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1 - 8점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문장수집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내용을 옮긴 적도 드문 듯합니다. 1권에서만 A4용지로 14장이 나왔군요. 저작권에 문제가 될 법한 양이지만 한겨레와 박노자씨는 이해해 주시리라 봅니다. 이렇게 올려 놓으면 모르긴 몰라도 책이 2배는 잘 팔릴거예요.(웃음)

저 같은 경우,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하는 걸 상당히 즐깁니다. 이따금 방 한구석에 홀로 앉아(비라도 내리면 최적의 조건이 완성됩니다.)그동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나 부끄러웠던 기억들을 되짚으며, 또는 억울했다고 생각하는 상황들을 되짚어 보며, 내가 아닌 제 3자로서의 관찰을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로 밖에 해석될 수 없다고 생각한 상황들이 180도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완벽하게 타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면 모든 원인은 나였을 때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나타 납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지만 타인의 입장에서는 용서하기 힘든 경우도 깨닫게 되지요.

건강한 사회란, 좀 더 다양한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타인을 볼 때도 한가지 시선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그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사회가 살아 남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탁월합니다. 국가레벨의 관점에서 제 3자의 시선을 제공하니까요. 냉철하고, 단호하며, 예리하기까지 하니 추천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 정도의 남자에게 사랑받고 분석되어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 깊은 행복을 느낍니다. 그리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다른 나라에 흥미를 느꼈거나, 또는 다른 나라로 귀화했다면 모든 것들이 그 나라의 경쟁력이 될테니까요.(웃음) 강준만씨와 더불어 제가 저자에 대한 믿음만으로 책을 살 수 있는 인물에 박노자라는 이름을 추가했습니다. 국적을 따지는 걸 좋아라 하진 않지만, 이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참 기분 좋군요. 




23. 당신들의 대한민국 01 /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한국에서 생활하며 나는 귀화를 결심했다. 귀화과정에 대해서는 국제민주연대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사람이 사람에게' (2001년 10~11월호, 통권11호)에 기고한 '국적 취득기'의 일부를 인용한다.

 

 한국에서 직장을 얻고 2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이미 1995년에 한국 여성과 결혼한 나는 1999년 2월부터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현행 귀화 관련 법률에 따르면, 배우자가 한국인인 외국인은 직장과 주소를 가지고 2년 이상 한국에서 살면 한국인이 될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자격을 얻었다고 해서 한국인 배우자와 함께 한국에서 2년 이상 산 외국인이 모두 한국인이 되려고 귀화 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나는 귀화 신청을 하기 전부터 한국의 이중 국적 절대 불허 방침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러시아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세계주의, 인류 보편주의 사상을 신봉한다 해도, 태어나서 자란 나라의 국적을 자기 손으로 버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국적에 대한 국가주의적인 애착이 없다 해도, 러시아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갈 때마다 비자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간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듯 복잡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2년쯤 걸리는 귀화과정의 길로 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귀화신청서를 내밀 당시 의식적으로 몇 가지 동기를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나는, 한국학을 한다는 사람으로서 한국인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까지도 국적과 혈통을 대개 동일시하는 많은 한국인에게 '화두'를 하나 던져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한국과 혈통적으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한국인이 되고 싶어하고 될 수도 있다면, 과연 한국인이라는 것이 '핏줄'로만 결정지어지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주저함을 떨쳐버리고 출입국 관리사무소의 국적 상담소에 귀화신청서를 내던 날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내가 제출해야할 서류 중에 나와 아내의 은행통장과 전세계약서 사본도 들어 있었다. 재산이 일정 금액(지금의 기억으로 3천만 원) 이상 되어야 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현행 법률의 특징 중 하나다. 전문직에 있으며 배우자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나는 이 '좁은 문'을 다행히 통과할 수 있었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귀화를 단념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극단적으로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국가라 해도, 노동자 등 약자를 걸러내는 국적 취득 조건을 노골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행위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난 뒤에, 나는 드디어 마지막 '관문'인 귀화 시험장에 들어갔다. 한국학을 전공한 내가 보기에도 그 시험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예를 들어서 문제에 정확하게 답하려면 '노동법', '판사', '재판' 등 어려운 한자 계통 어휘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다. 그것도 모자란 듯이, <산유화>의 저자가 누구냐는 질문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김소월을 모르는 자는 한국인이 될 자격이 없다는 논리인 셈이다.

 결국 이 시험을 무사히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나처럼 한국학을 전공한 구미지역 출신이나 한국에서 오래 산 한자문화권 출신(예컨대, 화교나 일본인) 정도였을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시험에서 떨어진 파키스탄이나 나이지리아 계통 노동자들이 실망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시험장을 떠났다. 이와 같은 시험을 실시하는 의도 중에 학력이 낮은 비구미, 비극동 출신 귀화신청자를 걸러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시험을 통과한 며칠 뒤에, 나는 과천 종합청사에서 국적 취득 증명서와 함께 태극기 한 개를 받았다. 예측할 수 있듯이, 엄숙하게 진행되는 국적 취득 의식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거무스름한 얼굴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파키스탄 출신이 몇 사람 있었지만, 국적 취득자들은 대부분 평생 한국에서 살아온, 상당 수준의 재산과 완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춘 화교들이었다. 귀화신청자가 통과해야 하는 갖가지 '조건'들 -- 특히 일정액 이상의 재산 보유 기준과 한국어 시험-- 이 사회의 약자들을 걸러내는 데 상당히 주효한 셈이다. 자본주의 국가가 계급적 차별과 억압을 위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믿지 않는 순진한 사람이라도, 위와 같은 귀화 과정을 거치고 나면 마르크시즘에 타당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했을 것이다.

