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2 - 8점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책소개는 앞에서 썼던 내용으로 대신하지요.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당신들의 대한민국 1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이 분이 구사하시는 문장이나 전개방식은 정말 완벽한 한국인 교수,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수정을 하고 문장을 다듬어 주셨겠지만 원문이 훌륭했기에 이 정도 책이 나올 수 있는 거겠지요. 예리한 통찰력에 외국어에 대한 감각도 상당한 수준으로 느껴지는데, 도대체 어떻게 한국어를 공부했기에 이런 경지가 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니다. 물론 엄청난 양의 한국저서와 고문을 연구하면서 실력을 쌓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저 또한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한 입장으로 이 분의 노하우가 궁금해지는군요. '박노자의 한국어 배우기'같은 책을 내셔도 대박나실 것 같습니다만.(웃음) 이상, 책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잡설이었습니다.



 24. 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한밤중에 책상을 치고 일어나

 탄식하며 높은 하늘을 본다네.

 많고 많은 머리 검은 평민들

 똑같이 나라 백성들인데

 무엇인가 거두어야 할 때면

 부자들을 상대로 해야 옳지

 어찌하여 가혹하게 긁어가는 일을

 유독 힘 약한 무리에게만 하는가.”

 

中夜拍案起

歎息瞻高穹

芸芸首黔者

均爲邦之民

苟宜有徵斂

矣是富人

胡爲剝割政

偏於庸 

 

-다산 정약용, ‘여름 술을 대하다(夏日對酒)’

 

 

 ‘바깥’에서 보기에 전자제품으로 ‘천하 평정’한 듯 보이는 신 자유주의 시대의 총아 한국. 그러나 막상 ‘내부’에서는 수백만 영세민들의 제 살 깎아먹기 식의 총소리 없는 ‘경제 전쟁’ 이 치열해지기만 한다. 황우석과 삼성 휴대폰으로 대표되었던 화려한㈜대한민국의 외형과, 그 내부의 비참한 ‘전쟁형 경쟁’은 과연 관계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사실을 따져본다면 외부의 ‘성공’은 내부의 ‘비극’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들은 대학 내 한국어 교육 기관의 비교적 저렴한 등록금(구미 지역의 기준으로 봐서는)에 놀란다. 하지만 관리자와 몇 명의 ‘기간(基幹)교원’을 제외한 나머지 한국어 교수들이 한 달에 1백만 원을 받을까 말까 하는 비정규직임을 과연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삼성이나 LG 전자제품의 멋진 모양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놀라는 외국 구매자는 이들의 하청 업체에서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과 대우가 어떤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황우석의 ‘성과’를 한때 흠모의 눈으로 바라봤던 일부 외국 학자들은, 황우석 팀의 박사급 연구자가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70만 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하루 12~13시간 동안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었을까?

 ‘바깥’에서 보기에 우리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제대로된 노동 생산성의 향상이나 기초과학 성과의 장기적 축적, 내수 시장의 원만한 성장이라기보다는, 노동자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대우를 감수하며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생존 공포’의 분위기다.

 나는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같은 화려한 영화를 재미있게 봐도 과연 그 전투 장면을 어렵게 연출해낸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일당으로 얼마를 받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쳐낼 수 없다.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상품을 만든 이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않았다면 ‘노예 노동의 결실을 즐기고 있다’는 가책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시베리아 부족들 중에서는 곰을 부족의 토템(신격화된 상징물)으로 생각하여 외경(畏敬)하는 나머지 ‘곰’이라는 말 자체를 터부시하고 그 대신에 ‘밀림의 주인’과 같은 별칭을 쓰는 부족들이 있다고 한다. 우리도 굳이 ‘외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힘 있는 집단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온갖 별칭들을 만들어 쓰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중산층 학생운동가였다가 극우 야당의 정치인으로 탈바꿈한 일각의 우파 정치인들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타협 등을 들먹이지 않는가? 곰을 ‘밀림의 주인’으로 부르면 참 멋지게 들리듯이 3공과 5공 출신의 극우 관료군과 재벌가들을 ‘산업화 세력’으로, 자신의 운동 경력을 팔아 우파 진영에 편승한 중산계급, 귀족 대학 출신의 정객들을 ‘민주화 세력’으로 부르면 참 멋져 보이는 모양이다.

