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 10점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최규석이 그렸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대한민국 원주민 / 최규석 / 창비

초판 1쇄 발행 2008.05.30

초판 3쇄 발행 2009.01.15

 



 
적금 다 붓고 나면 예쁜 옷 한벌 살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화장품도 손가락만한 거 말고 제대로 큰 병에 든 걸 사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 옷과 화장품뿐이겠는가.

 그것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잘라내버린 그녀의 꿈까지

 내 알량한 재주 아래 어딘가 가만히 묻혀 있을 것이다.

 

 

 엄마는 계란 볶음밥을 한가득 볶아주고는 문을 잠갔다.

 유난히 역한 냄새가 나던 그 음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울고 또 울었다.

 창호지를 뚫으면 엄마가 혼내러 돌아올 것 같았다.

 차마 발을 못 떼고 돌아온 엄마는 우는 나를 업고 생선 다라이를 이고 숱한 고갯길을 넘었다.

 특별히 슬프게 기억하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술자리에서 동년배들의 기를 죽일 수 있는 훌륭한 무용담쯤이었다.

 무슨 일인가로 이른 새벽에 일어났던 그날,

 의자에 안자 남은 잠을 쫓고 있었는데,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을까?

 갑자기 들이닥친 그 녀석 덕분에 오랜만에 잠깐 소리 내어 울었다.

 

 

 형아, 개 왜 죽이는데?

 빙시야~ 무덤 만들어줄라고 한다 아이가.

 

 

 아버지는요? 우셨어요?

 울긴 지랄로 울어? 그기 머시라꼬 울어! 또 낳으모 되지.

 아버지의 한결 같은 냉혹은 위악인지 천성인지 알 수가 없다.

 엄마는 많이 슬펐죠? 기분이 어땠어요?

 그기 언젠데……

 다른 거는 모리겄고 그리 부끄럽더라꼬. 에미가 돼서 아를 직인께 넘 보기가 부끄럽어서 사람을 못 보겄데.

 이런 걸 집요하게 캐는 나를 보면 아버지의 냉혹은 천성이다. 아버지 닮아서 이런 거다.

 

 

당연히 대학까지 마친 그들과 운 좋게 중학교에 들어간 내 누이들은 같은 세대지만 다른 시대를 살았다.

 결국 불행은 그것을 겪는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상하는 만큼의 불행을 우리는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달 동안 밥에다 간장만 비벼 먹은 적도 있지만 먹을 때마다 맛있었다(쌀밥이었으니까!).

 불행이란 놈은 친절하게도

 인간의 상식을 불행 수준으로 떨어뜨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준다.

 

 

 아버지 달리기도 잘하셨어요?

 뭐 별시리 빠르지는 안해도 내 앞에는 한놈도 안 보냈다.

 에이~ 그건 반칙이죠.

 

 

 의사고 침쟁이고 간에 근방에서 내 돈맛 안 본 놈이 없었어.

 

 

 노대통령 군대에서 썩는다.”

 이기 뭔 소리고?!

 나라 지키는 기 젤로 중한 일인데 우째 썩는 기고? 이기 대통령이 할 소리가?

 아부지! 국방의 상징 철책선 잘라다 술 바꿔 드신 분의 발언치곤 너무 비장합니다.

 큭큭……

 

 

 - 그기 우째 썩는 긴고?

 나라 지키는 일이 제일로 크고 중요한 일인데……

 

 - 맞습니더, 아부지.

 아부지는 그런 말 할 자격 있십니더.

 내도 군대 갔다 왔고 아부지도 군대 갔다 왔은께네예.

 그란데 지 새끼 군대 안 보낸 놈들은 그런 말 하모 안되는 거 아입니꺼?

 

 군대가 사람 썩히는 데란 걸 너무 잘 알아서

 제 자식들 군대 안 보내놓고 신성한어쩌고 짖는 것들과,

 빈농으로 살다가 건설 노동자와

 아파트 경비원으로 늙으신 아버지가

 본질적으로 다르단 걸

 아버지도 아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다 이해하셨는지

 어쨌는지 대충 수긍하시는 분위기였다.

 

 

 남들 다 인정하는 내 밥벌이를 서른 넘어서까지 간섭받으면 울화가 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아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사들이 섞여 있어

 그 아이는 그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기도 할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라 놀림 받지도 않을 것이고

 친구들에게 제 부모나 집을 들킬까봐 숨죽일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는 학교 선생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것이며

 어쩌면 그 교사는 제 아비의 만화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간혹 아버지를 선생님 혹은 작가님 드물게는 화백님이라 부르는

 번듯하게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들 것이고 이런저런 행사에 엄마아빠 손을 잡고 참가하기도 하더라.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최규석은 가난에 익숙하지만 궁상맞지는 않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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