 이제 한국에 대해서 '우리'라고 말할 수 있게 된, 한국 현실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때 '나'를 포함한 '우리'의 문제로 취급할 수 있게 된 나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 국적을 얻은 일이 매우 기쁘기도 하지만, 까다로운 재산 규정과 귀화 시험 때문에 '한국인이 되는 꿈'을 버려야만 하는 많은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국도, 지금 살고 있는 노르웨이처럼, 일정 기간 거주한 외국인에게 별다른 시험이나 재산, 신원 조사 없이 국적 취득의 혜택을 부여하면 좋을 듯하다. 이렇게 해서 귀화한 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으로 인해서 한국 사회와 문화가 다양해지면, 사회의 전체적 진보에 큰 기여가 될 것이다.

 

 

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

 

독재자에게 후한 한국인

 

 그 동안 나는 한국 젊은이들과 한국 역사를 논할 때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껴왔다. 대체로 해방 이후 지배계층에 아주 비판적이고, 현재 정치에는 아예 무관심하거나 상당히 냉소적인 그들이 역대 통치자 중 유독 한 사람에게만 예외적으로 많은 관심과 정서적인 공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짐작하다시피 이 사람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내가 상대한 젊은이들은 대부분 그를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미국인에게 살해당한 진정한 민족주의자', '후대 정권이 망가뜨리고 말았지만 나라경제를 바로 세운 위대한 경세가', '도덕적이고 용맹한 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기형적이고 안타까운 현상이다. 물론 박정희 숭배 분위기를 조장하는 극우파 언론과, 경제, 사회적 실책으로 이반한 지역 민심을 박정희 숭배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무마하려는 집권층의 책임도 만만찮지만, 지배층의 권모술수에 그 정도로 쉽게 넘어가는 젊은이들에게도 안타까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후대 정권의 끝없는 무능에 비해서야 박정희의 단호한 정책이 좀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태지만,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밀어닥친 전반적인 국가, 사회 위기의 원인이 박정희 집권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는가.

 첫째, '미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한 민족주의자 박정희'에 대한 신화는 민족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하게 되므로 위험하다.

 물론 요즘같이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영어공용화'같은 기형적인 프로젝트들을 추진하고, 알짜배기 기업의 해외 매각을 성공으로 보도하는 마당에, 미국과 몇 번 충돌을 일으킨 박정희에게 민족주의자라는 후광을 씌워주기는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일제 때 모범적인 사무라이로 평가받은 다카기 마사오 중위(창씨개명한 박정희의 일본 이름)가 일본 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 '미, 영 귀신'을 중심으로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박정희가 취한 외자, 기술 도입, 소비재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은 중간기적으로는 고속 성장을 초래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 기술, 무역 따위 분야에서 대미, 대일 의존성을 절대화, 영구화해 버리기도 하였다. 무제한적으로 외채에 의존해도 된다는 고속 성장 시대의 관행이 결국 한국을 'IMF'라는 수렁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1970년대 중후반의 '자주국방'은, 박정희의 부국강병론과도 관계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베트남에서 참패한 미국이 자국 내 여론을 의식해 채택한 '아시아 반공전선의 현지화'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을 긴장시켜 암살을 부른 이유가 되었다는 핵개발 계획은, 만약 성공했더라도 북한을 극도로 자극해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맞대응을 초래함으로써 결국 한반도의 대치상황만 한층 더 첨예화하고 말핬을 것이다.

둘째, '민족문화 창달을 도모한 전통 옹호자 박정희'에 대한 보편적인 의식은 허구성이 짙다.

 그는 '전통 가치'를 들먹이기는 했지만, 다양한 가치를 아우른 조선의 철학적인 유교를 일본 사무라이식 '충효사상'으로 왜곡해 정권유지 이데올로기로 이용했다. '논어'를 한구절도 안 읽는 요즘 젊은이들이 유교란 말을 꺼내기만 하면 '권의주의'라고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어쩌면 그 끔찍한 왜곡에 있지 않을까? 메이지의 '교육칙어(1890)를 상당 부분 모방한 '국민교육헌장'(1968)을 만들어 전국 어린이의 마음을 일본식 '맹종'과 '충성심'의 개념으로 더럽힌 것이 과연 민족문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초기에는 종교적 의례를 담당하고 후기에는 유교적 교육에 전념한 신라 화랑의 정신을 마치 일본 사무라이의 무삳와 같은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박정희 시대의 민족문화 왜곡이 어느 정도 극심했는지 절감하곤 한다. 경주에 가본 사람이면 다 알겠지만, 당시 국민의 혈세로 지은 '통일전'이나 '화랑교육원'같은 박정희의 대형 어용 이데올로기 상징물이 아기자기한 남산의 산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민족 전통'으로 가장한 사무라이식 '충효사상'은 진정한 민족문화와 아무런 관게도 없다.

 셋째, '도덕적이고 깨끗한 정치인 박정희'라는 의식은 보수언론의 역사 왜곡이 일상화한 사회에서만 생길 수 있다.

 박정희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기 내지 종신 집권이었다. 경제적 '실적 올리기'도 이를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이를 위해 국내외에서 납치, 고문, 암살, 매수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제시대식으로 '반공과 권력을 향한 충성심'을 내세운 어용 이데올로기가 도덕과 윤리 없는 경제적 '실리'를 절대화했다는 것이다. 정권에 맹종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밟아가며 나만 잘살려 하는 것이 그 시대의 '고귀한 이상'이 됐다.

