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계사, 음식이 만든 역사 - 8점
21세기연구회 지음, 홍성철 외 옮김/쿠켄(베스트홈)


지금 당신이 컴퓨터를 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정확히 30년만 뒤로 돌려 봅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식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50년 전 또는 10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상황은 더더욱 달라지겠지요.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먹고 있던 음식들 대부분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고,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200년, 300년 전 쯤으로 돌아가면 아예 재료조차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가끔씩 궁금합니다. 과연 이 요리는 언제쯤 만들어 졌을까. 도대체 누가 이걸 먹기 시작했을까. 이 요리는 왜 이런 이름이 붙었고 이 재료는 누가 발견했을까. 문화재는 아는 만큼 보이고 요리는 아는 만큼 '더' 맛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굉장한 소스가 되지 않을까요?



21. 진짜 세계사, 음식이 만든 역사 / 21세기 연구회 지음, 홍성철.김주영 옮김, 홍성철 감수 /  Cookand(주)베스트홈

 

 감자가 유럽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1565년, 남미를 자기 땅처럼 지배하던 스페인 국왕 펠레페 2세 에게 헌상했다고 한 것이 처음이다. 이윽고 감자는 스페인령 홀랜드(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로, 그리고 영국을 비롯해 각지로 전파됐다. 그러나 감자가 유럽 세계에서 식량으로 보급되기까지는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의 적즉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감자가 보급되지 못했던 큰 이유는 바로 그 생김새에 있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감자는 개량된 것이다. 당시 감자는 울퉁불퉁, 거무튀튀하고 알도 작아서 여간 볼품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르면 하얀 속살을 드러내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거무스름하게 색깔이 변한다.

 자른 표면이 검게 변하는 현상을 보고 괴사된 피부가 연상되어서 그랬는지 감자를 먹으면 한센병에 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게다가 최음 효과가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600년대 초,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이런 이유로 감자 식용을 금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성서에 감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자 식용을 금한 종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감자를 식량으로 인정했다. 감자는 남미의 한랭한 고지대에서 전래된 작물이었음에도 북부 유럽의 기후에 잘 맞아 재배하기가 쉬웠다. 밀을 수확하기가 쉽지 않았던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독일, 폴란드, 러시아 같은 북부 유럽 지역에서 감자는 보리, 귀리와 같은 잡곡을 대신하는 귀중한 전분식이었다.

 따라서 농민에게 좀처럼 보급되지 않는 감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때로는 국가가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프로이센Preussen,영어로는 프러시아 Prussia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기울인 노력과, 프랑스의 농학자인 파르망티에Parmentier.1737~1813가 벌인 감자 보급 작전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농민에게 감자 씨앗을 나눠주며 강제로 재배하도록 종용했고, 그 뒤에 파르망티에는 프랑스인이 감자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없애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감자가 유럽에 들어온 지 2세기나 지난 18세기 중반의 일이다.

 

 

 또 하나, 대기근을 계기로 세계사의 흐름이 크게 변한 예를 들어보겠다. 현재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 주빈이 총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감자 기근을 피해 건너온 이주민의 자손이다. 당시 아일랜드 이주민은 시끄럽고 거친 술주정뱅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이윽고 그 안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나온다.

 아일랜드에서 대규모로 탈출한 농민들 중에 패트릭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패트릭은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하여 보스턴에 정착한다. 그는 비록 빈곤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의 손자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여 정계와 재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뒤에서는 "그래 봐야 어차피 아일랜드 놈인 주제에!" 라고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의 차남, 즉 패트릭으로부터 4대째가 되는 손자는 훗날 미합중국의 제 35대 대통령이 된다. 그가 바로 존 에프 케네다 John Fitzgerald Kennedy다. 케네디의 증조부는 감자 기근 때문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농민이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당唐나라로부터' 왔다기보다는 외국에서 온 겨자라는 의미로 '도오가라시'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남반'이라 하기도 했다.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왜구가 고추를 전했다고 해서 당시에는 '왜겨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것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킴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병사가 다시 일본으로 가져갔는지, 일본에서는 '고라이코쇼'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서는 고추를 '고쇼.후추라는 의미-옮긴이' 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규슈의 명물인 '유즈코쇼'는 유즈(유자)와 고추를 섞은 양념을 말한다.

