 AN.

 

돌: 네.

 

김: GE.

 

돌: 네

 

김: L.

 

돌: 네

 

김: IA 맞습니까? 그렇게 보냈습니까?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까?

 

돌: 정확하게 그렇게 보냈습니다.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보냈는데, 이거를 뭐 거짓말할 리 있겠습니까? 숫자 하나 가지고 장난칠 수도 없고.

 

김: 네. 그런데 저쪽에서는 지금, 웨스턴에서는 그래 안 보냈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돌: 알겠습니다. 그러면 확인하고 전화 주십시오. 이거는 서류를 정확하게 들고 있으니까.

 

김: 네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송금한 돈이 중간에 떠 있다. 서류를 유심히 봐도 나는 정확하게 이름을 적었다. 혹시나 외국환 계산서를 유심히 확인했다.

 

 

아, 소리가 절로 난다.

내가 적은 이름은 MA ANGELIPA M PANILAG. 서류에도 그렇게 복사되어 있다. 그런데 외국환 계산서에는 수취인명이 MA NAGELIAP M PANILAG로 되어있다. 안젤리파가 아닌, 나젤리압이 된 것이다. 김종석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 밖의 일, 은행원이 서류에 있는 이름을 입력하면서 실수를 했다. 그것도 두번이나.

이 중요한 때, 어쩌면 단 한번의 기회가 될 지도 모를 이 때에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내가 납치범이라고 해도 일부러 이름을 잘못 적어 보낸 후에 시간을 끌면서 자신을 잡으려고 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시 전화를 건다.

받을까?

납치단 리더인 최세용 같았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해 벌써 자취를 감췄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이렇게 전화를 하지도 않았겠지만.

김종석, 또 전화를 받는다.

 

돌: 거기 은행이 몇 시까지 돈 뽑는 게 가능합니까?
 

김종석 잠시, 침묵. 침묵 속에 의심이 묻어난다.

 

김: 왜 그러십니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돌: 은행에 가서 뭐가 잘못됐는지 확인하려고 가보려 합니다. 지금.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나 또한 미치겠다.

 

김: 네, 저, 송구하지만은 가셔가지고 저한테 연락을 다시 한 번 주십시오.

 

돌: 예. 알겠습니다.

 

김: 네.

돌: 저도 오늘 안으로 돈이 전달돼서, 빨리 듣고 싶거든요.

 

진심이다. 백만분의 일의 확률을 믿고 싶다.

 

김: 네네네.

 

역시나 믿지 않는 것 같다.

 

돌: 제가 바로 은행에 가서 확인을 할 테니까. 하여튼 바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은행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납치실종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납치범과 교섭 중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급한 일이라 빨리 처리해 달라고 했다.

은행 측에서 파악을 해보겠다고 말한 후, 곧, 다시 전화를 준다. 죄송하다며 이름을 수정해서 다시 돈을 부친다고 한다.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1시간 이상 걸린단다. 나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며 은행 측의 실수니 그만큼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은행 측은 잠시 후 다시 전화를 주었고 웨스턴 유니온 본사에 직접 연락해 5분 안에 일을 처리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제대로 이름을 고친 것을 확인하는 팩스 한장을 보내 주었다.

 

 

김종석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돌: 은행에 전화를 해서 확인했는데, 5분 후에 돈 뽑는 게 가능하답니다. 은행 측의 뭐 실수나 문제였던 것 같은데.

 

김: 네?

 

돌: 은행 측의 실수나 문제였던 것 같은데, 5분 후에 바로 가능하답니다.

 

김: 어떻게, 그 처음 불러준 이름으로 지금 좀 보내주세요.

 

돌: 바로 가능하답니다. 급한 일이라고 빨리 처리해 달라고 말을 했고. 은행에 전화하고 바로 전화 드린 겁니다.

 

김: 아... ... 선생님. 뭐 이거 장난치고 이런 거 아니죠?

 

의심하는 뉘앙스가 역력하다. 내가 납치범이라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전화를 받으면서 돈을 받으려는 김종석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을 가지러 간 사람이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자신은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걸까.

 

돌: 지금 장난치는 걸로 보이십니까, 제가? 허-.

 

상황이 너무 말이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김종석은 나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할까. 

 

김: 거 영수증에 보면 받는 사람 이름이 정확하게 나와 있는데...

