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문장론 - 8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지훈



한국엔 제대로 된 쇼펜하우어 전집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우리의 환경이 척박하다는 뜻이다. 역시나 괴테나 똘스또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쇼펜하우어 또한 짜집기식 책이 나오는데는 질려버렸다. 깊이 없는 독자들을 양산하는 이 우려먹기식 출판업계의 악순환은 아마 100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될 게다.

허나...

역시나 짜집기에도 레벨이 있다. 해당 언어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는 사람이 출판사와 모종의 합의를 거쳐 이름만 올린 뒤에 찍어내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명확히 제시한 후, 제대로된 결과를 보여주는 책이 있다. 저자, 출판사 어느 쪽이 기획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번 기획은 훌륭하다. 글쓰기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지금(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일종의 개론서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는 실용적인 측면보다 항시 더 중요한 무언가를 던져준다. 그 점이 우리가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는 오래 전에 쓴 글의 링크다. 적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후회하지는 않을 듯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그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기에.


나는 이럴때 정말로 질투가 난다.






13. 쇼펜하우어 문장론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김욱 옮김 / 지훈

 

그러나 안다는 것과 여러 조건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앎은 깨닫기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후회로 한번쯤 고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애써 사색의 길을 걸어왔는데, 우연히 접한 한 권의 책에서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모든 노력의 결과와 보상이 저자의 명확한 통찰과 논리에 의해 하나의 진리로 탄생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말이다. 사실 이런 경우처럼 세월이 허망하게 느껴지는 때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나만의 고유한 사색에 의해 어떤 진리에 도달했다면, 비록 그 내용이 앞서 다른 책에 기재되었을지라도 타인의 사상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라는 점이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비록 동일한 모습과 형태를 갖춘 진리일지라도 생성된 모태는 엄연히 다르다. 다시 말해 산의 정상일지라도 오르는 사람의 개성과 방법에 의해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사색을 통해 기대하는 결과는 단순히 산 정상에 도달했다는 물리적 결과만이 아니라 정상에 도달하는 동안 겪었던 체험도 포함되어 있다. 둘째, 이 같은 개별적인 체험에 의해 동일하게 얻어진 진리라도 그 적용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셋째, 고유한 사색을 통해 얻어진 진리이기 때문에 독서를 통해 우연히 획득한 진리와 달리 어떤 환경 변화가 발생해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를 획득하는 이 같은 과정은 괴테가 남긴 다음과 같은 격언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대의 조상이 남긴 유물을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라.

 

즉 스스로 사색하는 자는 자신의 의견을 먼저 정립한 후 비로서 이를 보증하고자 권위 있는 학설을 습득하여 그 의견을 보충한다. 반면에 서적 철학자는 타인의 권위에서 출발한 후 이들의 학설을 긁어 모아 하나의 체계를 정리한다. 그러므로 타인으로부터 얻은 재료로 만들어진 철학이 인형이라면, 자신의 사색으로 만든 철학은 살아 있는 인간인 것이다.

 타인에게서 배운 진리는 장애인의 생활을 돕는 의수, 의족, 틀니와 같다. 혹은 타인의 살점을 이용해 코를 세우거나, 이마의 주름을 펴는 성형수술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스로 사색을 통해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수족으로 노동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며 사상이다.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서 구별된다.

 스스로 사색하는 자의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아름답고 생생한 회화에 비유할 수 있다. 빛은 그림자의 완벽한 배합, 온화한 색조, 현실적으로 배치된 색채의 어우러짐이 훌륭한 회화를 완성하는 데 비해, 서적 철학자의 작품은 비록 풍부한 색채를 자랑하지만, 조화가 결여된 싸구려 모조품 같은 느낌을 준다.

 

 

독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경험도 사색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순한 경험과 사색의 관계는 음식물을 먹는 입과 이를 소화시키는 위장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입을 통해 음식물을 먹을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 떠올리며 위장보다 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사색보다 경험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독일인이 이처럼 모순된 국민성을 보이는 원인은 아직까지 증명되지 않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부족한 정신에서 비롯되는 공허감을 거만하고 화려한 문체와 과장된 몸짓으로 대신하는 것 같다.

 

 

무의미한 문장을 더 써넣는 것보다 차라리 좋은 문장이라도 문맥상 거슬린다면 과감히 잘라내는 편이 훨씬 낫다. “절반은 전체보다 낫다는 헤시오도스의 격언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작가가 모든 것을 다 쓰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독자가 권태를 느끼게 하는 비결, 그것은 모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문제의 핵심과 중요한 부분만 언급하고,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둬야 한다. 적은 분량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다량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작가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다량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소량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돈과 시간을 강압적으로 점거한 채 자신도 쓰지 않고, 타인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에게 이런 소중한 가치가 넘쳐난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다.