"잘살아 보세"라는 이상의 구체적인 구현 중 하나가 바로 한국 사상 최초의 '외화벌이 전쟁'인 베트남 파병이었다. '베트남 특수'로 한진과 현대를 비롯한 거대 재벌과 정부는 10억 달러 정도를 벌어들여 대내외적으로 '경제성장의 성공'을 선포할 수 있었지만, 외화와 현대적 군장비, 미국의 독재권력 인정 등을 얻기 위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아도 된다는 발상을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착하고 정이 많은 시골 청년들이 미군을 본떠 똑같이 생긴 동양인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였다는 사실은 두렵기조차 하다. 동양인을 '열등인종'으로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흑인 등을 상대로 이미'가혹성 훈련'을 받은 미군들로서는 베트남 시골을 소탕하는 것이 별것 아니었겠지만, 독립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의 후손이 베트남에 가서 백인 압제자들 편에 서서 또다른 유색 약소민족의 독립투쟁을 '돈을 벌기 위해서' 진압 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역설적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광주학살의 아픔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광주 비극의 서곡이라고 볼 수도 있는, 한국군이 이름 모를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한 사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최근 들어 박정희 기념관을 건설하기도 하고, 보수 정객을 위시한 지배층의 '순례자'들이 박정희 생가를 계속 찾기도 한다. 독재정권 덕에 돈과 권력을 얻었거나 박정희를 팔아 지역감정을 이용하려는 자로서는 당연한 발상이리라. 하지만 이에 앞서 한국군의 총칼에 학살당한 베트남 여자와 아기들, 용역깡패나 경찰에게 맞아 불구자가 된 노동운동가들, 군대에 가서 흔적 없이 증발돼 버린 '데모 학생'들 -- 즉 독재권력에 희생당한 모든 이 -- 을 위해서 기념관부터 지어야 하지 않을까?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영어 구사력이 바로 국력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하려고 핳ㄴ다. 그러나 사실 언어란 영어 구사 수준과 관계없이 오히려 한 나라의 국력 향상과 정비례하여 세계적으로 유포되는 것이 원칙이다. 일본은 영어를 제2국어로 삼지 않았지만, 일본어는 이미 구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국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직은 환상처럼 느껴질 테지만, 멀리 내다본다면 앞으로 한글의 세계화도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영어 구사력이 나라의 대외경쟁력에 과연 그만한 영향을 미치는지 의문스럽다. 대외접촉을 업무로 하는 사람이면 어차피 영어나 다른 필요한 외국어를 잘 배울 것이고, 현장 근로자들까지 높으신 영어권 손님을 자주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의 공용화는 엄청난 예산 낭비(일체 공문의 영역 등) 를 의미하는데, 이 자금을 차라리 교육에 투자하여 사립대학 예산의 학생 등록금 의존율을 낮출 수 있다면 국력 신장과 나라의 미래에 좀더 보탬이 될 것 같다.

 영어공용화론자들은 보통 한국의 '선진화'와 '영어화'를 동일시하려고 한다. 서구의 비영어권 국가 주민들이 영어 구사력 분야에서 표준적으로 한국인들을 어느 정도 능가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다. 유럽인들의 영어 실력은 높은 경제적 수준과 여가문화의 발전에 따른 심화된 외국어 교육의 산물이지, 경제적 발전의 원인이나 원동력은 전혀 아니었다. 서구의 복지국가에서처럼 여기에서도 교사가 국비로 현지 어학연수를 정기적으로 다녀올 수 있고 한 반의 학생수가 15~20명에 불과하면, 영어의 공용화 없이도 졸업자의 외국어 실력은 당연히 지금보다 나을 것이다.

 오히려 서구 국가들은 대부분 영어의 실제적인 확산을 고려하여 프랑스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국 언어와 문화를 보호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쓸 뿐이지 '영어공용화'를 꿈꾸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경험과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대답은 자국어로 하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국민이 각자 경제적인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외국어 습득 문제까지 국가가 정책으로 결정한다면, 이는 '선진화'가 아니라 중세적인 부역제도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대주의적인 충성심으로 가득 찬 '조공국'이 '종주국' 언어 구사를 일체의 '신민'들에게 의무화하는 꼴이다. 종주국으로서야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부담을 하나 더 안게 된 '백성'들로서는 무거운 노역으로 보일 것이다.

 이 '영어공화국'의 망상은 실천에 옮겨질 것 같지 않지만, 일단 옮겨 진다면 몇 가지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게 뻔하다.

 첫째, 통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영어를 배울 형편이 안 되는 대다수 북한 주민들과 '국제화한' 남한인들 사이의 이질성이 더 심화될 것이다. 실제적인 남, 북간의 소외도 그렇지만, 사회심리상으로도 북한 주민에게 '미제 식민지 남한론'이라는 주체사상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꼴이 될 것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 남한의 친미파가 주체사상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둘째, 국내인들마저 한글을 등지면 해외 한인들의 현지 동화 과정이 더 촉진될 것이고, 세계 한인 공동체의 이상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 한인들의 연대야 말로 한반도의 상대적인 고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아니겠는가. 해외 한인의 동질성 유지는 한글 교육 장려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영어공용화론자들은 이를 무시한다.

 셋째, 한국 공교육의 현주소를 고려하면, 영어의 '국어화'로 고비용의 영어학원 사교육과 현지 영어연수가 젊은층에게 사실상 의무화될 것이다. 한국 학원가와 미국 대학가는 호황을 구가하겠지만, 고비용을 부담하지 못할 빈곤층은 삼류시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빠른 속도로 양분화되어 가는데, 나라의 미래를 위협하는 이 과정이 더 촉진될 것이다.

