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책이란 장르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다. 허나 자식이란 요망한 녀석이 생기면 그림책을 보기 마련, 누구나 낭독 노동자가 되어 노예와 같은 중노동의 삶을 살기 마련이다.

 

2. 

인생의 3대 쾌락 중 하나는 느긋이 누워, 쿠팡보다 빠른 속도로 세상의 천재와 전문가, 성숙한 자들을 거실 소파로 불러들여 피와 뼈로 깎아 만든 생각을 헐값에 먹어치우는 양아치짓을 하는 것인데(줄여말해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는 거지요) 넨장, 이 녀석 때문에 점점 내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든다.

 

더 큰 문제는 30개월 차 아이가 볼 수 있는 책 수준이란 게 드릅게 재미없다. 헌데, 어제와 오늘, 심리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반응을 보인 그림책이 있다.

 

3.

퇴근 길에 그림책을 들고 갔다. 월천상회에서 출판한 네델란드 작가 얀 유테의 작품으로 제목은 “나의 호랑이”다.

 

 

하루는 30개월 차라 글을 모른다. 대략 본인이 좋아하는 자동차나 요리 그림이 나오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어라.

 

이 책은 진지하게, 탐독한다. 30개월 차 아이에게 진지하다, 탐독한다, 라는 표현을 써도 무리가 없는 표정이 첫 번째로 놀란 점이다.

 

4.

책에는 조세핀과 우연히 만나 즐거운 한 때를 보낸 호랑이가 향수병에 걸려, 어두컴컴한 거실에 몸을 뉘인 장면이 있다. 책을 보다 이 장면만 6번이나 다시 돌아가 호랑이가 뭐하는지 물어본다. 곧, 생각에 잠긴다.

 

나는 애가 좀 모자라 호랑이의 무늬가 옅어지고 톤이 어두워져 같은 호랑이인 줄 모르나 했다. 호랑이의 마음이 아프다 설명했는데, 30개월이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리 없다. 그럼에도 유심하고 진지하게 보는 게 두 번째 놀라운 점이다.

 

결국 나의 호랑이를 다 보더니 그 나이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호랑이 책 안 볼 거야’를 3, 4번 반복한다.

 

녀석은 창가로 가더니 제법 긴 시간 동안 무거운 표정으로 밖을 바라본다. 나는 ‘땅콩만한 녀석이 개폼 잡기는’ 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책을 보여주면서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그야말로 묘했다.

 

5.

다음날,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호랑이는? 호랑이는? 하고 묻더니 다시 “호랑이 책 안 볼 거야”, 라 말한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도 머리 속에 잊혀지지 않는구나 했다.

 

잠시 후, 아침을 먹으며 뜬금없이 “이제 호랑이랑 친해졌어” 하더니 나의 호랑이를 몇 번이나 본다. 특히 호랑이가 향수병에 걸린 장면은 몇 번이나 본다.

 

책의 후반부, 조세핀은 호랑이의 향수병을 달래주기 위해 함께 배를 타고 가 정글로 떠나보낸다. 이후,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시간을 보내다 길고양이를 다시 키우는데, 이 부분도 몇 번이나 다시 본다.

 

자식이라도 그 속엔 들어갈 순 없는 법이라 무어라 설명할 수 없으나 고양이를 다시 키우는 부분에서 마음을 회복하는 듯하다.

 

6.

나는 무딘데다 예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대부분 글에서 느낄 뿐, 그림이나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는 평균적인 감수성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후지다.

 

 

이 그림책에 무엇이 있길래 며칠동안 호랑이를 맴돌게 하는지 나로선 영영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이러다 머리가 크면 섬세한 마음을 아는 엄마만 좋아하고 무딘 아빠는 싫어, 라고 할 게 뻔하니 그때는 어릴 때부터 책으로 연마한 북두신권의 힘을 보여줄 수밖에 없겠다. 

 

2020. 0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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