 

 

 암기 경쟁에서 남들을 제압하여 입시·고시 같은 관문만 통과하는 것만 아니라 인맥 만드는 기술, 동창회든 향우회든 인연들을 잘 챙기는 능력, 필요한 사람과의 관계에 필요한 만큼 적절히 투자하는 ‘네트워크 관리’의 솜씨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상전 나라의 중산계층 운동인 골프가 네트워크 관리에 절실히 필요한 사항이기에 한국 골프 인구는 벌써 3백만 명에 이르고,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산천은 거의 골프장 일색으로 변한다. 미시적 권위주의가 강한 만큼 권력·권위가 작용되는 관계에서 표정·어투 관리 등의 연기력도 출셋길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영어가 물신화됐기에 일과 술, 사교 스포츠로 채워지지 않는 시간을 ‘출세에 중요한 영어’ 공부에 헌납하는 것 역시 관건 중의 하나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힘’ 냄새를 풍기며 번쩍이는 글들이 새겨진 명함을 얻은 ‘출세한 남성’이라면, 자신의 귀한 젊음과 인생을 그 명함의 값에 다 바쳤음을 깨달았을 때 밀려오는 허탈감에 잠 못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안간힘을 다 썼음에도 ‘가장의 체면’을 세울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남자라면 소외감·좌절감이 심해 심신이 모두 황폐해지기도 한다. 화병, 가정불화, 성생활 장애로부터 암이나 호흡기병, 자살,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요절 등 ‘좌절된 출세 욕구’가 가져다줄 수 있는 파괴 효과는 엄청나다. 한국의 4~50대 남성의 사망률이 같은 나이늬 여성에 비해 거의 3배나 높은 것은, 상당 부분 남성의 성공 의무에 대한 압박감과 거기에서 발생되는 각종의 심신 불균형과 질환(네트워크 관리와 스트레스로 인한 과다 음주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각종 질병, 재충전 시간 부족, 패배자들의 자살 등)에서 비롯되지 않나 싶다. 우리 모두의 ‘국민 종교’가 돼버린 ‘명함 숭배’라는 것은 인신 제사를 요구하는 잔혹한 사교(邪敎)인 것이다!

 

 

 체력이 국력이다?

 

 언어 교수를 밥벌이로 삼는 해외 거주의 한국어 선생의 기질이랄까? 한국에 있을 때나, 한국에서 생산된 텍스트 특히 신문들을 밖에서 접할 때나, 단어 하나하나에 관심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이 단어를 썼는지, 이 단어 사용의 배경에 있는 사고의 틀이 무엇인지, 이 단어가 속하는 개념적 계통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한국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용어들을 하나하나씩 반추할 때 느끼는 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군사적인 계통의 단어들을 일상적으로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다. 가령 진보 단체의 홈페이지에서조차도 우리 모 진보 정당을 ‘지원 사격’하고 있다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장에서나 쓰일 법한 이 끔찍한 의미의 단어를 그냥 무심히 ‘도움’의 동의어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사격과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면,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이 단순히 유린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다들 알겠지만 사각이라는 것은 사정거리 안에 있으면서도 총포 구조 등의 문제로 사격할 수 없는 범위를 뜻하는 대표적인 군사 용어다. 사실 군사주의적 일상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상사와 동료의 폭력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면서도 사각과 같은 군사 용어를 쓴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모순적인 일인데, 우리는 그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군사 용어에 익숙해졌다.