 북한 주민과 빈민을 소외시키고, 모국과 해외동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이 '영어공용화'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국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영어권 유학파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영구화하려는 것인가? 단기적인 이득에 눈이 먼 재벌들이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버리지 못하여 사원의 영어교육에 국가권력까지 동원하려는 것인가? 어쨌든 이 '영어공용화'논쟁은 한국 지배층의 의식상태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비유를 하나 더 덧붙인다면, 사람은 누구나 어른이 되면 부모의 슬하를 떠나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를 버리고 멸시하는 자보다 부모 봉양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가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게 되어있다. 우리 모두의 부모인 선조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민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게인으로서 생활해야 하지만, 우리 뿌리를 스스로 존중해야 남들도 우리를 존중할 것이다.

 

 

 가령 한국인이면 백제가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선진 문물을 고대 일본에 전수하여 고대 일본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문화 전수의 배경에 중국인과 왜인을 관료로 등용하기까지 한 백제의 개방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받을 수(受)와 줄 수(授)가 서로 비슷하게 생긴 만큼 외부로부터의 수혈과 외부로의 진출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 역사적인 교훈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면, 우선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각각 중국과 구소련에서 독자적이고 탄력성 있는 문화권을 형성한 조선족(재증 교포)과 고려족(재소 교포)의 독특하고 이질적인 경험에 대해, 경제력부터 먼저 밝히는 남한 사회가 지금까지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수난을 당했던 재중,재소 교포들은 20세기긔 광란 속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어렵사리 보존해 왔으면서도 남한 사회와 달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요소를 별로 지니고 있지 않다.

 나의 은사 중 한 분이신 레닌그라드 대학의 임수 교수(76세, 고려인)가 고려족의 그러한 면모를 대표한다. 당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려식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고치지 않고 아들들에게도 한자 이름을 지어준 그는, 고전 소설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정도로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를 완벽하게 익혔을 뿐 아니라 러시아인 며느리와 조화롭고 원만하게 지내고 있다. 미국의 삼류문화보다는 고려족 지식인의 이러한 문화적, 혈통적 포용성이 한국의 진정한 세계화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남한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들이 혛ㄴ재의 현대판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 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핳ㄴ다. 거란과 여진, 몽골, 일본 출신 귀화인들이 고려 사회를 문화적으로 더 풍부하게 만들었듯이, 네팔인의 순수한 불심과 인내심,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몽골인의 심성, 파키스탄인의 상술과 필리핀인의 열정 등은 단색적인 한국 사회를 다채롭게 만들 수 있따. 그들이 가난하다는 얇은 생각 이전에 독특하고 깊은 그들의 문화를 눈여겨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산재해 살던 여러 종족과 다양한 정치, 문화, 혈통적 관계를 유지했던 고구려가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비교적 자주적인 자세로 중국을 대한 것처럼, 한국도 반세기의 숙제인 대미종속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적이면서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근리의 교훈

 

 몇 년 전 한국에서 언론의 금기사항이 또 하나 해제된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도 4.3 민중항쟁, 10.20 여순사건 때 정부 진압군이 자행한 양민학살, 한국전쟁 때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등을 언급한다는 것은 거의 '사상적 불순'으로 받아들여져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높은 나라'에서 이 이야기를 일단 정론화하자 한국정부도 드디어 미군 만행의 피해자를 피해자로 정식 인정해 주는 기적적인 용감함(?)과 '자비로움'을 보여준 것이다. 앞으로 종주국 통신사들이 6.25 때 미군의 초토화 위주 전쟁방식으로 입은 한국인의 피해를 이제서야 '은혜'가 아닌 피해로 보기 시작한 국민의식 전환에까지 미국 언론이 앞장서고 국내 언론이 뒤따르기만 한다는 사실은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닌가? 몸에 밴 사대주의의 웃지 못할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웃지 못할 일이 있다. 1945년에 미국과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고 한국을 점령한 스탈린의 소련은, 1937년에 연해주의 고려인(재소 교포)들을 말도 안 되는 '친일 간첩 혐의'까지 씌워가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약 20만 명ㄷ에 달하는 교포 중에서 2~3만 명이 아사, 동사, 총살된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 편안하게 앉아서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생각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중앙아시아 사막에서 집도 재산도 사랑하는 친지도 다 빼앗긴 사람들이 얼어죽고 굶어죽는 장면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알게 모르게 러시아인과의 동화를 강요당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한푼도 보상을 못 받는다는 것, 그들 중 일부가 지금 다시 쫓겨나서 러시아 협동 농장에서 머슴생활이나 해야 한다는 것을 다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무자비한 스탈린 정권이 고려족을 거의 말살하고 말았지만, 역대 러시아 정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일에 대해 반성도 관심도 별로 표한 바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을 봉쇄하기 위해 대소 수교와 '거인 러시아 달래기'에 급급한 역대 한국 정권이 고려인에 대한 러시아의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한번도 추궁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공식 석상에서 언급이라도 했을까? 아니, 언급은 못해도 독일이나 이스라엘처럼 재소 교포의 남한 송환을 추진이라도 해봤을까? 그것도 부담이 된다면, 고려인 피난민들을 정부 명의로 공식 지원이라도 했는가? 슬픈 아이러니지만, 한국 정부가 고려인과 관련하여 취한 조치는 그들을 재외교포법에 의거한 한국 국적 취득 대상자에서 제외시킨 것뿐이었다. 스탈린의 범죄적 정책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이 이제 다시 한국 정부의 사대주의적 태도와 '장삿속 챙기기'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노근리의 경우에서나 고려족의 경우에서나, 한국 정권과 언론에게는 정의와 동족의 아픔 보다는 '주변 4강'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 고려족을 말살한 뒤에 조금도 반성하지 않은 러시아 정권을 '친구'와 '선린'으로 삼자니, 러시아인인 나로서도 웃어야 할 일인지 울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 소가 강요한 분단의 결과로 남한이든 북한이든 이른바 주변 '강국'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대결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남한은 미국과 일본,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각각 얻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련이 고려인들에게 가한 피해나, 미군이 한반도 양민들에게 가한 피해는 국제적으로 대량 학살죄에 해당하는 중범죄다. 그러나 분단체제 아래에서는 이스라엘이 독일에게 한 것처럼 한국 정권이 적즉적으로 나서서 미국과 소련의 죄상을 고발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외교상의 불이익도 문제지만, 반세기 넘게 이어져온 불평등외교가 지배층의 집단 의식을 완전히 오염, 굴절시켜 '어떻게 큰형님에게 대드냐? 그리고 이 거지 동포(고려인)들을 위해서 왜 감히 대드냐?는 식의 사고방식이 이른바 지도층의 통념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으로 굳어진 분단체제를 당장 청산할 수는 없어도 '큰 나라 섬기기' 식의 사고방식을 청산하기 위한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ㅎ미과 정의, 물리력과 도덕은 보통 함께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나라든 군대와 관료 조직이 크고 힘셀수록 오만함과 횡포도 배가된다. 따라서 이른바 '주변4강'의 물리력을 현실대로 인정하더라도, 그 물리력만큼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한반도에서 저지른 일로 봐서라도, 통일과 같은 민족의 핵심적인 문제들은 외세의 간섭을 가능한 배제한 상태에서 논의하고 추진하는 것이 순리다.