 

 

그러나 독서만으로는 작가가 어떤 사상에 도달하기까지 힘들게 수고했던 운동량을 소화할 수 없다. 그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독서로 시간을 보내는 근면한 사람일수록 조금씩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게 된다. 항상 탈 것에 의존하면 마침내 걸어 다니는 힘을 잃어 버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대다수 학자들의 실상이다. 그들은 지나친 다독의 결과 바보가 된 인간들이다. 틈만 있으면 책을 손에 드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정신은 불구가 되었고, 고유한 사색은 폐기처분되었다.

 머리 대신 손이 필요한 막노동에 종사하더라도 학자처럼 정신적인 환자는 되지 않는다. 육신의 노동은 우리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용수철에 어떤 물체를 올려놓고 계속 압력을 가하면 마침내 탄력을 잃듯이 정신도 타인의 사상에 의해 항상 억눌리다 보면 결국 탄력을 잃고 만다.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위장이 병든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면 영양 과잉에 의해 질식할 수 있다.

 많이 읽을수록 책의 내용은 정신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즉 우리의 정신은 칠판과 같다.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쏟아지는 내용을 저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해진 양만큼 알맞게 읽은 책은 분명 독자의 것으로 남는다. 음식은 종류가 아니라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양분이 될 수도 있고, 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읽기만 하고, 읽은 내용을 생각하지 않으면 대부분 잊어버리게 된다. 정신적인 음식물일지라도 보통 음식과 다른 점은 없으며, 섭취한 양 중 50분의 1 정도만 영양분으로 남는다. 나머지는 증발작용 및 호흡과 그 밖의 활동을 통해 사라져 버린다.

 독서의 첫 번째 특징은 모래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다는 점이다. 즉 발자국은 보이지만, 그 발자국의 주인이 과연 이 길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다.

 

 

과거의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평론이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이들이 활동한 분야는 매우 다양한데, 일반 독자들은 대부분 이들에 대한 평론은 읽어도 그들이 남긴 위대한 작품은 읽지 않는다. 그 이유는 최근 발간된 평론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박한 평론가들이 지껄이는 헛된 말들이 위대한 천재가 남긴 작품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천재의 작품보다는 평론가들의 질 낮은 신간을 선택한다.

 다행히 나는 청년시절에 슐레겔의 아름다운 경구를 만나게 되었고, 이 후 슐레겔의 문장을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 슐레겔의 문장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고전을 읽어라. 지금 사람들이 소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교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중은 말 그대로 동일한 성격과 수준의 집합체이다. 어쩌면 대중은 똑 같은 형틀에 부어진 쇳물처럼 동일한 현상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 대부분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상을 주기적으로 습득한다. 그들이야말로 속물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장본인이기에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그들은 최근에 출간된 신간에 무작정 달려든다. 마치 신간을 읽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도태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정작 읽어야 할 고전은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버린다.

 독일 대중의 어리석음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각각의 시대, 각각의 나라에는 고귀한 천분(天分)에 의해 태어난 천재들이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천재들이 남긴 저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일같이 출간되는 저속한 책들, 여름만 되면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파리떼처럼 무수하게 늘어나는 졸작에 열광한다. 그 이유는 신간이 새롭게 인쇄되어 잉크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졸작은 모두 2-3년 후에 쓰레기로 전락하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사람들은 지나간 시절에 탄생한 고전은 볼 생각을 하지 않고, 항상 최근에 발표된 책만 읽는다. 그 때문에 생계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은 유행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게 되고, 시대는 스스로 만든 흙탕물 속에 더 깊이 매몰되어간다.

 

 

몇 해 전 프랑스에서는 의회에서 영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법률을 통과시킨 적이 있다. 이처럼 선진국들은 세계화를 지향하면서도 자국의 언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이에 비하면 한국이 처한 현재 상황은 매우 불우하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차후로 미루더라도 사고와 판단조차 논리적인 주관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철학과 사상이 대학의 강단을 지키는 몇몇 교수들에게 전가된 지 오래다.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세기가 한국에서 적나라하게 반복되고 있다. – 2005.12 김욱

 

 

 

 

문장수집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로, 발췌내용은 책or영상의 본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발췌기준 또한 상당히 제 멋대로여서 지식이 기준일 때가 있는가 하면, 감동이 기준일 때가 있고, 단순히 문장의 맛깔스러움이 좋아 발췌할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당신의 글이 너무 마음에 들어 독수리 타법에도 불구하고 떠듬떠듬 타자를 쳐서 간직하려는 한 청년을 상상해 주시길.

발췌 : 죽지 않는 돌고래 
타자 노가다 : Swee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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