 

설마 이런 상황에서 은행원이 실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반전이다. 김종석은 영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이야기한다.

 

김: 어떻게, 그게 프린트가 되어가지고 나오는 건데, 어떻게, 거, 참, 그게 성이, 미들네임이 다를 수가 있는데, 그게 조금... 좀 의문스럽고.

 

돌: 못 믿으시면, 제가 적었던 서류랑 프린트랑 같이 해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김: 허허허-.

 

그래, 나라도 못 믿겠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와 통화하길래 이런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일까.

 

돌: 못 믿겠다면 국민은행에 전화해서 이 번호로 전화를 한 뒤에 사과드리라고 하겠습니다.

 

김: 지금, 거 뭡니까, 처음 불러준 이름으로 바꿔준다 합니까?

 

돌: 이거는 급한 일이라고 하니까 은행이 지금 본사에 연락해서 처리한답니다.

 

김: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오면(돈을 찾는 사람으로 부터)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돌: 저도 거짓말 치고 장난치고 이런 거 싫어합니다.

 

김: 네. 알겠습니다.

 

일이 꼬이려니 이렇게 꼬일 수도 있다. 이 돈은 훗날 김종석에게 다시 연락을 받기 위한 종자돈이다. 한번은 버리는 카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버리면 김종석은 날 강하게 의심할 것이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김종석에게 전화하기 전,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일단 은행에 전화했다.

 

‘혹시 수취인이 돈을 받으면 그걸 제 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네, 가능합니다.’

 

돈이 나갔으면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고 돈이 나가지 않았으면 전화를 받을 것이다. 나는 재차 은행에 전화를 했다.

 

‘기재된 수취인이 돈을 받았습니다’

 

PM 4:30. 잠시 기다린 후, 김종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목적을 이뤘으니 전화를 받지 않아야 되는데 또 전화를 받는다. 마음 속에서, 어쩌면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돌: 그 돈, 찾으셨습니까?

 

김: 지금, 뭐라고, 들어가 가지고 지금 찾고 있다는데, 뭐 찾아 가지고 나오면은 제가 연락을 드리도록 할 건데.

 

거짓말, 이미 돈은 찾은 상태다. 김종석의 목소리에서도 느껴진다.

 

김 : 아니면은, 제가 생각했을 적에 무슨 이거 은행에 전산 상의 문제가 아니고.

 

돌: 예.

 

김: 은행 전산 상의 장난, 그런 거 같은데, 그 부분은 내가 신경 안 쓸랍니다.

 

이미 목적을 이뤘으니 통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김종석은 안전한 곳에 있고 수취인은 이미 돈을 찾아 김종석을 만나러 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만났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돌: 저 장난 안칩니다.

 

김: 네. 약속 지킬 부분은 약속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머스마로 약속했고, 이라니까.

 

머스마로 약속.

 

김: 돈을 오늘 못 찾으면 월요일 날 찾아야 되거든요.

 

이미 찾았는데 뭘 또 찾는단 말인가.

 

김: 그라니까 뭐 우쨌든, 아, 내일 찾을 수 있겠구나. 토요일 이쪽에는 휴일이 아니니까.

 

돈을 찾지 못해 다급했던 아까와는 달리 말투에 여유가 넘친다. 이런 거짓말을 듣고 있으니 혹시나 하고 믿었던 백만 분의 일의 확률은 저 멀리 사라진다.

 

김: 그러면은 저 여... 찾아서 다시 갔으니까네, 보고, 저도 약속 지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정확하게 10시 돼서 전화 주시겠습니까?

 

돌: 10시에, 믿고, 전화 하겠습니다.

 

김: 네. 10시에 전화 주십시오. 어차피 오늘 못 찾으면 내일 찾아야 되는 거니까.

 

돌: 네.

 

김: 찾았다면은, 제가 찾았다고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돌: 알겠습니다.

 

김: 예. 그리고 내가 그 부분에 두 개의 정보를 준다고 했는데 그 부분은 내일 10시에.

 

돌: 10시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김: 네. 알겠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돌: 네.

 

 

 

<필리핀 교도소 수감 당시의 김종석>

 

김종석으로 부터 전화는 오지 않았고 다음날 10시에도 역시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따금 그가 남긴 번호로 전화를 걸지만 전화기는 언제나 꺼져있다. 이미 심카드를 교체했을 것이다.