 한편 그들과의 관계가 불가피한 현실이긴 하지만, 그들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의 규모와 악질성도 잘 인식해야 한다. '죽음의 시장'으로 불리는 국제 무기시장을 독점하려는 '죽음의 장사치'미국과 러시아, 티베트와 신강 - 위구르 자치구를 군사기지와 무기시험장으로 만들어 생태계를 치명적으로 파괴한 중국, 재무장을 꾸준히 노리는 일본......, 그들의 자본이나 지식, 기술 등이 당장 현실적으로 한국인에게 필요할 수도 있지만, 정신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그들이 한민족에게 가르치거나 본을 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겠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의 국가로서의 도덕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주변4강관(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강도에게 "너는 강도다"라고 나서서 말할 여건이 안 된다 해도, 강도를 친구나 스승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한국 교과서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초기 남한군 역사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미국의 사학자 커밍스가 '남한군의 아버지'로 명명한, 하우스만(J. Hausman, 1918~1996)대위다. 1946년 7월에 남한에 상륙한 하우스만은 그후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정치무대의 '배후 실력자'로 남아 있었다. 다른 미군 고문들과 달리 한국어를 빠르게 배워 미군의 '한국통'으로 통하던 하우스만은 남한 군대의 모태가 된 이른바 '조선경비대'의 실세였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권력에게 남다른 충성을 바치던 정일권, 백선엽 같은 친일파 장교의 등용에도, 제주도 등지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토벌에도, 수사관에게 동지들의 명단을 넘겨준 남로당 출신 박정희의 출세를 보장해 주는 데에도 하우스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막대한 영향력 못지않게 동시대인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집착에 가까운 반공주의와 그에 입각한 '학살주의'였다. 죄없는 양민의 목숨을 수없이 빼앗은 '숙군'(군내 좌익 색출)작업을 지휘한 그는 부하들이 총살하는 장면을 촬영하여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거'를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제주도 양민 20명의 총살을 지휘한 일을 따지던 미국 대사에게 "몇 개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의연하게 대꾸한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충성스러운 친일파들의 보호자이자 민중항쟁 토벌의 귀재, 대미의존적 극우체제 형성의 중심적 인물이며, 체제의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하우스만, 나는 그가 한국사 교과서에 꼭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장차 대미의존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주의주역이 되어야 할 한국의 젊은 새싹들이 그들이 배우지 못한 또다른 현대사 속에 어떤 모습들이 감추어져 있는지, 현대사에서 대미관계가 어느 정도 종속적이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인식이야 말로 젊은 새싹들에게 보수적 사관이 빚어낼 허구적 자존심이 아닌, 정통성에 대한 진정한 사고와 열망을 키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개인 독립 만세"

 

 몇 년 전에 한 대학교의 개강 총회에 초청을 받아 가본 일이 있었다. 새내기를 위한 선배의 환영사 차례였다. 운동권에서 활약 중이던 학생회장(군대를 다녀온 고학년 대학생)은 새내기들에게 학과의 내력과 특징을 설명한 뒤에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군대 갔다온 선배들한테는 '선배님'이나 '형님'이라고 존댓말을 똑바로 해야 하는 것, 다들 알죠? 그것 때문에 기합을 주어야 할 일은 없겠죠?"

