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한비자보다소비자 5: 내 안의 엔지니어 짐승이 깨어나는 소리 혹은 변기 고친 이야기 2021.12.25

죽지 않는 돌고래 2025. 12. 10. 06:42

1.
인간은 각자의 기쁨이 있다. 최근 나는 집을 소소하게 수리하메 소박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2.
아이가 생긴 후,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웬만한 건 내가 고친다, 이다. 게으르고 문송한 인간인 나는 이런 행위와 거리가 멀다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환풍기를 분해하고 도어락을 뜯어보고 매트 시공을 하고 방수처리도 하고 있자니 의외로 엔지니어형 인간이 아닌가, 하는 시건방진 생각마저 든다. 

3. 
10대 당시, 컴퓨터가 고장 나면 호출되는 친구가 나란 사실이 떠오른다. 본인 컴퓨터의 램이 몇 메가인지도 모르고 그래픽 카드 사양도 모르는 녀석을 보면 삶이 저토록 한심할 수 있는가, 기기의 스펙도 파악하지 못하는데 어찌 소유의 자격이 있단 말인가,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리 되었다…!!??

걷기 시작한 이후부턴 시계든, 냉장고든, 오디오든 닥치는 대로 분해하는 걸 좋아하는 데다(이런 짓을 하다 수은에 중독될 뻔도 했지만) 개구리 해부왕이라 불린 내가(이건 개구리를 하도 많이 잡아먹어서 생긴 능력이지만) 사물의 원리를 파악해 고치는 걸 싫어할 리 없다. 언젠가부터 ‘난 이런 거 못하는 사람이야!’ 하고 한계를 설정한 탓에 오랜 기간 그 안에 갇혀 산 게 아닌가 한다. 

4.
우습지만 의외로 나 같은 성향의 사람이 많다. 남의 생각에 둔감한 사람은 스스로의 생각에는 집요한 구석이 있는 법이라 크게는 신체능력이 바뀔 정도로 본인의 생각 안에 갇혀 산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체력장을 5급만 받다가, 우연히 공을 힘껏 던져 기록을 세운 순간부터는 어, 되네, 하고 특급만 받았다. 

(엉망진창인 학창 시절에도 압도적으로 전교 1등을 한 과목이 3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육이다…! 참고로 우리 때는 체육을 넘사벽으로 잘하면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스타가 된다. 걔들은 다른 건 다 만점인데 체육만 못하므로 여기에서 전교 1, 2등이 갈리기 때문이다. 내가 잘 가르쳐주는 놈이 짱 먹는 현실… 그렇다! 나는 킹메이커였던 거쉬다다다다)

나로선 신체만이 아니라 외국어 습득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조금 극단적인 경우긴 하다. 

세상에는 타인의 감정에 민감해 별다른 훈련 없이도 상대방의 생각 변화를 알아채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 걸 보면(주로 타인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접하는 무대 위 사람이 이런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무대 위 사람들을 조심하자!), 이 반대가 존재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여튼.

5.
이런 사유로 최근 엔지니어로서의 천재성(술렁술렁… 술렁술렁…)을 자각한 나는 자신감에 불타오르는 중! 생각해보니 울 회사가 대학로로 이사갈 때 철근 용접도 내가 했는데(그야말로 직원이 만든 회사), 못할 게 무엇인가! 

이 와중에 변기의 이상 현상에 내 속의 엔지니어 짐승이 반응하지 않을 리 없다. 

참고로 우리 집 변기는 원피스 변기로 투피스 변기에 비해(변기와 물통이 분리되는 게 투피스 아니면 원피스)난이도가 높다. 문제는 부품값도 비싼지라 사람을 불러 교체하면 제법 돈이 든다. 

그 돈이면 맛있는 걸 잔뜩 먹을 수 있으므로 원리를 공부해 내가 고친다…! 왜냐하면 난 천재 엔지니어니까…! , 내 안의 엔지니어 짐승이 깨어났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 … 

헌데 전문 수리공의 유튜브를 모조리 살펴봐도 우리 집 변기의 고장과는 무관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즉, 부품의 문제가 아닌 게다. 

으으으으으으음.

6.
이왕 이렇게 된 거 물통을 열어 변기 레버를 30-40번 정도 눌러가며 면밀히 관찰했다. 10번 중 2, 3번의 확률로 레버가 내려갔다 올라오지 않는 현상이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 배수구의 고무 패킹 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레버 쪽 나사와 그 사이의 고무패킹을 0.1-0.5cm 간격으로 풀어주면서 다시 30-40번 정도 관찰 결과, 레버 안쪽의 조임쇠 강도 문제임을 알아냈다. 

추측컨대 9년 동안 변기 물통을 딱히 청소한 적 없고 그동안 만 번 이상 다양한 습도에서 이 행위가 반복되었으니 나사 조임의 강도가 달라지고 레버에 달린 고무패킹이 미세하게 마모된 모양이다. 

부품을 바꿀 수준까지는 아니라 결국 적절한 수준으로 조임쇠를 풀어주고 기름칠을 해주니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별 거 아닌 일에 사람을 불러 인건비 및 부품값 10만 원을 투자했으면 정말 아까울 뻔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시도하면 이렇게 말끔히 되어버리는데 말이다. 



7. 
양자역학 책들에 빠져 와, 세상은 파동 함수네!, 하고 감탄, 아마추어의 순수한 재미에 몰두한 게 최근의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위의 수많은 고장을 관찰하며 원리를 공부하고 고쳐나가는데서, 양자역학의 부스러기를 주울 때보다 한층 지식의 무한을 ‘체감’한다. 

사이즈로 보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이 감정을 더 느낄 듯하나, 평범하고 문송한 인간인 나는 몸으로 미는 감각이 착실한 결과로 전해지는 쾌감에 크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실리콘이 있구나. 아, 줄눈은 원리가 다르니 줄눈을 쓸 때와 실리콘을 쓸 때가 다르구나. 아, 칠만표 방수제의 화학작용은 이렇구나. 아, 원피스 변기와 투피스 변기는 이렇게 다르구나… 따위를 홀로 감탄하며 말이다. 

세상의 지식은 무한하고 우리가 고치지 못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 … 

… 응?!?

2021.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