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가 태어났다. 나의 자식이다. 물론 아내의 자식이기도 하다(함께 출산했으므로 어디서 주워오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주워오지 않았습니다

더글라스 애덤스 생일에 태어나라고 몇 번 말해두었는데(참고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입니다) 과연 자식은 부모 말을 듣지 않는다. 하긴 부모 말 잘 듣는 아이 치고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없는 법이니.

현재로선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쁘다'는 가설을 증명했다. 아내와의 크로스체크를 통해서도 재확인한 사실이다. 

 

2.

출산을 했다고 SNS에 알리니 사람들이 따봉을 준다. 그런 거 말고 부동산이나 비행기 같은 걸 사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현대사회의 병폐는 나 홀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임신 중, 나와 아내가 경험한 바를 조금 적어둔다.

아, 기억력이 온전치 않으므로(아이를 낳으면 아내의 기억력은 2배, 남편의 기억력은 1.5배 떨어집니다. 잠을 못 자니까요) 별 기대는 하지마시고.

 

3. 입덧과 역류

아내는 입덧을 2달 했는데 사람에 따라 10달 내내 하기도 한다. 이 시기는 뱃멀미를 계속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나의 경우, 어린 시절을 캄보디아에서 보냈는데 배를 타고 등교했다. 여차하면 멀미와 함께 위장의 분노, 즉, 역류를 경험한다. 경험상, 뱃멀미가 길어지면 만사가 잣 같다(잣에겐 미안하지만 잣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니 뭐).

지구를 부수고 싶기도 하고 후각을 없애고 싶기도 하고(만물의 냄새가 잣 같으므로. 잣한테는 계속 미안합니다) 몸 안의 장기는 가능한 모두 팔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배로 등교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그전에 캄보디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도 거짓말이지만) 임신으로 인한 입덧과 역류를 지켜보면 이런 느낌이 분명하다. 

입덧은 임신할 경우, 식습관에 주의할 수 있도록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종의 신호라 배웠다. 현재 인류와는 상관없는 미래이니 어떻게 돼도 상관은 없지만 호모 사피엔스 멸종 후에는 적어도 좀 더 좋은 느낌으로 진화했으면 한다. 

신호를 꼭 이딴 식으로 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4. 외식, 정밀히 하면 외식 이후 

입덧이 지나간 후, 아내와 먹고 싶은 건 모조리 먹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당분간 외식은 불가능하므로 내일 지구가 사라지는 사람처럼 맛있는 걸 먹어둬야 한다, 에 둘의 의견이 일치했고 정말 그리 했다.

외식을 자주 할 경우, 그러니까 아내가 임신한 김에, 이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외식하면 한 번에 교통비+식비로 작게는 2만 원, 많게는 10만 원이 나간다. 아내가 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나는 걱정하지 않는 타입으로 지금이다, 하고 맛집 탐방은 지속된다. 이런 짓을 몇 달하면 망한다.

그래서 망했다.

......

......

어떻게 복구했는지는 프라이버시니 내버려두고(로또는 해보았으나 되지 않았음) 여하튼 주의해야 할 점이다.

참고로 인간은 돈이 없으면 꽤나 힘들다.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5. 일 스트레스

아내가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태교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남편 입장에선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게 태교라는 판단이다. 해서, 그만두자 했다. 왜, 내가 버니까. 

일을 그만두니 아내가 행복하다. 여행도 갔다(외국 여행의 경우, 임신 4,5개월째가 좋다 하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좋은 곳이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면 세상도 이래저래 좋아 보이는 법인가 보다.

아내가 임신했다->아내가 일 때문에 스트레스다->그러니 일을 그만둔다->아내도 행복하고 나랑 놀 시간도 많다->막 여행도 다니고 한껏 즐긴다->우왕!, 이라는 결과는 확실히, 온다. 아내가 살면서 가장 걱정 없이 행복했다, 말할 정도였으니 내 판단력에도 문제가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몇 달 사이 돈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사소한 건 신경 안 쓰는 타입. 이미 이 때는 사소해지지 않았지만). 각자 벌어 각자 썼는데 한 명 벌어 같이 쓰면 망한다는 생각을, 아차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망했다.

......

......

어떻게 복구했는지는 프라이버시니 내버려두고(참고로 로또는 또 해보았으나 되지 않았음) 여하튼 주의해야 할 점이다.

참고로 인간은 돈이 없으면 꽤나 힘들다.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추신: 

임신 중기를 지나면 배가 제법 나오므로 자세가 불편해 잠을 자지 못한다든가,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한다든가, 틈만 나면 쥐가 난다든가, 허리가 아프다든가, 어깨가 결린다든가, 임산부 석에 앉아 있는 미친 녀석(평소에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 부끄럽다, 라는 느낌이지만 이때가 되면 저기 봐!, 미친 녀석이다!, 라는 생각이 확실히 듭니다)이 있다든가, 하는 등등의 힘든 점이 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열거했다간 1년쯤 걸리므로 다 적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건 뭐, 다른 데서 잘 정리해 놓았겠지요. 

20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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