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사촌형이다. 나이차는 제법 나지만 어릴 적부터 명절에 모이면 어른쪽에 낄 짬밥은 아닌지라 우리들 사이에선 제일 나이 많고 재미있는 형의 느낌이다.

 

직업은 택배기사로 특기는 자신의 삶과 가난을 이용한 개그다. 만담가의 자질로 치면 전성기가 아닌 지금도, 미증유의 천재라 생각한다.

 

2.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휴교를 하지 않는 이상(자체적으로 휴교하는 사람의 예:나), 어릴 적에 초등학교, 중학교 등등으로 불리는 곳을 다니기 마련인데 흔히 전교에 한 명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수준의 괴짜가 있다.

 

괴짜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류는 4,5자리 이상의 곱셈을 계산기보다 빨리 암산한다거나, A4 한 장을 읽고 그자리에서 외운다거나, 1, 2년 전 만난 사람의 옷이나 그때 먹은 음식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경우다.

 

그런 괴짜들을 다른 곳보다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기에 나도 제법 봤다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특별할 것 없이 비슷하게 웃고 울며, 산다. 누구에게나 과거의 영광이 있듯, 친해지면 똑같이 자랑도 좀 하고 너스레 떠는 정도에, 나이가 들면 그 능력이 퇴색한다고 말하는 느낌이 비슷하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 떠오르는 이 중 하나는 명절 때마다 보는 나의 사촌형이다.

 

3.

형은 겉보기엔 학교 공부에 재능이나 취미가 거의 없는 사람이나(느낌은 소위 말하는 일진에 더 가깝다)시험만 쳤다하면 전교 1등인 사람이었다.

 

형과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나는 언제든 맘만 먹으면 전교 1등을 할 수 있기에 안하는 스타일이고 형은 딱히 맘을 먹지 않아도 그냥 계속 전교 1등이라 하고싶지 않아도 계속 하는 점 정도 되겠다.

 

수업시간에 필기를 한 번도 한 적 없는데(학교에 필기구 안 들고 다니는 타입)어떻게 다 아냐 물으면 그냥 떠오르고 그냥 기억난다 한다.

 

공부를 잘 할 거라는 느낌이 1도 없는 사람으로 어른들이 있을 때는 무척 조용하지만 우리끼리 있을 때는 개그가 일품이라 나를 포함해 동생들이 다 좋아했다.

 

4.

이런 형의 집안, 그러니까 큰고모 집안의 가세가 그야말로 가속도로 기울어지게 되면서 형은 방황을 시작했고 아예 학교와 담을 쌓아버렸다.

 

정밀히 기억나진 않지만 힘도 세고 잘 치는 타입이라 그런 종류의 사고도 제법 친 듯하다.

 

이후에 택시기사를 잠시하다 택배기사로 안착, 1인 사업자로 자식 키우며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5.

형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머리는 유전인지 어릴 때부터 바둑으로 모든 어른을 압살하는 재능을 보였다. 바둑 대회에 나가서도 여러 상을 받았는데 딱히 그길로 나갈 생각은 없는지 관두고 여느 평범한 학생처럼 학교를 다녔다.

 

형 집안 사정도 사정인지라 태어나서 한번도 학원에 간 적도 과외를 받아본 적도 없는데 작년에 수시로 고려대에 합격했다.

 

재밌는 점은 아버지를 닮아선지 공부를 막 열심히 하는 타입도 아닌데다 애초에 합격은 따놓았다 생각하고 룰루랄라 놀다가 수능 최소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재수했다는 점이다(바보 같은 녀석!, 이라고 말해봤자 고등학교 출석을 심하게 안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6.

이따금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에서 만나면, 이 녀석은 아버지가 얼마나 전설적으로 암기력이 좋았는지(물론 지금은 책을 보자마자 외우는 묘기는 못한다. 나이가 깡패)얼마나 전설적으로 공부를 잘했는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맨날 이상한 개그만 치기 때문인 모양이다. 그럴 때 내가 말한다. 니가 머리 굴리는 쪽을 대충 다 잘하는 건 그냥 니 아버지가 너에게 물려준 유전자 풀이 좋아서 그런 거라고.

 

그러면 형이 말한다.

 

‘야 봐봐. 창규 말이 맞다니까! 이 자식은 내 아들인데 내 말을 안 믿는다니까!’

(아. 물론 대부분의 아들들은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아버지를 안 믿긴 합니다)

 

7.

요즘은 택배 일이 많아 더 고될 것이고 일을 마치고 나면 또 특유의 자학개그와, 본인의 급격한 가세 몰락으로 얻게된 전설적 가난 이야기로 개그를 치고 있을, 주위에선 아무도 믿지 않을, 왕년의 천재이자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형이, 그냥 문득 생각났다.

 

20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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