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그림 - 8점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세미콜론


1.
「이 그림은 왜 비쌀까」를 읽고 '내가 원했던 내용이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그림이 있고, 글이 있고, 게다가 재밌다. 눈에 익은 명화의 등장은 눈을 더욱 즐겁게 한다. 그림을 공부하려는 이들이 처음 접하는 책으로는 추천하지 않지만 나처럼 엉성하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딱 좋은 책」이지 않나 싶다.

2.
그림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이 책은 작자의 생각이 매우 강렬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미난 자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먼저 읽어 버리면 편견이 생긴다. 작자의 포스가 너무 강렬해 독자가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상, 어떤 분야에 관한 첫 경험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오랜기간 빠져나올 수 없는 틀을 만든다. 해서 가급적 처음에는 객관적이고 널리 인정받는 책부터 읽는 게 좋다.

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나와 마찬가지로 '폭독(瀑讀)'을 즐기는 사람일 테니 그냥 떙기면 읽을 게 뻔하다. 


P.S. : 작가의 표현이 굉장히 화려하던데 번역자 분이 꽤 고생하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림을 표현해내는 다양한 표현력이 이런 책의 또다른 재미다.   





6. 무서운 그림 / 나가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하나하나는 통통한 어린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이지만 이 정도로 큰 무리가 되고 보니 무섭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뭔가가 몸 안에 굼실거리는 것 같아서 차분하지 못하고 불쾌하다. 드디어 어린 시절이 끝났다는 증거가 들이닥친 뒤에도 꽤 오랫동안 자신이 뭔가 다른 존재로 변해 버릴 것만 같은 불안을 느낀다.

 

 

추억을 가둬 준 실내의 공기는 괴어 썩어서는 벌써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딘지, 뭔가가 어긋나서 딱 끝나지 않은 사랑 같다.

 

 

아니, 오히려 가련한 것이다. 두렵지 않다는 걸 일부러 내보인다는 건 실은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시아권에서는 까치의 울음소리는 경사스럽게 들리지만 유럽에서는 귀에 거슬리는 시끄러운 소리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녀의 출렁이는 풍만한 앞가슴께로도 여지없이 피가 튄다.

 

 

그렇다면 조르조네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가 활약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늙은 여인을 그린 그림이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원래 서양에서는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동양에 비해 부정적이었다. 플라톤 같은 이는 노인의 지혜를 칭송했지만 로마의 시인들은 노인을 매도했고 중세에는 노인을 죽음과 거의 마찬가지인 존재로 여기고 꺼렸다. 늙은 남자는 무가치하고 늙은 여자는 마녀라는 것이었다. 노인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절망적일 정도로 활개를 쳤다. 이 어두운 중세를 벗어나 인간성의 해방을 지향했던 빛나는 르네상스 시대(‘르네상스라는 말 자체가 재생의미 하지 않던가.)가 꽃을 피우자 세상은 노인을 어떻게 대했을까?

놀랍게도 더욱 더 멸시했다!

르네상스는 인간 찬미와 반()중세의 큰 축에 더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부흥이라는 또 하나의 축으로 이루어졌다. 애초에 고대 조각이 잇따라 발굴되었던 것이 르네상스가 꽃피는 계기가 되었기에, 고대 조각에서 보이는 완벽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육체미와 운동능력을 인간 평가의 중요한 열쇠로 삼았다. 이렇게 되면 노인이 이제까지보다 더욱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건 필연적이었다. 젊음의 아름이 각광받을수록 늙음은 조롱받고 매도되었다.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1516)에서 묘사한 이상향에서는 결혼상대를 찾을 때 마치 말을 품평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알몸을 충분히 보고 또 상대방에게 보여 준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는 늙음을 병이라 여겼다. 그는 우신예찬’(1511)에서 지옥에서 돌아온 송장 같은 노파들이 인생은 즐겁다네.’ 운운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없다. 그들은 암캐와 마찬가지로 암내를 풍기며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산양(山羊)의 악취를 풍긴다.”라며 있는 대로 험담을 퍼부었다. 또 이 무렵의 베스트셀러였던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 1458~1521)바보배’(1494)에서 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면 좋은 날이 하루를 넘지 못하네. 메마른 밭에서 결실이 나올 리 없으니 무슨 즐거운 일이 있을까.”라고 했고, 프랑스 시인 뒤 벨레(Du Bellay, 1525~1560)의 시편 올리브’(1549)에서는 오오 노파여, 더러운 노파, 폭삭 늙어 빠진 이 세상의 수치여. 하지만 눈을 돌려 이제 막 열 다섯 살 된 처녀를 쳐다보면 그만 기분이 좋아진다네.”라고 늙은 여성을 젊은 여성과 비교하면서 모욕했다.

 젊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자면 뭐니 뭐니 해도 늙음의 참혹함과 나란히 놓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 없다. 더구나 미녀의 나신(裸身)이 여신처럼 숭배되는 터인지라, 늙은 여인의 그것은 당연히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세상의 수치라지 않는가. 이렇게 추한 노파는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테마의 하나가 되어 갔다. 이런 판에는 젊다고 다 아름다울 리도 없고 늙었다는 것만으로 추할 리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은 무시되었다. 성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성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파라는 말은 모순인 것이다.

 

 

한쪽을 높이기 위해 다른 한쪽을 지나칠 정도로 깎아 내리는 것이 빈곤한 정신을 드러내는 태도임은 생각지 못했다.

 

 

광기에 사로잡히는 건 무서운 일이지만 광기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저지른 일과 맞닥뜨리는 건 한층 더 무서운 일이 아닐까. 황제의 두 눈이 그것을 여실히 말하고 있다.

 

 

오비디우스도 음탕하기 이를 데 없는 제우스가 아름다운 기니메데스를 보고 몸이 달았다고 썼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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