 새내기들은 "알아요!"를 일제히 외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그야말로 희비가 엇갈렸다. 소비 분야에서 '개성'을 추구하는 신세대가 사회관계에서는 불평등하고 몰개성적인 기존의 상하 명칭체계에 쉽게 안주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가장 진보적이고 평등지향적이어야 할 운동권 계통의 학생회장이 '님'으로 대우받기를 바라고, 이를 공개적으로까지 확인한다는 것이 매우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203ㅐ 중반의 젊은이까지도 '님'들의 세상을 벗어날 자주적 힘이 없다면, 서른 이상의 어른들의 사회는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문법적인 청자(聽者) 대우법(존댓말, 반말 등)과 함께 하위자가 상위자에게 절대 깍듯이 지켜야 할 경어법, 상위자,연장자를 일반적으로 직함(내지 신분 지칭어)과 '님'으로 호칭하는 호칭법이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전통에는 분명히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 진심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집안 웃어른이나 스승을 '님'으로 대우하는 것이 인간적인 정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전통이든 언제나 명암이 있는 것처럼, 그 전통의 역기능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 개인적인 존경의 정과 무관하게 모든 상위자에게 똑같이 써야 하는 말 높임법과 직함+'님'식의 호칭법은 현실적 연령, 계층 간의 불평등, 상명하달식의 상호 관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관계를 철저히 내면화해 각 개인의 정신세계의 기반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이다.

 인가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가 언어다. 원칙적으로 불평등한 호칭법을 평등과 상호 존중의 의식을 낳을 수 없다. 그 결과, 거의 본능화한 불평등의식으로 말미암아 개개인의 창조성이 나 진취성은 메마르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과 '선배님'의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이 크고 나서 감히 지도해 주시는'교수님'을 거역하기가 쉽겠는가? '님'들의 세상에서 자란 사람에게도 자신도 '님'으로 모셔지기까지 '몸보신', '복지부동'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양식이다.

 내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이 말이 서양인의 입장에서 동양문화를 오해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동양 역사를 자신의 생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동양 역사의 내재적 존리로서 케케묵은 존장사상과 그 언어적 표현의 일대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19세기 이후 양귀(洋鬼, 서양 귀신)의 침략과 무관하게 극동의 역사는 평등을 이상적 목표로 하는 -- 그러나 보통 새로운 불평등의 창조로 끝나는 --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미륵불의 평등한 세상이 오기를 갈망했던 조선시대의 민중혁명가보다는 그들을 탄압했던 양반 지배체제의 입장을 더 자세히 다루는 국사교과서 탓이 크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고도 '지체'의식을 끝내 버리지 못한 이승만 대신, 찾아오는 새파란 젊은이들에게 "나에게 절하지 마시오. 우리는 평등해야 하오"라고 말하곤 한 온건 사회주의자 여운형 선생이 초대 대통령이 됐다면, 지금 우리 일상 언어문화도 훨씬 더 평등하고 개방적이지 않았을까?

 국어 문법의 유기적 일부분이 돼버린 청자대우법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높임'을 '예사높임'으로 쓰는 문법의 변형은 자연스러운 언어 발달의 논리에 맡긴다 해도, 하나의 사회적 합의에 지나지 않는 호칭법은 우리의 힘과 결심으로 바꿀 수도 있다. 학우, 사제, 동료 사이가, 교수님, 부장님 대신 나이나 직분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모두 '씨','선생','동지'로 다시 태어난다면,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문화풍속도가 새로 그려지지 않을까?

 

 

 조교들이여 일어나라

 

 한국을 떠난 지 거의 2년 넘게 지났는데도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던 때의 한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그 당시에 어느 명문대학 한 학과의 학과장을 지내고 있던, 해당 학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교수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 교수가 한국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사회를 오래 경험했을 뿐 아니라, 한국 현실을 매우 예리하게 비판하는 '진보적 지식인'의 대열에 속했다는 사실을 미리 이야기해 둔다.

 IMF 시절의 민중의 고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다운' 대화가 본격화 하자, 한국의 삼복더위를 어렵게 견디는 나의 갈증을 풀어주려는 예의 좋은 교수가 찻잔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찻잔도 접시도 그 전 손님을 대접한 뒤에 씻지 않은 채 그냥 놓여 있었다. 옛 소련 사회주의 시절의 상부상조의 관습대로 나는 더러운 식기를 씻어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는 내가 "설거지를 해드리겠다"고 하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박 교수님은 손님이신데, 그런 일까지 하시겠다니...... . 우리 과에 조교도 있는데, 설거지에 문제가 있겠습니까?"

 교수 개인의 설거지와 과 조교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어리둥절해 하던 내가 자리에 앉자, 교수는 곧장 과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나야. 방 정리 좀 하게!" 한 뒤 수화기를 놓았다. 2~3분도 지나지 않아 조교가 나타났다. 들어오자마자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당장 설거지부터 해서 화분 물주기, 책상닦기, 쓰레기 정리 등의 잡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가는 조교에게 교수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안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생각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정말 평등과 인간 존엄성을 믿는 사회주의자라면, 왜 노동자 여성을 학대하는 그 현대판 노예주 앞에서 그 자리에서 항의해서 밖으로 나가버리지 못했을까? 예의에 어긋난 망동이었을 거라고? 이놈아, 배부르고 남의 아부를 만끽할 수 있는 그 자리, 교수 자리를 놓치기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던 것 아니냐, 이 겁쟁이야!"

 극도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잠을 못 이룬 그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똑똑하게 인식했다.

 첫째, 가만히 있었던 내 자신이 한국 교수사회의 '미풍양속'대로 조교를 상습적으로 부려먹는 그 교수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둘째, 고향보다 더 사랑하는 이 아기자기한 산과 언덕의 나라, 한국을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푸른 산과 바닷가 갯벌이 아무리 좋아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 위에 이처럼 군림하는 모습을 보다가는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처럼 신념을 지키지 못하는 약한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이들 착취자와 똑같이 되어버리면 미치는 것보다 더 무섭지 않은가.