 형식상 같은 외국 근로자이면서도 공장의 외국 근로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대우를 받는 외국 선수들을 우리는 통상 ‘용병’이라고 부른다. 만약 어떤 미국 신문이 박찬호를 ‘mercenary’(용병)이라고 지칭했다면 박 선수는 명예훼손 소송으로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영어로 하자면, ‘mercenary’라는 말은 오직 돈을 위해서 한쪽에 붙어 다른 쪽의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맡은 파렴치한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거의 고용 살인자 같은 말과 통하는 단어 중의 하나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보낸 군대를, 웬만한 해외 진보 언론이면 다 이구동성으로 ‘mercenary’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반대로 이라크에 가서 경비 등의 일을 보는 미국 등 서방 민간인들을 정작 바로 ‘mercenary’, 즉 국방부와 국수 업체 같은 폭력적인 업무의 대리 수행자로 불러야 하는데, 주류 언론들은 뉘앙스가 좋지 않은 이 단어를 피해서 꼭 ‘contractor’(청부업자)라고 쓴다. 용병이라는 의미의 이 단어가 그만큼 안 좋게 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수라면 군인과 동격이요 외국 선수라면 돈으로 고용하는 아군의 임시직 군인이라는 상상이 별다른 반감을 자아내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들은 돈을 안 받고 무보수 봉사를 하는가? 우리의 내외국인 구별이 오늘처럼 엄격하지 않았다면 한국인 선수들도 ‘용병’으로 부를 만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수는 군인의 동격인가? 사실 우리가 통상 쓰는 운동 용어들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선수들이 ‘출전(出戰)’을 하고 유럽이나 일본을 ‘평정(平定)’하고 ‘개선(凱旋)하면 우리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스포츠를 국가 간의 모의 전쟁으로 만드는 끔찍한 단어들인데 우리는 그 단어들을 들어도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이와 같은 사고의 틀에 순치된 것이다. 하기야 평범한 수출 기업 노동자나 무역업 담당의 회사원이 수출의 ‘전사(戰士)’가 되는 풍토에서 태극 전사와 같은 표현이 이상하게 들리겠는가? 사실 병역법에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입상자들에게 병역 의무 면제의 혜택을 준다는 것은, 한 선수의 대외 운동 활동이 국위 선양의 차원에서 마치 군 복무의 동격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일일 것이다. 전쟁을 쉽게 연상시키는 근대적 스포츠는 물론이고 우리 일상 전체는 군사주의적 어휘로 물든 상태다. 특히 선수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즐겨 쓰는 표현 중의 하나인 ‘체력이 국력’이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말은, 일상화된 군사주의와 체력, 체육 담론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일본에서 종합 체력을 잘 키워놓은 뒤에 귀국하여 몇 차례의 승리를 거둔 야구 선수 정민태가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을 하거나(돌아온 정민태 ‘체력이 국력’, <굿데이>, 2003년 1월 13일) 제약 회사가 그 표현을 새로운 약물의 홍보 문구로 쓸 때에는, 국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국가라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것들 중의 하나라는 관념이 이미 우리의 집단의식이 된 듯하다. 우리야 이 표현을 쓸 때 단지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지만, 그 표현이 매체를 흔히 장식했던 다카키 마사요(박정희) 시절 같으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쓰였던 것이었다. 나라 주인이 장난삼아 부하들에게 체력 테스트를 시키면서 체력이 곧 국력이라는 말로 끊임없이 훈시를 내리곤 했던 바로 그 시절이 아닌가? 그 명언의 원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국민 각자의 완력이 국가의 힘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즉 각자의 신체가 국가에 귀속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신체를 건강히 만들 때 건강하고 장수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요, 유교의 시절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효도하는 의미에서 온전히 하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몸의 궁극적인 주재자(主宰者), 우리 충성의 최상의 대상인 국가를 보다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체력이 국력이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개체가 전체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흥미롭게도, 다카키 마사오의 최대의 정치적인 적은 북한이었지만, 체육을 집단주의 정신과 규율성 배양, 노동과 국방에 필요한 청년들의 체력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 공공연하게 규정한 북한이야말로 다카키가 애호했던 ‘체력이 국력’ 담론을 가장 원칙 주의적으로 발전시킨 셈이다.

