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흔히 인간 사회에서 왕을 정하는 법은 두 가지다. 돈이 많거나, 고생이 많거나.

친구 사이에선 돈이 많으면 왕이 된다. 친구가 스시를 산다, 그러면 누구나 구두를 10번쯤 핥은 경험이 있을 게다. 다만 이러한 룰은 조직마다 다르다. 나의 가정에선 ‘더 고생하는 자’가 왕이 된다. 

의제(agenda) 결정권을 가진다는 말이다. 

 

2. 그래도 걱정은 된다

화장실 청소 방법에선, 내가 의제 결정권을 행사하지만 출산과 임신이라는 카테고리에선 아무래도 아내가 이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만, 임신이나 출산만큼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해서 아내가 공부 끝에  ‘조산원에서 수중분만으로 간다’라고 해 의제가 결정되자마자 대략 결론까지 나버렸다(왕이 된 자의 무서움은 의제 결정권을 가지는 동시에 결론권도 가진다는 것이지요). 

처음 아내의 의견을 들었을 때는 내심 으음, 했다. 필진들에게 의견을 듣곤 하는데 자연주의 출산을 한 필진 보다 산부인과 의사 필진이랑 더 친했기 때문이다.

나로선 더 친한 사람 말이 잘 들리는 호모 사피엔스 종이므로(스시를 사주면 조금 달라지긴 합니다만) 자연주의 출산을 한 필진의 ‘매우 훌륭한 경험이고 요즘은 병원이랑 다 연계되어 있어 걱정 없다’는 말보다 산부인과 의사 필진의 ‘감염이나 혹시 모를 위험을 생각하면 병원이 낫다(더하여 요즘 출산율 떨어져서 병실도 비는데 너까지 그러기냐, 라는 말도 하긴 함)’라는 말에 끌렸지만 뭐, 이미 결정 난 일인 걸.    

 

3. 아내는 왜 자연주의 출산을 택했는가

결정 난 일이라도 이유는 듣고 싶어 지는 법. 회사에서도 이유를 가르쳐주는 CEO와 안 가르쳐주는 CEO에 대한 신뢰도는 천지차이 아니던가(물론 서로 의견을 교환해 정하는 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정도로 훌륭한 CEO는 역사책으로만 봤습니다).

아내가 읽고 있는 책을 훔쳐본 결과, “폭력 없는 탄생(프레드릭 르봐이예 저, 예영 커뮤니케이션)”과 “황홀한 출산: 태초의 엄마들은 어떻게 아기를 낳았을까?(엘리자베스 데이비스, 데브라 파스칼리 보나로 저, 정신세계사)” 을 참고하고 있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아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자연주의 출산이 아이한테 자연스럽고 폭력적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이가 기억을 하지 못한다 해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너무 밝은 빛과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충격이자 공포 아니겠는가. 어차피 물에 있다 나오는 애니 수중분만으로 가자. 나를 기다려주고 아이를 기다려주는 출산을 하고 싶다. 의사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나와 아이가 주도권을 행사함을 선. 포. 한. 다.’

납득. 

아내는 덧붙인다. 

‘자연주의 출산은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공부도 많이 할 거고 운동도 꾸준히 할 거지만 아이가 위급할 수도 있고 내가 위급한 순간에는 포기한다. 안 됐다고 서운해하지 말자’ 

 

4. 조산원 선정의 방식

남편으로선 0.1%도 안심할 수 없으므로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으면 특수상황에 대처를 못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해서, 나 또한 공부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자연주의 출산에 대해 사람을 찾아가 교육을 받고 책을 읽고 관련 다큐를 찾아본 후, 미국 FDA 승인까지 받은 결과(물론 이건 거짓말), 아내의 의견에 최종 재청했다.

