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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이란 무엇인가

1.과거, 오키나와 레전드인 키나 쇼키치와 인터뷰 중 가장 무릎을 쳤던 게 아래의 말이다. 2. "그러니 생각해 보게. 우아하기만 하면 그 맛이 옅어서 만족할 수 없지. 중간은 역시 어중간하고, 저질은 썪었지. 중간은 저질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아. 아래가 있어야 하니까. 고로 고급은 중간이 없으면 역시 존재할 수 없어. 이 말이 무엇이냐. 정확하게 이등분 할 수 없다는 뜻이야. 예능이나 만화에서 야한 농담을 하는 것도, 과학기술에 대한 것도 다 같은 거야.내가 보기엔 고급만으로는 부족해. 저급, 중급, 고급, 모두 합쳐져야 최고급이 되는 거야. 그러니 최고급 안엔 모든 게 다 있지."3. 이 말을 인터뷰집에 실은 줄 알고 오늘 문득 생각나 책을 뒤졌더니 나오지 않았다. 아쉽지만, 인터뷰 맥락과 맞지 않..

■   잡담 2025.09.04

이마까라 니홍고 2025년 9월호 발행 : 아마테라스에서 나루토까지 / 9월호(1주년)

1.포도주엔 그리스로마 신화가, 사케엔 일본 신화가 들어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나누는 잔, 야쿠자가 의형제를 맺는 형제의 잔, 신사에 바쳐지는 오미키(御神酒(おみき))가 있지요.잔의 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잔이 이어주는 관계는 다릅니다. 남과 여를 잇고, 혈연이 아닌 이들을 가족으로 만들며, 신과 인간을 잇습니다. 사케는 일본에서 인간 관계를 묶는 끈이자 신과 인간의 매개체였던 셈입니다.2.이번 호에서 다룬 일본 건국 신화의 한 장면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여덟개의 머리가 달린 뱀을 무찌르게 해준 것도 ‘사케’지요. 스사노오(아마테라스의 남동생)가 놓아둔 여덟 항아리의 사케에 괴물이 취했고, 그 틈에 목이 잘립니다. 그리고 꼬리에서 나온 검은 훗날 텐노가에 전해지는 삼종신기의 하나가 됩..

김규식과 그의 시대 그리고 정병준 : 세상에는 참으로 거인이 많다

정병준.내 평생 이 분 책 중 아무거나 한권을 골라 그 반의, 반의, 반만 되는 퀄리티로 써도 내 인생작이 될 듯 하다.세상에는 참으로 거인이 많다.아래는 최근 돌베개 인터뷰 용병으로 기고한 글. ■『김규식과 그의 시대』 정병준 저자 X 김창규 편집장사학자 정병준… 으론 부족하다. 세계를 누비며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자료를 발굴, 역사의 빈 공간을 메우는 탐험형 사학자 정도면 얼추 맞다. 그의 주종인 한국 현대사는, 위험하고 논쟁적이며, 빈틈투성이의 자료를 자랑한다. 해서, 사학자들의 기피 종목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가 선생님이고, 보는 자료가 선생님”이라는 신념으로 뚜벅뚜벅, 치밀하게, 걸어왔다.정병준이 11년간 심연을 탐험한 인물이 있다. 조금은 낯선 이름, 김규식. 지금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1시..

잡담록: 새벽 퇴근과 보상 2025.08.25

1.새벽 1시 넘어서까지 집중하다 방금 퇴근했다(컴퓨터 앞에서 타자만 두드리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8시간이 증발했다! 지구는 왜 나를 빼고 공전과 자전을 하는 것인가...!).이럴 땐 문자나 전화가 와도 눈치채지 못해, 반가운 연락을 놓쳐 아쉽다. 허나 누군가 기억해준다는 건 또 얼마나 고맙고 위로받는 일인지. 2. 퇴근 택시 안, 이마까라 니홍고에 오늘 달린 댓글을 본다. 사라진 주말, 이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다.

■   잡담 2025.08.25

천개의 파랑 - 오직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1.매년 "책의 해" 사업이 진행된다. 문체광부와 민간단체가 함께하는 대표적인 출판계의 민관 협력 사업으로 운 좋게도(내가 아니라 출판계와 문체광부가. 으응?!) 2년간 사회자를 맡았다. 책을 읽고, 작가와 수다를 떨고, 독자들의 질문도 받는, 뭐 그런 형식. 책방 DJ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 만난 작가 중 한 명이 천선란이다. 북토크가 끝난 후, 특정 인물의 심리 묘사가 어찌 그리 정밀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심리를 알 수밖에 없는 처지라 궁금했는데 내 알기로 작가는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없다.작가의 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관찰이요"과연. 2. 사회를 볼 땐 항상 끝을 어찌 할지가 고민인데, 의 경우, 를 생각하고 극장문을 열었는데 였다, 고 마무리했다. 8. 내가 추론해낸 바를 말하자면, ..

