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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 손석춘 지음/개마고원 |
역시 손석춘이다. 신문 손석춘, 방송 손석희, 대한민국 언론 투톱인가.
R통신 - 손석춘이 지은 또 다른 책입니다. 간단히 리뷰해 놓은 게 있으니 참고하시길.
44. 신문 읽기의 혁명 /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신문 편집과 현실 그림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되더라도 간접경험이라는 근원적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지구 곳곳에 들어가 있는 서방 통신사 기자들이 보낸 기사들을 국내 신문들이 받아 편집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지구촌의 현실을 그때그때 신속하게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장에 가 있는 서방 통신사의 취재기자와 그 통신사의 편집 과정을 통해 걸러진 현실을 보기 십상이다.
가령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에서 우리들 대다수의 시각이 이스라엘 쪽으로 경도되어 있는 것이 그 적절한 예이다. 미국의 정치, 경제, 미디어 체제에 끼치는 유태인들의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대체로 서방과 이스라엘의 이해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서방 통신사들이 제공하는 정보는 많은 경우 이스라엘 쪽에서 바라본 기사들이기 쉽다. 그것을 국내 언론들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알게 모르게 친이스라엘적, 반아랍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 언론의 비판의 도마에 자주 오르내리는 쿠바나 이라크에 대해서 우리 독자들이 호의적인 시각을 갖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보제국주의의 문제가 우리들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국의 심장 – 편집부
편집의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14대 총선을 앞두고 현역 육군 중위가 양심선언한 ‘군부재자투표 부정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와 『조선일보』를 보면 동일한 기사가 신문에 따라 얼마나 큰 차이가 벌어지는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한 신문은 이를 1면 통단 표제 아래 실은 반면에 다른 신문은 제2사회면에 보일락 말락 1단으로 편집했다. 독자가 편집을 읽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도 편집에 의해 사라지거나 축소되면 없거나 작은 현실이 되고, 그리 크지 않은 사건도 편집에 의해 부풀리면 엄청난 의미가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대 대중사회의 현실이다.
그런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로 2002년 11월 28일자 『조선일보』의 1면 편집을 들 수 있다. 신문 표제와 기사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일보』는 “조지 W 부시(Bush) 미국 대통령이 27일, 주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지난 6월 심미선(14),
그런데 『조선일보』는 정작 두 여중생이 2002년 6월 13일 비극적으로 온몸이 짓이겨진 채 숨진 참사를 바로 다음날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낼 만큼, 그리고 그 사실을 1면의 머리기사로 보도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편집했으면서도 정작 그런 사과가 나온 사건에 대해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단 한 줄도 편집하지 않은 사실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편집의 실패요, 독자에 대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신문 편집과 정치권력
그러나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20일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 20일간 사태 전개 과정에서 보인 프랑스 최대 일간지 표제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만에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레노블에 야영」
「폭군 리용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접에 출현」
「보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어제 황제 폐하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튀틀리 궁전에 듭시었다」
『모니퇴르』의 이 ‘눈부신 변신’은 권력 앞에서 신문 표제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교과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불과 20일 사이에 나폴레옹은 살인마에서 아귀로, 다시 괴수에서 괴물로, 이어 폭군에서 약탈자로 바뀐 뒤 이윽고는 보나파르트를 거쳐 황제 그리고 황제 폐하로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세상에 이런 신문도 다 있는가? 그러나 섣불리 비웃지 말 일이다. 이런 사례가 비단 프랑스 언론사에서만 있는게 아닌 까닭이다. 한국의 짧은 언론사에서도 권력에 의한 굴절은 숱하게 발견된다. 더구나 1980년대 한국 언론의 굴절은 부끄럽게도 나폴레옹 당시의 프랑스 언론 이상이었다.
1판과 5판 사이의 독법
1980년 이른바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 해직 때 이를 추진했던 신군부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은 언론사 포기 각서를 받기 위해 내로라하는 신문사 사장들을 보안사령부로 부르면서 내심 몹시 긴장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우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우였다는 것을 곧 확인할 수 있었단다. 그러면서 그는 “썩은 호박에 칼 들어가듯 쑥쑥 먹혀들었다”고 회고했다. 과연 이 모욕적인 언사 앞에 떳떳할 수 있는 언론사 사주가 있을까? 독재의 치하에서 언론사 사주들과 고위 편집 간부들이 터무니없이 쉽게 무너졌던 모습은 편집국의 밤을 밝히는 기자들에게 좌절감만 한층 깊게 안겨주었다.