 

 

 렌즈콩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누에콩은 더 오래전부터 재배된 듯하나, 재미있는 건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사람들은 렌즈콩을 싫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채식주의자였는데도 누에콩을 매우 싫어해, 적에게 쫓길때도 바로 앞에 숨을 수 있는 누에콩밭에 숨지 않아 붙잡혀 처형당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간장을 영어로는 보통 소이(소스)라고 한다. 소이는 일본어 쇼유에서 온 말로, 이것이 변해 원료인 콩을 뜻하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17세기 유럽인은 콩이라는 식물을 몰랐기 때문에, 루이 왕조의 궁정에서처럼 극히 일부에서만 유행한 간장, 즉 소이 소스의 소이를 그대로 콩이라고 썼던 것 같다. 즉, 소이 소스는 '콩으로 만든 소스' 라기보다는 원래 '간장, 즉 쇼유 소스'다. 또한 콩은 영어로 소이빈 이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간장, 즉 쇼유의 콩' 이다.

 

 

 일본에서는 모든 음식에 마요네즈를 얹어 먹는 사람을 가리켜 '마요라'라고 하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로 튜브에 든 마요네즈가 일본인의 식생활에 깊이 침투해 있다. 마요네즈는 원래 프랑스 주방에서 공들여 만드는 어엿한 소스의 한 종류다. 프랑스 요리 사전을 보면 마요네즈는 '노른자에 식초와 기름을 섞어 만든 차가운 유화소스'로, '소스 에스파뇰, 벨루테 소스, 베샤멜 소스와 함께 기본 소스 중 하나' 라고 나온다(<프랑스 음식 사전>).

 

 

 나폴레옹은 또한 치즈를 매우 좋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세핀, 오늘 밤은 안 돼" 라는 말은 나폴레옹을 깨우기 위하여 그가 대단히 좋아하는 치즈를 접시에 담아 코끝에 갖다댔다는 신하에게 한 말로, 나폴레옹이 무엇과 착각했는지, 반 잠꼬대로 한 말이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빵은 소금과 함께 아주 귀중한 양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함께 빵을 먹는 것이 동료, 즉 컴패니언이라는 사실은 제3장에서도 말했는데, 소금도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담에도 있듯이 소금을 함께 먹지 않고서는 서로를 알 수 없다." 고 말했다.

 러시아 속담에 '그 사람을 알려면 함께 1푸드(약 16킬로그램)의 소금을 핥아보라.' 고 하는 것이 있다. 그만큼의 소금을 소비할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다면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함께 소금을 핥아먹었다'는 건 한솥밥을 먹은 사이라는 뜻이다. '함께 빵과 소금을 먹다'도 비슷한 뜻이다.

 이것이 변하여, '빵과 소금'은 환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는 지금도 먼 곳에서 손님이 오면 보리 이삭과 소금을 쟁반에 담아 환영한다고 한다. 러시아어로 '빵과 소금은 거절할 수 없다'는 말은 접대를 거절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반대로 '빵과 소금을 잊는다'는 은혜를 잊는다는 뜻이다. 영어에서도 '빵과 소금' 이라고 하면 환대의 상징이다.

 

 

 한 다스는 보통 12개다. 그런데 영어로 '빵집의 한다스'는 1개가 많은 13개다.

 13세기 영국에서 빵가게들이 빵 무게를 속여 판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 그러자 1266년 만약 빵가게에서 무게를 속여 빵을 팔면 중벌로 다스린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는 똑같은 무게로 빵을 구울 수 있는 설비를 갖추는 것도 어렵고, 그렇게 무게를 맞추는 데 들이는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정말로 아주 미세한 무게 차이로 벌을 받아야 한다면, 이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빵가게 주인들은 손님들이 사가는 빵 한 다스에 큰 맘 먹고 빵 한 개를 덤으로 주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고 한다.

 그때부터 '빵가게 한 다스'는 13개가 되었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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