 

 

 ‘동북아 허브’를 자칭하려는 나라가 보이는 법과 인권의 이해가 퇴행적인 면이 심하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아이를 군대에 안보내고 차라리 외국인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인간적 이해도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쓰는 ‘역지사지’라는 말을 한번 적용해 보자. 아들의 손을 잡고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향하는 부모의 어려운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는 것은 어떨까?

 구미 지역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다가 다시 귀국한 부모의 마음속은 솔직히 군대 생각에 한없이 복잡해질 것이다. 구석구석 엄연히 남아 있는 구타나, 부하에게 인분을 먹였다가 논란을 일으킨 한 장교의 행각이 대표하는 범죄적 인권 침해도 문제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다. 예컨대 구미 학교에서 선생의 언행이 틀렸다 싶으면 거침없이 나서서 수정해주는 등 나이·신분과 무관하게 모든 이와 평등하게 지냈던 아이가, 윗사람이 “야,이놈아!” 하고 외치면 그를 언어폭력으로 당국에 고발하는 대신 떨면서 분부를 기다려야 하는 사회에 정신적 타격을 받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선생이 아이에게 “점심 먹어라” 대신 “우리 점심 먹을까요”와 같은 표현을 쓰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가, 평생 처음으로 기합이란 것을 당하게 된다면 자살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한국의 부르주아 매스컴들은 하나같이 서양 귀족·유산층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지위에 비례하는 의무감)를 극구 찬양한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때 군대 대량 지원으로 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과시한 영국 귀족들이 대부분 고학력자로서, 사망률이 훨씬 낮은 장교층에 편입됐다는 사실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멀리서 예를 찾지 않아도, ‘유학생’으로서 병역을 기피한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나 군대에 가도 베트남 전장으로 배치를 받지 않고 집과 가까운 곳에서 아주 형식적인 복무만 했던 부시 현 대통령을 보면, ‘노블레서 오블리제’ 신화의 허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라는 것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총알받이로 만들어 지배층을 위한 살육의 도구로 사용하는 조직에 불과하다.

 

 

 새로운 이민자의 가혹한 착취로 생산이 증가한 것도, 스페인과의 제국주의적 약탈 전쟁도, 전쟁 때의 어용적 ‘애국주의’ 광풍도, 100년 전의 중도 개혁가들에게는 무조건 좋아만 보였던 것이다. 일제시대가 돼서 조선이 제국주의 세계의 후진적 구성원인 일본에 강탈을 당했을 때, 일본과 대조적으로 달라 보이는 ‘선진국’ 미국에 대한 각종의 환상들은 더욱 심해졌다. 식민지 백성인 조선인 친미 지식인들은, 미제의 통치하에 있었던 필리핀 등과 같은 식민지 주민들의 비극적인 사회, 경제 상황에 경악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 식민지 통치의 ‘아름다움’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예컨대 식민지 시대의 친미적 부르주아의 수령 격인 안창호는 식민지 필리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놀라운 것은 관청에서 대부분 필리핀 사람을 채용하고 있는 점이다.

 재판소를 가보아도 판사 검사의 대부분이 필리핀 사람이고 미국인

 관리는 얼마 없었으며 미국인들은 또한 즐겨 필리핀 사람인 검사의

 심리와 판결을 받고 있었다. 학교도 그렇고 행정 관청도 그러하였다.

 경찰관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다만 부족된 인원을 미국인으로 보용

 (補用)한다 함에 불과하였다. 이러한즉 최고 기관인 총독부의 고급

 관리는 더 설명할 것 없이 원주민이 대부분이고 미국인은 그 아래에

 사무관 등으로 있었다.(……) 언론이 극히 자유로웠다. 나는 어떤

 공원을 지나다가 다수의 군중들이 모였기에 달려가보았더니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 격렬한 언어에 실

 로 놀라운 점이 있었으나 그 자리에 지켜 선 경관은 금지도 아니할

 뿐더러 군중의 속에 끼어든 다수의 미국인도 벙글벙글 웃으면서 필

 리핀 사람들이 박수갈채할 때에 저도 박수하고 있었다. 이만한 정도

 이니 언론 문장의 자유는 능히 짐작할 것이겠다.(『필리핀 시찰기』,

 <삼천리>, 제 5권 제 3호, 1933년 3월, 10~11쪽)