신문 편집과 광고
이와 비슷한 사례는 한솔그룹 관련기사가 삭제된 『서울신문』(현『대한일보』)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솔 뇌물사건 연쇄 연루」제하의 이 기사는 “한솔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 뇌물사건에 이어 증권감독원 비리에도 연루됐다”며 신생 그룹 한솔의 고속 질주 배경을 다룬 기획물이었다. 편집자 또한 사회면 상자기사로 돋보이게 편집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5판에서 돌연 삭제되어 엉뚱한 기사로 대체되었다. 『서울신문』1판을 본 한솔그룹이 편집국 고위간부 및 경영진에게 기사 삭제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기사를 삭제했다. 여기서 한솔그룹은 광고주임은 물론 신문용지를 독과점적으로 공급하는 제지회사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언제 신문용지난 사태가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신문사는 신문용지의 독과점 공급업체에게 구조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판에서 경제면에 보도된 신세계백화점 불법매장 사진이 2판에서 해외여행 러시 사진으로 바뀌면서 30면 제약회사 광고가 신세계백화점 세일광고로 ‘둔갑’하고 있다. 우리 신문들이 흔히 저지르고 있는 ‘기사와 광고 맞바꾸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재벌에 비판적인 기사가 우리 신문에서 시나브로 사라지거나 있더라도 작게 편집되고 있는 배경에는 이처럼 자본의 경제 논리가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권위지를 표방하는 세계적 언론들이 대부분 1면에 광고를 싣지 않거나 적게 싣고 있는 것도 우리 신문들과 비교해볼만한 대목이다. 사실 언제나 신문 1면의 4분의 1을 광고로 채우면서도 정론지를 자처하는 신문들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이나 서구의 주요 언론들이 1면에 광고를 게재하지 않거니와, 일본 신문의 경우에도 1면 광고는 3단을 넘지 않고 그나마 대부분을 서적 광고로 채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이들 나라 역시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택하고 있으나 우리 신문들처럼 철저하게 가문 중심의 족벌 경영체제를 이루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신문자본의 힘이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산된 바로 그만큼 신문 편집에서 편집책임자의 자율성이나 권한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1면 하단에 언제나 광고를 싣고 그것도 모자라 지면 사이에 돌출광고를 마구 집어넣는 우리 신문의 상업적 관행은 신문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일부 편집자들 사이에서 1면에 광고를 싣지 말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광고 수입이 대폭 줄어든다는 점에서 언론 소유주에 의해 일출된 바 있다.
어쨌든 1면에 광고를 싣지 않을 만큼 서방 언론인들에게 1면 편집은 우리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방의 신문 편집자들이 광고에 초연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흔히 ‘언론 천국’으로 오해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CBS 사장을 역임했던 프랭크 스탠톤(F. Stanton)이 “우리는 광고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므로 광고주들 전체의 일반적인 목적과 욕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과 미국의 언론사를 들춰보면 기업들에 비판적인 진보 신문들은 광고주의 광고 거부로 인해 이미 20세기 초에 대부분 몰락했다. 판매 수입보다 광고 수입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면서 튼튼한 광고 수입이 보장된 보수 신문들이 신문 판매가 인하를 단행했고, 이는 진보적 언론의 숨통을 조이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광고주들의 영향력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권력인지 모른다.
광고주들, 곧 경제권력은 신문 편집에 정치권력 이상의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면서도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접에서 ‘숨은 권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문 편집의 경제학은 편집의 정치학과 만난다. 그 상징적 사건이 1997년 겨울에 일어났다. 큰 광고주들인 재벌에 대한 비판 기사를 제대로 편집하지 못함으로써 재벌들의 거품경영이 눈덩이처럼 커져갔고 그 결과가 1997년 겨울에 닥쳐온 IMF사태(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체제에 한국 경제가 편입된 사건)였다. 만일 한국의 재벌들이 언론의 입을 틀어막지 않았더라면 IMF사태는 사전에 ‘예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신문 읽기의 혁명’이 왜 필요한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사설과 편집 방향
우리 신문들은 미국이 예멘 인근 공해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배를 나포했을 때 이를 1면에 대대적으로 편집했다.『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모두 같은 날 신문 사설에서 북쪽을 강도 높게 비난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공해상에서 미국이 사실상 ‘해적 행위’를 한 것으로 명백하게 미국의 책임을 물어야 했다. 실제로 미국은 합법적으로 미사일을 수입한 예멘 정부의 항의를 받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배를 돌려주었다. 우리 신문의 편집 방향과 그를 뒷받침하는 사설들이 얼마나 냉전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반민족적인 편집과 논평을 서슴지 않는지 극명하게 드러난 지면들이다. 더구나 이때가 16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둔 상황이었고 이회창 후보와
사설 바로 보기
가령『독립신문』이 일본의 침탈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난 의병들을 비도(匪徒)로 규정하거나 이를 테면 “충주 월악산에서 죽은 놈이 몇 명” 이라는 식으로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은 개화파들의 시각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독립신문』곳곳에서 드러나는 일본과 미국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라든지 우리 민족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하도 같은 맥락이다.
