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실에 있던 두개의 상 중, 커다란 상을 하나 치우니 무척 기분이 좋다. 나는 휑한 공간을 좋아한다. 없어야 한다. 지금껏 없어야 될 게 있었으니 답답했던 것이다. 내가 어떤 공간에서 사는 게 행복한지 알면서도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미루어 왔다. 무언가를 주면 꼭꼭 챙겨두고 비싼 물건을 받으면 아깝다고 쌓아두다 보니, 행복이 편함에 밀린 것이다. 편함과 행복을 맞바꾸어 온 것이다.
겨우 이것을 다시 깨달았다.
2.
거실을 정리하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 문득 만화책 한권을 짚었는데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 12권'이다. 사토시형에게 부탁해 일본에서 공수해 온 만화책인데 초등학교 때 깊이 감명을 받았던 책이다. 몇장을 넘기다가 불현듯 내가 원하던 삶이 생각났다. 고요함, 평안함, 행복, 부동심, 원수조차 미워하지 않음,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군대 고참이 GOP초소에서 내게 건넸던 질문이 생각났다. 넌 어떻게 살고 싶냐. 나는
'칭찬도 비난도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도 미움받지도 않고. 유명해지지도 인기를 얻지도 않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충만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아마 상황이 달라진 탓일 테지만 내 일생 동안 가장 일관적으로 원했던 것은 여유와 고요, 스스로 충만함이었다. 군대에서 몸은 힘들었지만 근무를 끝마치고 돌아와 자리에 몸을 뉘여 스스로의 질문에 답하며 계속해서 생각을 더해가는 과정은 인생에 다시 없는 행복이었다. 잊고 있었다. 어느새 세상의 틀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원하는 욕망을 쫒아가다 자신을 잃을 뻔한 순간에 다행히 멈춰설 수 있었다.
3.
쇼후쿠테이 츠루베. '디어 닥터'의 주인공이다. 이 영화평을 적었더니 사토시형이 주연배우의 원래 직업이 라쿠고가라고 해서 찾아보았다. 라쿠고가는 쉽게 말해 말의 예술가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일본 드라마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타이가 앤 도라곤'인데 여기서도 이 주인공이 등장한다.
일본에서 라쿠고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왜 한국에는 이 직업이 없을까 아쉬워 했다. 이건 굉장히 웃긴 이야기이기도 한데 어느 순간 부턴가 말을 잘하는 자신이 경멸스럽다고 느껴져 말을 서투르게 하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말을 못하게 되었다. 말을 잘하는 것이 칭찬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이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라쿠고가야 말로 나의 천성이라 생각했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방석 위에 앉아 조용히, 그리고 때로는 호쾌하게, 경망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거만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즐겁고 편안한 웃음을 줄 수 있는 라쿠고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오래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방안에 홀로 앉아 3,4시간 아무 이야기나 떠들어도 막힘이 없었고 초등학교 때는 레고를 들고가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에게 공연을 해주었는데 꽤 인기가 좋았다. 재능도 쓰지 않으면 잃어 버리는 듯한데 예전에는 - 어쩌면 조금 미친사람 같을 수도 있지만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 주제나 잡고 이야기를 하다 시계를 보면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는데(대부분 헛소리지만)지금 해보면 5분을 넘기기 힘들 듯하다. 그래도 그때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나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드문 드문 드는 생각의 파편들은 여유와 고요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또한 적당한 고통이 있기에 가능하다. 자신의 행복을 찾는데 게으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며 스스로가 고요해질 수 있는 시간을 잃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러지 않고 살아보니 도대체 왜 사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나는 이 기분이 매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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