여중생 A -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아

15년 동안 직장에서 참 많은 이가 떠나고 또 들어왔다. 걔중, 매번 "님 좀 짱인 듯"이라고 외치며(물론 속으로) 애정했던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추천해준 만화책이다(꽤 오래전인데 창고 정리를 하면서 문득 올리고 싶어졌다).어렸을 때 고생이 많았고, 내향적인 동시에 내성적이었으며, 좀 모난 구석이 있는 데다, 의외로 특정 부류의 인간에겐 꽤 잔인한 면도 있는 친구였다(사실 그 부류의 인간이 나였음에도 나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 믿음이 갔고, 또, 좋았다. 나에겐 없는 것이 있었다. 나와 함께 하느라 참 고생이 많았지만, 스페인 속담에 "항상 맑기만 하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는 날도 있고, 바람이 부는 날도 있어야 비옥한 땅이 된다"고 하던데, 그 친구가 지금 그렇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아..

애드 아스트라 - 난 살면서 많은 잘못을 했다. 귀 기울여야 할 때 내 얘길 하고 다정해야 할 때 가혹했다.

브래드 피트의 첫 SF 대작이라는 홍보 문구 때문에 되려 손해를 본 영화. 실제 영화는 기대와 달리 무척 심심하다. 영화 자체도 흥행하지 못했다. 그럼 뭐 어때. 세계에서 인정받는 감독과 배우조차 그렇게 망하면서 성장하는 거지! 잘 풀리는데 익숙해진 인간은 고민하는 시간이 사라지고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을 잃고선 잔뜩 건방져져선 등신같은 짓을 하는 법이거든. 누구처럼? 나처럼!(...라고 하기엔 그렇게 잘 풀려 본 적이 없는 게 함정) 1. 난 살면서 많은 잘못을 했다. 귀 기울여야 할 때 내 얘길 하고 다정해야 할 때 가혹했다. 2. 교전지역엔 처음 이신가요? 북극권에서 3년 복무했네. 육해군 풋볼시합은 수없이 뛰었고. 그럼 알 건 다 아시겠네요. 3.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곳에..

더 보이즈 - 미안해요, 당신한테 다 쏟아부으려고 말한 건 아니예요.

1.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유명하며, 가장 강력한 히어로들을 상대로, 괴팍하고, 무능하며, 결코 도덕적으로도 선하지 않은, 특히 개별적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할 시시한 인간들이 뭉친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엉망진창인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슈퍼 히어로에 의해 각자가 평생 치유받지 못할 상처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특히 이 멤버(더 보이즈) 중 정신적, 물리적으로 최약체인 휴이는 가장 강력한 히어로 중 한 명인 스타라이트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한다. 각자가 가진 상황과 동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서로 '미친짓(?)'을 벌이는 셈이다. 2. 이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는 슈퍼 히어로의 위선과 모순, 사회적 부패를 뼈까지 발라내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있지만(작가들이 사람 괴롭히는 ..

잡담록: 악질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당한 독립운동가와 내란 음모죄로 감옥에 간 그의 아들 이야기

1.김해에서 광복 80주년 독립운동가 사진전을 진행중이라고 한다. 팜플렛 맨 왼쪽 위의 인물은 김해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김정태다.이번 사진전은 그 후손의 사진들로 형상화했고, 김정태의 아들인 김영욱의 사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2.독립운동가 김정태의 아들 김영욱은 평생 보도연맹 학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사회운동가다.그가 평생을 헌신한 이유 중 하나는,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악질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기 때문이다.노무현 정부 당시 만들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밝혀진 실제 이유는, '지역 유지이자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높았던 김정태를 죽이기 위해 강백수로 대표되는 우익 인사들의 모함'이다.3.강백수는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교사 출신으로, 김정태는 ..

■   잡담 2025.08.09

이마까라 니홍고 2025년 8월호 발행 : “카레”로 일본 근현대사 풀기, 이마까라니홍고는 가능합니다

1.카레의 원조는 인도입니다. 강황을 베이스로 각 집안의 전통과 기호에 따라 향신료를 섞어 만든, 그야말로 ‘스파이스 커스터마이징’의 결정판이죠. 한국의 김치처럼 지방마다, 집집마다 어마어마한 다양성을 자랑합니다.2.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삼던 중 이 놀라운 음식의 지혜, 즉, 보존력과 영양성에 눈을 떴습니다. 보급이 전장을 좌우한 시기, 특히 해양 세력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영국에겐 너무나 탐스런 지혜의 산물이었지요. 영국 해군은 인도 커리에 밀가루를 더해 자신의 것으로 만듭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영국 해군을 롤모델 삼은 일본 해군이 이걸 가만 놔둘리 없죠. 주식이 쌀인 점을 감안, 점성을 강화해 커리가 아닌, “카레”를 만들어 냅니다.3.이후 “커리”가 아닌, “카레”는 학교 급식에 진출, 전후 혼..