과연 우리 신문들은 신문의 날 1백주년을 기념하면서
그뿐인가. 일부 언론학자들과 역사학자들까지
독자들은 이처럼 언론에 의한 우리 현대사의 왜곡에 대해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왜 느닷없이
두 신문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여 선전하는 ‘민족지 신화’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친일 언론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서는 저자의 책『부자신문 가난한 독자』1부를 참고.) 『조선일보』와『동아일보』가 일제 말기 저지른 ‘친일 편집’의 죄악상은 인쇄된 신문 지면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나마 있는 역사적 인물을 아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식으로
독자들은 이제 왜 우리 신문들이
신문사주와 편집 주체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음에도 우리 신문들의 소유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다. ‘사주(社主)’에 의해 철저히 전제적인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령 ‘민족지’를 자처하는 두 신문의 경우,『조선일보』는 친일 금광재벌 방응모 이래 4대가 세습하고 있으며,『동아일보』도 친일 지주
이들 사주들이 순수한 언론인 출신들이 아님은 물론이다. 설령 기자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단지 ‘경력용’으로 잠시 편집국에 적을 두었을 따름이다. 그런 이들이 자자손손 대를 이어 신문사 사주로서 그 자리를 세습해올 수 있는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신문사 대부분의 주식을 특정 가문과 특정 재벌이 집중하여 소유하고 있어서다.『조선일보』는 방씨 일가가 90%대의 주식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한국일보』는 장씨 일가가 무려 99%에 달하는 주식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다.『동아일보』또한 인촌기념회와 김씨 일가가 75%이상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비정상적인 소유 구조는 자연스럽게 각 신문사 내부에서 이들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만들어준다. 더구나 우리 언론계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의 권력이 단순히 신문 경영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전혀 신문기자의 경험이 없거나 있더라도 잠시 거쳐가는 형식의 지극히 짧은 경험밖에 없는 이들이 신문의 편집과 사설의 방향이나 성격을 실질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설을 책임지는 주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기자가 한 신문사의 수습기자로 들어와서 논설위원이 될 때까지 20여 년이 넘는데, 그동안 그의 의식은 그 신문사 사주의 노예처럼 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한 유력지 논설위원의 우울한 회고담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독자들은 이제 편집기자와 편집부장 편집국장 편집인으로 이어지는 편집자의 피라미드 위계구조 맨 꼭대기에 전혀 문외한인 비편집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터이다. 사설은 편집인과 논설주간을 통하여, 사설 외의 지면은 편집인과 편집국장을 통해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이들 사주들의 힘은 적어도 그 신문 내부에서는 가히 봉건시대의 왕권에 버금간다. 아니 능가한다.
더구나 신문사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광고를 재벌들이 주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에서, 스스로 재벌의 덤에 올라 있는 신문사 사주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재벌들과 이해관계가 같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독자들은 우리 신문들이 왜 반노동자적 보도를 일삼는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신문 편집의 궁극적 주체가 사주들이므로 대부분 우리 신문들 편집 방향이나 사설 논조가 ‘친자본’이고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것은 ‘필연’이다. 사주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자본가로서 스스로 신문사 내부의 언론노동조합운동에 적대적이거니와, 노동쟁의 대부분이 주요 광고주인 재벌들의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한국의 현실은 참으로 우려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설은 고교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의 훈련용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다수 고등학교에서 일선 교사들이 사설을 논술 수업에 적극 활용할 뿐 아니라, 실제로 신문 사설이 대입시험에 지시문으로 출제되고 있다.
이른바 ‘신문교육운동(NIE)’이란 것도 명목상으로야 신문 편집인협회가 교육부로 보낸 공한에서 보듯 “청소년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고 배우며 토론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언론의식, 민주의식, 시민의식을 깨닫게 되어 올바른 현대인으로 자라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낱 사주의 사설(私設)에 지나지 않거나 천편일률적인 사설들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이 얼마나 민족문제나 노동문제에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될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신문기자의 숨결
<자료 81>은 1988년 5월 15일 창간된『한겨레신문』의 1면이다. 세로편집의 오랜 관행을 과감하게 벗어나 전면 가로편집으로 신문을 제작한 것은 편집사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실상 세로편집은 일제의 자재로서 한글과는 전혀 맞지 않는 편집 형식이었다. 가로 편집의 가독성이 훨씬 높음에도 우리 신문들이 세로편집을 고집한 것은 ‘권위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일부 편집자들이 “가로편집은 대학 신문 같다” 라든가 “권위가 없어 보인다” 라든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가로편집 도입을 반대했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한겨레신문』의 ‘혁명적 가로편집’을 계기로 가로편집은 확산되어 갔으며 해방 후 세대가 우리 사회의 대다수가 되면서 1990년대 말에는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로 전환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세로편집의 형식을 고집한 신문일수록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수구적 편집을 보이고 있는 것은 독자들이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실패한 편집과 편집권
1995년 겨울, 당시
앞서 인용한 젊은 기자들의 취재기사들도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신문사 사주들은 언론노동조합이 결성된 뒤부터 수습기자 선발에서 면접 비율을 대폭 강화시켜 시위 전력자나 학생운동 출신들을 대체로 탈락시키고 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한 언론 노동조합을 고사시키려는 세련된 전술이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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