 

하지만 믿고 싶다.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회사 컴퓨터를 키면 언제나 바탕화면에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던 당신을.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에게 남아 있을 인간성을.

 

통화에서 직접 말한 것처럼 나는 당신이 밉다. 좋을 리 없다. 피해자를 만나고 피해자 가족을 만나고, 그 눈물과, 그 목소리를, 두 눈과, 두 귀로 확인하고 있는데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예전된 것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약속도 어겼다. 물론 나도 경찰, 인터폴, 대사관에 연락했다. 당신이 상의해 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이 있다. 검거된 납치단원들 조차 가장 잔인하다며 비난하는 인물.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세상 그 누구에게도 따뜻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인물.

 

사건을 담당한 지난 7개월 간,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에 대해 열심히 공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가족관계, 전과, 자식들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문신의 위치, 좋아하는 음식, 자주가는 식당, 버릇, 필리핀에서 출입한 가라오케, 성관계를 한 여자 등,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역시나 인간은 공부한다고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이틀에 걸쳐 당신과 전화하는 동안 내게는 그 전에는 없었던 의문들이 생겨났다. 김종석, 당신은 왜 그렇게 살아야하나.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나, 라고.

 

납치단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당신만큼은 언젠가 전화를 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내게 다시 전화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서로 눈을 마주 볼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검거된 당신의 옛 동료들이, 지금은 당신을 팔아 형량을 줄이려는 옛 동료들이 납치 실종자들의 생사를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한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이전까지는 당신이 잡히면 리더인 최세용에게 책임을 전가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옛 동료들 처럼.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로 이상하게도, 이제는 조금 다르다. 당신은 준비가 되면, 말할 수 있는 남자로 보인다. 지면 상으로 이 기사를 읽는 사람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납치단인 주제에 더럽게 조심성 없고 더럽게 멋대로이고 더럽게 겁이 없기에, 거꾸로 당신의 입버릇처럼 진짜 ‘머스마’의 모습을 보여줄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에 확신은 없다.

 

전화를 하는 어떤 순간에, 나는 당신이 정말 납치 실종자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거라 믿고 싶고, 언젠가 술에 진탕 취해 비틀 거리다 나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다라고 한 번쯤은 고민했을 거라 믿고 싶다.

 

이와는 별개로 당신이 약속을 깼기에 나도 약속을 깨고 녹취를 공개한다. 전화로 말한 것처럼 지금은 서로가 처한 입장이 많이 다르니까.

 

<당시 김종석과 본인의 통화 내용 일부>

 

만약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면 8월 30일 안으로, 늦으면 9월 19일 안으로는 꼭 통화를 했으면 한다. 8월 30일은 윤철완 씨가 납치된 지 2년, 19일은 홍석동 씨가 납치된 지 1년 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대화 도중, 피해자 가족에게 했던 미안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라는 생각도 든다.

 

필리핀으로 오라면 가겠다. 이제 서로 위치도 파악된 상황이니. 그때가 오면 당신의 안전은 당신이 알아서 확보해라. 나의 안전은 내가 알아서 확보하겠다.

 

마지막으로 다음 기사에서는 당신이 꼭 만나고 싶어했을 어떤 한 사람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 사람은 아직도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고 당신이 정말로 모든 것을 풀고 새롭게 시작하길 바라는 한 사람이다. 물론 당신은 누구인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면 안되는 사람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 또한 사실이니까. 그 정도 각오를 하고, 그 사람은, 당신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그 사람은 정말로 많은 걸 걸었다. 

 

 

다음 기사에서 그의 얼굴과 실명이 공개될 것이고 증인으로 재판장에 설 예정이다. 그가 동의했다. 

 

여건이 된다면 일요일에 메일을 확인해 보길 바란다. 답장이 오면 당신 가족에게 내 연락처를 남길 테니 지금 알고 있는 기자의 번호로 연락해서 바꿔달라고 하지 말기 바란다. 어떻게 알아냈는진 모르겠지만.

 

김종석, 기다린다.

 

 

추신 : 김종석과 통화한 시간대는 다소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녹취
이동현(@Leetreeart)

기사
죽지 않는 돌고래(@kimchangk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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