 

 물론 일제의 압제에 비해서 미국의 ‘선진적인’ 통치가 좋아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소작인으로 전락한 대다수 필리핀 농민들의 무서운 빈곤과 일상적인 기아, 그리고 ‘총독부’ 등에서 미국인에 의해 기용되는 친미파 엘리트들의 오만과 반민중적 태도 등을, 평소에 통찰력이 뛰어났던 도산이 완전히 간과한 것은 놀랍다. 그것이야말로 친미 성향이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좋은 사례가 아닌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포함돼 있고, 모든 것은 하나의 개체로 표현된다.”

 효순이와 미선이 살해자가 지난 2002년 11월에 법정에서 무죄 평결을 받고 지은 미소를 보면서, 나의 머릿속에서는 동양 성현들의 이 명언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미군으로서의 자긍심으로 가득 찬 살인자의 미소 속에서 한 인간을 그처럼 비인간화시켜버리는 집단의 내력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한 집단이 무기와 돈의 힘을 빌려 전 세계에서 수백만, 수천만 명의 목숨을 짓밟았으면서도 이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참회하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열등 인종’을 살인하는 것이 왜 나쁜지 모르겠다는 그 얼굴 속에서, 살인적인 경제 제재로 굶어 죽거나 약이 없어서 죽은 백만여 이라크의 효순이와 미선이의 부어버린 배들이 보였다. 폭격과 기아로 사지가 찢어지거나 아사하거나 노예로 팔려버린 아프간의 효순이와 미선이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 모든 대형 국가 범죄에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커녕 ‘테러와의 전쟁’을 찬양하는 그들의 무수한 신문과 방송의 자만에 가득 찬 어조가 기억났다. 장갑차를 몰고 다니는 살인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유세계의 수호천사’라고 치켜세우는 펜과 카메라의 살인마들도 전 세계 효순이와 미선이를 깔아뭉개고 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 문화를 전수했다는 것은 개화기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자랑거리가 되어 교과서의 단골 메뉴이지만, 계백 장군 등 백제 정치인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6세기 후반에 일본에 건너가 사찰 건축의 기반을 닦은 백제의 와박사(瓦博士:기와 제조자) 양귀문과 석마제미가 누군지는 도저히 모르는 것이다. 백제 정치사 대략을 기억하고 있어도 백제의 기와·벽돌 제조법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관심조차 없다. 노동의 역사가 아닌 지배·살육의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근대사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한강의 기적’의 바탕을 마련한 것은 1960년대의 직물 수출이었는데, 대원군과 김옥균은 알아도 100여 년 전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에서 근대적 염직 기술을 배워 온 안형중과 박정선 같은 기술자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도 역사 왜곡이 아닌가?

 우리가 북유럽만큼이나 노동자들을 존중하고 바르게 대우해 주는 사회를 만들자면 우리의 역사 이해 역시 노동과 농민 수공업자, 기술자, 노동자 그리고 피지배민의 문화 및 투쟁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부르주아 정객들이 들먹이는 소수를 위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다수를 위한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마지막 왕조, 조선조가 중국 왕조의 평균 집권 기간인 200~250년보다 거의 두 배나 되는 기간을 채울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구구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조선이 중국에 비해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반면 신권(臣權)이 훨씬 더 강했던 것이, 역으로 사회에 안정성을 기하고 왕조의 수명을 늘렸다는 것이다.

 주인의 명령에 맹종밖에 못 했던 일본의 사무라이는 물론이고 중국의 신사(紳士)도 조선의 선비만큼 자신의 의견을 권력자에게 잘 내세우지 못했다. 조선 선비의 최고의 덕목은 직간(直諫), 즉 자기 생명도 돌보지 않고 바른말로 임금과 국가의 허물을 바로 잡아주는 일이었다. 직간으로 벼슬을,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잃은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그 희생 덕분에 사회 전체가 모순을 그 체제 안에서 그 나름대로 극복해가면서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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