조산원 선정의 경우, 첫째, 조산원의 후기들을 선별해 추적, 신뢰성을 체크하고 장단점을 도출했으며, 둘, 집과의 거리를 고려하고(일단 내가 운전을 못하므로 <-게다가 적록색맹이라 신호등 잘 구분 못하므로 하면 안 됨), 셋,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내뿜는 우주의 기운이 신뢰할만한 지로 선정했다.

우리가 선택한 조산원의 경우, 일하는 사람이 최소 10년 이상 산부인과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요즘은 대부분 특수 상황에 대비해 병원과 연계되어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5. 정리하자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점차 자연주의 출산에 끌렸던 점은 함께 한다는 느낌이다. 고생을 완벽히 나눌 순 없으나 어느 정도 나눠야지 나중에 나에게도 의사 결정권이란 게 생기므로 권력싸움에서 질 수 없다. 에헴. 

두 번째는 호기심. 

세 번째는 나중에 하루가 컸을 때 수중분만 중의 사진을 포토샵 해서 내가 낳은 것처럼 속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같이 욕조에 들어가서 낳으니까). 뭐, 속을진 나중 문제지만 설마 내 자식이 그걸 알아챌 정도로 똑똑하진 않겠지.

... ... 

남편의 의견이란 대부분 의미가 없는 것이니 이쯤 하고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자연주의 출산의 장점은 

1) 엄마가 자신의 출산을 주도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 모든 순서가 예측 가능하다.

2) 출산 전에 조산사 그리고 둘라와 많은 이야기를 하기에 안정감이 크다. 

3) 흔히 엄마들이 말하는 3대 굴욕(관장, 제모, 회음부 절개)이 없다.  

4) 아이 입장에서 뱃속에 있다가 나올 때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단점은 

1) 모두가 다 할 수 없다. 산모와 뱃속의 아이가 사전 검사 결과 모두 건강해야 한다. 

2) 운동을 마지막까지 꾸준히 해야 한다(뭐 이건 사실 다 마찬가지지만).   

3) 운이 크다. 준비했다가 안 되면 실망감이 너무 크다. 그게 실패한 분만도 아닌데 열심히 준비한 엄마들이 가진 기대감이 너무 커 병원으로 가는 경우, 너무 아쉬워한다. 

정도랄까. 

나와 아내가 공부하며 느낀 점은 자칫 자연주의 출산만이 멋있는 출산, 가장 좋은 출산이라는 함정에 쉬이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때에 따라 의료진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 오고 그럴 가능성이 있을 때는 1%도 지체해선 안 된다.  

출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기 때문이다.

출산 분위기는 대충 이렇습니다. 하루가 태어나기 15분 전 사진이지요.

추신 1: 나는 ‘자연주의’라서 부부가 다 옷을 벗고 들어가는 줄 알았고 그럴 작정이었다. 이 말을 들은 편집부 기자들이 놀렸다. ‘주위 사람들(조산사, 둘라 등) 눈을 버릴 작정이냐’라고. 으음. 내가 생각하는 자연은 그런 것이었는데 확실히 사람마다 개념이 다른가 보다. 다들 궁금해 하지만 부끄러워 직접 물어보진 못하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 적어둔다. 남편은 수영복 바지를 입으면 됩니다(너무 당연한 건가).

추신 2: 하루가 나올 때 뒤에서 아내를 안고 있었는데(커다란 욕조 안에서 진행합니다) 특히 마지막 20분은 더럽게 아파 보인다(본인도 이때가 더럽게 아프다 했다). 

하루의 머리가 나왔을 때, 조산사가 만져보라 했지만 아내가 ‘아, 못, 후우후우, 아, 못, 아, 후우후우, 못 만지, 후우후우, 겠어요. 후우후우, 아, 아파요, 아, 아’ 했다. 아파서 ‘아이를 뽑아주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한다. 생전 처음 겪는 놀라운 고통도 신기했으나 아이가 나오자마자 고통이 완벽히 0으로 사라지는 건 더 신기하다 한다. 

뭐, 저로선 평생 알 수 없는 감정이긴 합니다만. 

201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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