 나중에 제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리고 한국인 아내와, 사학을 하는 한국 친구들에게 이 일을 물어보고 대충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 설거지 정도만 시켰으면 정말 민중을 아껴주는, 서구적 색채가 짙은 진보적인 귀족이었을 것이다. 보통 조교는 교수의 만능 기기이고, 영문 원서 번역, 논문 정리, 출판사 섭외 등 안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 조교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교수의 눈밖에 나지만 않으면, 그 조교도 그 교수의 인맥을 타서 언젠가 교수가 될 것이다. 당신이 조교를 부려먹는 모습을 일방적인 착취로 봤지만, 사실상 이는 일종의 쌍무적 거래다. 물론 일단 조교가 되어 학계 생활을 계속하려는 처지에서 이 거래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리고 당신이 불쌍하게 본 조교는 자신도 교수가 된다면, 그때 조교 시절에 당한 만큼 자신의 후배들을 충분히 부려먹을 것이다."

 이참에 한국 조교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 제발 그냥 참지들 마세요! 인간의 존엄성을 밟는 사람도, 그에게 대꾸 한마디 없이 밟히는 사람도, 그 장면을 항의 없이 지켜보는 (나 같은) 겁쟁이 목격자들도 다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몇 년 전 국수주의와 상업주의를 아주 완벽하게 겸비한 한 작가가 박정희를 너무 싫어했던 한 재미 물리학자를 박정희각 벌인 핵 모험의 주인공으로 거짓 서술했다가 들통나 나름대로 고초를 겼었다(그러나 책 판매부수는 결코 줄지 않았다!). 동시대 인물을 '민족주의화'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 천만한 (그러면서도 수익을 잘 올리는)일이다.

 그래도 그 물리학자에게는 명예를 지켜줄 사람들이 있었지만, 과거(특히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분단 이전의 과거)는 무방비 상태다. 우리가 과거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는 만큼, 과거는 '민족주의화'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임진왜란 때 어쩔 수 없이 왜군에 대한 갖가지 외교공작(주로 불교 계통의 왜군 장군과 천주교 계통의 왜군 장군 간의 이간질)에 나서야만 했던 사명당 스님(1544~1610)에게는 그 고약한 -- 그러면서도 불가피한 -- 역할이 실제로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교과서에서 거침없고 회의와 가책을 모르는 '민족영웅'으로 묘사해도 반대할 사람이 그리 많이 않을 게 분명하다. 사명당의 한시를 직접 읽은 일부 승려나 불교학자들은 그분의 마음이 진정 어떠했는지 잘 알겠지만, 오히려 근현대사에 나타난 불교의 친일, 친독재 굴절 등 '민족적 명분의 결여'를 인식해서라도 '민족영웅 사명당 만들기'에 앞장설 것이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서 부처님의 계율을 어겨야만 하는 현실을 탄식하던 사명당의 목소리를 적어도 극소수 전문가의 시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근현대사의 불가피한 산물인 민족주의는 진지한 의미의 문화에 대해서는 족쇄 노릇을 한다. 800년 전에 중국의 거사(居士) 이통현과 중국 승려 대혜(大慧)의 책들을 보고 갑자기 대오(大梧)를 이룬 고려의 지눌(知訥) 스님(1158~1210)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중국을 "피(被)와 아(我)의 투쟁 속의 적대세력" 으로 규정한 신채호(1880~1936)보다 훨씬 많은 마음의 자유, 창조의 자유를 누린 사람이었다. 지눌의 깨달음의 세계에는 국경도 종족도 없었지만, 초기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정신세계는 국경과 종족의 개념이 지배했다. 신채호 선생이 말년에 '민족'보다 '민중'을 중시하여 무정부주의에 투신한 것은 창조적인 개성의 소유자로서 민족주의와 창조력의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땠든 각자의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 있는 민족 개념, 민족주의를 한 번이라도 도마에 올려 의심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옛 러시아 속담에 "가출해 보지 못한 청소년은 100살을 살아도 어른이 못 된다"는 말이 있다. 학교, 신문 등을 통해서 우리 머리에 집어넣은 '민족 이야기'가 안정되고 확실한 '부모 집'이라면, '민족'이 없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공간으로 한 번쯤 탈출해 보는 것도 좋은 통과의례가 되지 않을까?

 

 

 "겁이 나서 억압자의 폭력 앞에 움츠려서 보신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분개해서 폭력투쟁이라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낫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비폭력투쟁의 원조인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다. 원칙으로서 비폭력을 지지한다 해도, 주먹을 날려서 바트자갈을 도와준 학생들은 자신들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굶고 다치고 죽는 문제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을 염두에 둔다면,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다혈질적이고 어색한 '구조방법'은 오히려 거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폭력이 만악의 근원이라해도, 무관심은 폭력보다 천배 만배 무섭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무관심은 결국 소수의 폭력을 낳는다.

 

 

 한번 바트자갈과 이야기를 할 때,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민족과 국적이 너무 우스운 개념 같아요. 핏줄이 비록 달라도, 나를 살려주고 믿어준 내 친구가 있는 나라를 나는 이미 '남의 나라'로 볼 수 없죠. 그는 나에게 형제와 같은 사람이니 그의 나라도 내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겠어요? 그러나 나의 이런 마음을 믿고 나를 '같은 동족'으로 쳐줄 한국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인간들이 왜 겉만 보고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나의 서류에 적혀 있는 '몽골'이라는 말만 읽고 내 마음을 보지 못하니 우스운 일이죠. 옛날에 씨족과 부족의 구분이 없어졌듯이,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소멸될 날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개항과 인종주의의 수용

 

