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잡담록: 지적인 교착 상태와 우아한 위장

죽지 않는 돌고래 2026. 1. 13. 05:31


1.
문장을 수집한다. 30년이 넘었다. 드라마와 영화의 대사, 누군가의 문장을 모으는 행위는 ‘좋다’거나 ‘싫다’는 판단 이전에 공기처럼 당연한 생의 필수품처럼 느껴진다.

2.
생각을 수집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20년 넘게 축적된 수십만 자의 기록이 스크리브너, 솜노트, 구글문서, 워드, 라는 이름의 창고 속에서 조용히 부패하고 있다. 모으고 또 모으는 행위는 성실했으나, 창고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

3.
우연히 책 한 권이 손에 들린다. 스티븐 프레스필드의 "더 피어오르기 위한 전쟁"이다. 이 책은 나같은 인간(회피와 도망의 천재…!! 학교에선 선생님을, 군대에선 소대장을, 회사에선 사장님을, 방송에선 피디님에게서 사라짐! 필진이 원고 봐달라고 할 때도 잘 사라짐…! 휴대폰에서도 잘 사라짐…! 사람만 보이면 사라짐…! 으응…?!?)에게 거울을 제공한다.

내가 안 바는 이렇다.

데이터 수집에 집착하는 행위는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우아한 위장이라고. 스티븐 프레스필드의 경고처럼, 그건 저항(Resistance)의 변종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데이터를 갖추면 비판받지 않을 결과물이 나오리라는 착각. 그 무결함에 대한 망상이 나를 데이터라는 안전한 요새에 가둔다.

나는 기자가 싫을 땐 편집자의 자아로, 편집자가 버거울 땐 교육자의 자아로, 교육자가 지칠 땐 가장의 자아로, 가장이 무거울 땐 게이머의 자아… 아, 이건 안 지치는구나, 어쨌든 도피한다. 이 역도 참이다.

모든 자아를 운용하고 있으나, 실은 어떤 자아에게도 온전한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4.
직전에 읽은 책은 데이비드 이글먼의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다. 책은 그 자체의 내용만이 아닌, 때때로 그 이상의 영감을 주는데, 나는 아래와 같이 느낀다.

입력에만 매몰된 뇌는 출력의 경로를 잊어버린다고. 마침표를 찍지 않는 지적인 탐닉은 결국 출력의 근육을 소멸시킨다고. 이제 데이터 수집을 멈추고, 비참한 형태의 초안을 마주해야 할 시간임을 느낀다.

5.
내게 있어 '출력' 혹은 사회에서 '결과'로 부르는 것들의 길목에 붙여진 이름은 '두려움'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잘한다고 믿는 'OO'와 'OOO'(뭔지는 부끄러워서 못 적겠다!)다.

잘하고 싶다는 욕망은 사회적 평가에 대한 공포를 낳고, 나는 그 공포를 피하기 위해 '지적인 교착 상태'라는 우아한 감옥을 짓는다. 나는 이 감옥 만들기에 미증유의 천재다.

그렇게, 최근에 읽은 책들이 내게 말한다.

6.
끝없는 쉼표와 세미콜론 뒤에서 안락하고 평온한 세월을 보낸다. 이제는 데이터가 아닌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비참함’을 증명하는 게 좋겠다.

좋은 책은 영감을 주지만, 위대한 문장은 저항을 뚫고 찍힌 단 하나의 마침표에서 시작된다.

2026.01.13 AM 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