 그러나 이처럼 오직 '중화의 문물', '중화의 예법'만 중시하던 풍토에 과연 '피부색'과 '인종'에 대한 인식이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생겼을까? 사실 인종주의의 수용은 조선의 개항(1876~1884)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 졌다. 인종주의의 수용이 상대적으로 매우 빨랐던 주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첫째, 그 당시에 인종주의는 조선의 지배층이 접촉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핵심 이념이었다. '서양 문명의 수용을 통한 자강(自强)'이라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프로젝트에 착수한 당시 조선의 개화적 엘리트는, '스승'격이 된 서구와 북미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인종주의를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서구에 체계적이며 철저한 현대형 인종주의(백인 우월주의)가 등장한 것은, 대충 18세기 중후반의 산업혁명과 인도 식민화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 이미 멸종의 길로 가고 있던 미주의 원주민(인디언)과 노예로서 매매의 대상이 된 흑인 등을 '비인간,인면수심의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관습화됐지만, 중국과 인도의 고급 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흠모의 태도도 강했다. 그러나 미주 약탈과 흑인 매매로 벌어들인 돈으로 산업혁명을 이루고, 1760~1780년대 들어 인도릐 완전 식민화로 상징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뚜렷하고 가시적인 승리를 거두자 주요 제국주의 국가의 태도는 일변한다.

 본격적인 '동양멸시론'은 이미 19세기 초반에 상당히 발달했다. 그당시 오리엔탈리즘(동양 비하론)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밀(James Mill)의 '영국령 인도사 Historyof british India'(1819)는 인도 문명 전체를 "실용적 가치가 전혀 없는 미신과 야만성의 합성물"로 취급하는 한편, 인도의 사제계급인 바라문(Brahman)을 "염치도 재능도 없는 원시적인 가짜 신들의 조작자(造作者)"로 묘사하고 있다. 당대 유럽 지성의 상징이던 철학자 헤겔(1770~1831)에 따르면, 인도와 중국은 "인간의 존엄성도, 자유도, 진정한 문화와 종교도 없는 퇴영적 문화권들"이며, '절대자의 자기 실현'(즉, 역사의 발전)이 전혀 불가능한 '정체성(停滯性)의 영역'일 뿐이다.

 그러나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은 '동양문명'을 "원시적이고 퇴영적이고 자유와 발전이 불가능한",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면서도 '동양 인종/동양 혈통'을 탓하는 데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유명한 영국 역사학자이자 인도 총독의 고문을 역임한 식민지 관료 매콜리(Thomas Macaulay)의 말을 빌리자면, "인도의 원저ㅜ민들에게 철저한 우리말, 우리 문화 교육을 시킨다면 그대로 지적인 차원의 영국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문명화의 담당층'을 자처하던 그들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1857년에 일어난 인도의 대대적 반영 무장투쟁(소위 세포이 항쟁)과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등 식민지/반(半)식민지에 대한 '성공적인' 대량 학살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세계의 태도는 또다시 일변한다. 이제는 '동양 문명'도 아닌 '동양 인종'과 '동양 혈통', 나아가서 일체의 '비유럽적 혈통'을 '야만성의 원천'으로 파악한다. 다윈(C. Darwin)의 '진화론'에 근거를 둔 영국 철학자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1860~1870년대에 자연도태 원칙을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하여, '약한 개인'과 맘찬가지로 '약한 부족'과 '약한 인종'을 '문명화'하는 것보다는 단순히 섬멸(도태)시키는 것이 인류의 발전에 훨씬 유리하다고 논박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the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유명한 표현을 만든 그에 의하면, 집단적 '부적자(不適者)'인 '열등한 유색/원시 인종'들은 '생존과 발달의 능력'을 '태생적으로' 지니지 못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를 대표적으로 발전시킨 사상가는 이광수가 1920년대에 그토록 좋아하고 따른 프랑스 철학자 르봉(Gustave Le Bon, 1841~1931)이었다. '인간과 사회'(1881)라는 르봉의 명저에 따르면, '인종/민족'의 '성격'(민족성)을 '개량'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가능할 뿐, 기본적으로 '부적자(不適者) 집단의 태생적 열등성'을 인위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개량'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열등 인종'에 대한 착취, 학살, 궁극적인 섬멸이 당연히 '적자(適者) 집단의 발달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골자였다. 인종주의자로서는 '우등 인종'과 '열등 인종'의 확실한 서열을 확립하는 것도 매우 당연하고 합당한 일이었으리라.

 '영국령 인도사' 저자의 아들, 유명한 자유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이미 1860년대 초에 여러 '인종'들의 '타고난 자질'과 '문명의 정도'를 서열화했다. 밀 자신도 속하는 '진취적인 앵글로색슨 인종'은 당연히 최고 우위를 차지했으며, 그 다음에 '게르만 인종'과 프랑스를 '맹주'로 하는 '로만 인종', '슬라브 인종', '야만적이며 무식한 동양의 잡다한 인종'의 순서였다.

 이 '개화의 등급'이론은 나중에 일본을 거쳐서 유길준(1856~1914)이 조선에 소개함으로써 한국 초기의 인종주의, 차별주의의 확고한 기초를 이루었다. 유길준이 인종주의를 소개하던 당시, 인종차별론이 이미 학설의 한계를 넘어서 구미 상류, 중류층의 기본적 집단의식이 됐다. 유길준이 도미(渡美)하기 1년 전인 1882년에 미 국회는 '중국인 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을 채택함으로써 "인종적으로 열등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과 체류를 엄금했다. 인종주의가, 단순한 학설이 아닌, 구미 지여게 진출한 한국 개화파가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인 현실이 돼버린 셈이다.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